미학은 일원론이다.
답은 나와 있다. ‘이퀄’이 답이다. 같다는 말이다. 같으면 하나다. 먼저 하나를 만드는 쪽이 이긴다. 정치로 말하면 국민의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자가 짱을 먹는 것이다. 왜인가? 만약 다르다면 서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말한다는 사실 자체로 무언가 하나는 같다는 전제가 선다. 같기는 같은데 뭐가 같은지 모르겠으니 말을 한다. 말을 해서 같은 점을 알아낸다. 고향이 같거나, 출신학교가 같거나, 나이가 같거나, 취미가 같거나 뭐라도 하나는 같아야 대화가 된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말하면 선생님이 얼굴을 찌푸린다. 남녀가 같다고 말하면 박수받는다. 밥과 똥이 같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종교, 장애, 나이, 신분, 학력, 성별, 인종, 국적, 나이, 지역, 이념으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차별하는 집단은 전쟁에서 패배하기 때문이다. 차별팀과 평등팀이 싸우면 평등팀이 이긴다. 차별 잘하는 인도와 아랍을 보면 알 수 있다. 차별국가는 자신이 가진 자원의 백퍼센트를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원력이 답이다. 그러나 미학으로는 차별한다. 지로 무지를 차별한다. 선으로 악을 차별한다. 참으로 거짓을 차별한다. 성으로 속을 차별한다. 문명으로 야만을 차별한다. 모두 용서해도 불관용은 용서가 없다. 왜인가? 평등 바로 그것이 미美이기 때문이다. 미추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평등과 차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은 받아들이나 차별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차별을 차별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차별이기 때문이다. 다 포용되나 일베충은 퇴출된다. 다 포용되나 시체는 퇴출된다. 다 포용되나 메르스는 퇴출된다. 다 포용되나 비겁자는 퇴출된다. 무엇인가? 구조론으로는 토대의 공유다. 토대를 건드리는 자는 곧바로 죽인다. 공유지를 사유화 하는 자는 죽인다. 버스 운전기사를 공격하는 자는 죽인다. 반칙하는 자는 바로 죽인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차별하는 자를 차별한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는 죽인다. 답은 하나다. 둘은 답이 아니다. 하나와 둘을 판정하는 기준을 깨는 자는 죽인다. 그것이 평등이다. 평등은 어떤 경우에도 평등 자신을 보호한다. 평등을 깨는 자는 죽이는 것이 평등이다. 평등은 문명이며 차별은 야만이다. 차별을 차별하는 것이 문명이다. 불관용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관용이다. 모두가 함께 먹는 강물에 녹조라떼를 풀어놓는 넘은 죽이는게 관용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이원론은 2이므로 틀렸고 1원론은 1이므로 옳다. 2를 차별하는 것이 평등이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서로 다른 자들이 공존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온 역사다.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는 것은 미美다. 차별하는 것은 추醜다. 천칭저울 위에 둘이 평등하게 서 있다. 저울의 축을 무너뜨리면 저울은 기운다. 저울의 축을 지킴으로써 저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미美다.
시소 위에 올려진 둘 중에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은 차별이다. 시소의 가운데 축을 지키는 것은 미학이다. 2원론은 시소에 올려진 둘을 논하고 1원론은 가운데 축 1을 논한다. 남과 녀를 저울에 올려 가벼운 쪽을 퇴출하면 2원론이고 저울이 기울 때 그 축을 옮겨 바로잡으면 1원론이다. ◎ 2원론.. 천칭의 접시 2를 건드려서 문제를 해결한다. ◎ 1원론.. 천칭의 축 1을 건드려서 문제를 해결한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 때 축을 움직여서 바로잡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은 두 개의 답이 없다. 저울의 평형을 이루는 방법은 축을 움직여 바로잡는 방법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미학은 미학을 부정하는 자를 차별한다. 평등은 평등을 부정하는 자를 차별한다. 관용은 관용을 부정하는 자를 차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