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완성 학문의 완성은 인류의 보편적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최고의 의식수준에서 소통하게 한다. 최고 레벨의 소통에 의해 인류의 집단지성을 성립시킴으로써 학문의 체계는 옳게 구축된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지혜를 모으려면 소통해야 한다. 개인이 깨달음이라는 소통수단을 움켜쥐어야 가능하다. 깨달음이 소통을 낳고, 소통이 지성을 낳고, 지성이 학문의 체계를 낳는다. 그 학문의 체계를 전개한 결과는 역사의 진보와 문명의 발전이다. 문명은 60억 인류의 마음을 세포로 삼아 생물처럼 자란다. 그 정점에서 전일적 존재로 거듭난 인간이 신과 대등하게 소통한다. 무신론은 문명의 진정한 목표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종교가들이 천국과 내세를 말하고 혹은 영생을 말하지만 유치할 뿐이다. 그 진화과정에서 얻은 욕망의 부스러기로 비참을 벗어날 수는 없다. 참된 기쁨은 개인의 본능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상의 실현에 있다. 좋은 것 두고 나쁜 것 찾지 말라. 인류가 소통하여 전일적 존재로 거듭남으로써 신의 친구가 되는 이상의 가치는 없다. 깨달음 깨달음은 자연의 완전성을 그대로 인간의 의식에 반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인간 뇌기능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하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사회적 의식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사회적 의식은 둘 이상의 개별자 사이에서 소통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거울처럼 반영된다. 뒤집혀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특별한 방법을 거쳐야 올바른 소통을 이룰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은 존재론으로 해명되고, 인간의 사회적 의식은 인식론으로 해명된다. 사회적 의식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귀납법을 따르고, 자연의 완전성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연역법을 따른다. 둘은 작동방향이 완전히 상반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완전성의 깨달음이다. 자연의 완전성은 존재의 불완전성과 연계되어 있다. 존재는 명목적 존재와 기능적 존재로 나뉜다. 명목적 존재는 존(存), 기능적 존재는 재(在)다. 이순신 장군은 명목으로 실존하지만 기능적으로 부재한다. 사랑의 끌림은 기능적으로 실재하지만, 당사자의 각성을 거쳐야 명목적으로 완성된다. 깨달음이 도달하여야 하는 자연의 완전성은 명목적 존재를 상부구조로 세우고 기능적 존재를 하부구조로 딸려서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을 완성하는 것이다. 완성하면 통한다. 소통이 일어난다. 존재는 기본적으로 불완전하며, 자연의 완전성이라는 생명성을 얻어 역동적으로 기능을 실현할 때 낳음의 창조성에 의해 완성된다. 에너지 순환, 낳음과 진보와 증폭과 공명이 있어야 완전하다. 이 부분은 미학으로 해명된다. 미학은 학문의 상부구조를 성립시켜 하부구조를 이루는 과학 위에 올라탄다. 미학의 상부구조는 외부를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며 가치를 판단하여 짝을 짓는다. 하부구조는 내부를 바라보며 질서를 부여하고 기능을 수행한다. 상부구조는 완전성 원리에 지배되고 하부구조는 대칭성 원리에 지배된다. 인간이 흑백논리로 파악하는 선과 악, 음과 양은 대칭성이다. 여성성과 남성성, 하늘과 땅, 앞과 뒤, 플러스와 마이너스들은 하부구조의 대칭성들이다. 상부구조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아닌 비대칭적 사고, 입체적 사고에 의해 파악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완전성의 상부구조와 대칭성의 하부구조는 모듈화 된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형태로 모듈화 된 자연 그대로를 통째로 파악하고 이를 창조에 반영하는 것이 미학의 스타일이다. 완전성의 모듈을 해체하여 특정환경에서의 주어진 기능만을 추적하는 것이 과학이다. 깨달음은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포함한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추적하여 자연의 모듈을 통짜 덩어리로 인식한다. 과학은 입구와 출구를 빼고 그 중간 단계만 해체하여 개별적으로 인식한다. 자연의 모듈은 구조체를 이루어 원자와 같은 단위를 성립시키며 이는 완전성과 포맷과 밸런스와 포지션과 데이터로 구축된다. ● 시스템(system) 이는 물질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모듈화된 심층구조를 입체적 이미지로 머리 속에 그려야 단선적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에 따른 흑백논리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 질 - 결합한다. 인간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의식 역시 이와 동일한 구조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이처럼 심층구조로 모듈화 되어 있지만, 그 의식의 작동에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단계가 있다면 1단계씩 밟아올라가는 형태의 학습으로 도달가능하지만 단계가 없으므로 위 다섯가지 구조를 한꺼번에 작동시켜야 한다. 의식은 정신, 의식, 의지, 의사, 감정이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때 감정이나 의사와 같은 낮은 단계는 환경의 작용에 따른 조건반사로 즉각 나타낼 수 있다. 갓난 아기가 배가 고파 우는 것은 일종의 조건반사로 의식의 높은 단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과 의식, 의지의 높은 단계는 주어진 상황에 의식적으로 개입하여 적극적인 가치판단을 해야한다. 둘 중에서 판단하여 하나를 선택하려면 언어와 논리와 미학적 스타일을 얻어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대응한다. 직관적 대응은 과거의 경험을 따른다. 과거에 했던 판단과 같게 판단한다. 그러한 무의식적 판단은 오류의 가능성을 높인다.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형태로 일어난다. 에너지가 없으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공급받는 구성은 존재론의 전개를 따라 질≫입자≫힘≫운동≫량 하나 뿐이다. 의식의 작동 역시 ‘긴장’이라는 이름의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의식은 정신의 긴장에서 몸의 이완이라는 일방향으로 진행하며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적 소통은 반대다. 왜냐하면 두 주체가 동일한 의식을 공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의 의식이 일치하는 만큼만 한정되어 일어나므로 사회적 의식은 낮은 단계부터 차례로 확인된다. 사회적 의식은 인식론의 전개를 따라 감정≫의사≫의지≫의식≫정신의 순으로 역행한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높은 의식을 나타낼 수는 없다. 언어와 논리 그리고 미학적 스타일이 없기 때문이다. 갓난 아기가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어른스러운 행동을 보일 수는 없다. 타인의 감정과 사회적 ‘니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높은 사회적 의식은 온전한 소통에 의해서만 도달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필요하다. 신과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 역사와의 소통, 세상 전부와의 전일적인 소통은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회적 의식의 수준차가 존재하며, 학습에 의해서는 도달 가능하지 않다. 의식의 작동은 자동차 엔진에 비유할 수 있다. 4행정 기관은 흡입≫압축≫점화≫폭발≫배기의 구조론적 5단계로 작동한다. 이는 구조론의 질≫입자≫힘≫운동≫량과 완전히 같다. 이때 흡입이나 압축 단계에서 엔진의 작동은 완전하지 않다. 점화와 폭발을 거쳐 배기까지 가야 엔진이 작동한다. 비로소 발동이 걸리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또한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의 5단계를 순식간에 전개시킨다. 그 중간에 멈춤은 없다. 사회적 의식이 낮은 사람이라도 이 5단계를 밟아야만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의식은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의 각 단계를 거치며 각각 판단을 내린다. 5회의 판단에 의해 하나의 행동이 결정된다. 사회적 의식이 낮은 사람은 이 중 상위의 몇 단계를 생략한다. 과거에 내렸던 판단을 빌어쓰며 과거의 행동을 반복한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지금 상황에 맞는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을 판단할 언어, 논리, 미학적 스타일이 없으니 판단이 불가능하다.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은 과거에 했던 정신, 의식, 의지, 의사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감정처리만 다르게 한다. 상위단계의 정신, 의식, 의지를 사용하려면 정교한 논리구조와 미학적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관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의 5단계에서 정신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 즉 사건 앞에서 긴장하는 것이다. 의식이란 일관된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타인에게 일관된 신호를 보내야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톱으로 아기의 피부를 살짝 긁으면 쾌감과 아픔을 동시에 느낀다. 이때 아기는 웃어야할까 아니면 울어야 할까? 엄마가 문을 잠그고 나간다. 아기는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가 한참 만에 돌아오면 반가와서 웃는다. 그러나 곧 그동안 나갔던 것이 야속해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에게 경고를 보내는 의도된 행동이다. 반가운 마음이 크면 기뻐서 울 수 없다. 울다가 웃으면 이상하다. 이때 일관된 반응을 나타내려는 것이 의식이다.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서 상대방에 경고하려면 고도의 논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여기서 성격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사회적 의식이 발달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일관된 신호를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웃다가 울다가 하면 상대방이 오해하므로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서 통일한다. 성격의 형성에는 전략적 판단이 개입해 있다. 이 부분은 환경에 따라 후천적으로 성격이 형성된다. 어른이 되어서 고도의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때 일관되게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의식이 낮은 자는 생각없이 과거의 체험을 반복하며 편하게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여러 인생의 목표들 중에서 현실성 있는 부분만 채택하므로 타성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는 구세대의 보수화 경향으로 나타난다. 구세대의 보수화 경향이나, 정치적 변절은 인식이 바뀐게 아니라 전략이 바뀐 것이다. 젊은이의 높은 이상은 좋은 파트너를 선택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노인은 이미 파트너를 얻었으므로 높은 이상이 불필요하다. 즉 의식이 낮은 사람은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심리제어가 필요한 높은 의식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고, 둘째 일관성을 지켜갈 용기와 성실성이 없기 때문이고, 셋째 고도의 심리제어에 따르는 스트레스 때문이고, 네째는 이미 파트너를 얻어서 이상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계단을 밟으면서 한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펼쳐진다. 차례로 전개한다. 높은 단계의 의식을 얻으려면 과거의 체험을 재활용하는 타성을 끊어야 한다. 의식의 게으름을 끊고, 그 풍선 안에 논리와 언어, 스타일을 채워야 한다. 의식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좁게 쓰느냐 넓게 쓰느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곧 세계의 전부다. 우물 바깥의 세계는 모르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의식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높은 의식을 쓰려면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소통수단인 언어, 개념, 논리, 스타일, 깨달음이 필요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소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이상, 문명의 발전, 역사의 진보를 목표로 제시해야 한다. 그 목표를 공유하고 그 목표에 다가선 정도에 따라 인격이 평가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높은 인격을 얻은 사람이 사회에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인류는 소통하여 전일적 존재로 거듭나며 신과 대등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것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함께 손잡고 그 빛나는 길을 가겠는가? 아니면 DNA라는 시계태엽이 작동하는 욕구충족에 홀리겠는가? 타인과 비교하고 우쭐대는 무신론자든, 내세와 천국을 찾는 종교인이든 시계태엽의 비참에 다름 아니다. ∑ |
극을 답사하는 이가 있고,
그를 기다려 주는 이가 있고,
그들 만남을 기록하는 이가 있고,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띄울 수 있는 소통망까지 있으니, 마음 호강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