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창조론 구조론 다윈의 진화론은 우연론이다. 주사위를 던졌는데 무엇이 나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거다. 천만에. 주사위를 던지면 정확히 1/6의 확률로 1에서 6 중의 하나가 나온다. 알 수 있다. 물론 다음 회차에 3이 나올지 4가 나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연은 아니다. 주사위를 백만 번 던져도 7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확률대로 나온다. 창조론은 불가지론이다. 이게 다 하느님의 소행이니 하느님에게 물어보라는 말이다. 이건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모르겠다는 건데, 모르면 닥쳐! 발언권이 없다. 찌그러져야 한다. 논의에 끼워줄 수 없다. 말상대가 아니다. 한가지 각별한 점은 이들이 진화를 매우 어려운 일로 여긴다는 거다. 구조론은 진화를 쉬운 일로 본다. 모듈 단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듈의 모듈이 있다. 그 모듈의 모듈의 모듈이 있다. 이렇게 계속 상부구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섯으로 정리된다. 어떤 것이든 최소 차별화된 5개만 있으면 이들을 집적하여 3125개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쉽다. 바둑은 검은돌과 흰돌만으로 터무니없이 많은 조합을 만들어낸다.
◎ 자연선택 – 진화는 우연히 일어났다. 무엇인가? 5억년 전이나 혹은 10억년 전에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치자. 그들이 지구에 바이러스나 세균 수준의 전혀 진화되지 못한 원시단계 생물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구의 크기나 온도, 중력, 물질을 관찰한 끝에 앞으로 5억년이나 혹은 10억 년 후의 지구의 모습을 정확하게 예측해낼 수 있었다. 효모나 세균의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여 더하고 빼고 곱하면 원숭이도 되고 사람도 되고 고양이도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있다. 진화는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라 일어난다. 바흐를 만나보면 뒷날 모차르트의 등장을 예견할 수 있다. 정확히 구조론의 전개순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따른다. 무엇인가? 질에서 거의 결정되는데 질은 매우 큰 차이지만 외견상 비슷해 보이며 양은 작은 차이지만 외견상 큰 차이로 보인다. 그러므로 필자는 오래전에 인간은 바퀴벌레로부터 그다지 진화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거다. 잘 그려면 2D 애니와 대충 그려진 3D 애니를 보면 2D가 더 우수해 보인다. 사실 2 D가 더 복잡하다. 그러나 관측자의 입장에서 복잡한 것이 연출자 입장에서는 더 쉽다. 반대로 연출자 입장에서 복잡한 것은 관측자 입장에서 더 쉽다. 연극은 막이 올랐다 내렸다 하며 복잡하지만 영화는 스크린 뿐이라서 단순하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편집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고 실제로는 영화가 더 복잡하다. 겉보기와는 다른 것이다. 사실 영화가 더 쉽다. 아이폰만 있으면 혼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관측자 시점인가 연출자 시점인가에 따라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깨달음은 관측자 시점을 연출자 시점으로 바꾼다. 이러한 원리는 비단 생물의 진화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도 적용이 된다. 주식거래라도 그렇다. 개미는 관측자이고 큰손은 연출자다. 개미가 어렵지 큰손은 쉬운 거다. 개미는 주가가 올라야 돈을 벌지만 큰 손은 주가를 떨어뜨려서도 이득을 본다. 의도적으로 흔들어 가격을 떨어뜨린다. 경마꾼이 돈 벌기는 어렵지만 마사회가 돈 벌기는 매우 쉽다. 도박꾼이 돈따기가 어려울 뿐 카지노가 돈 벌기는 매우 쉽다. 연출자 포지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관측자 포지션에 있으므로 어려운 것이다. 연출자 포지션으로 바꾸면 된다. 매우 쉬운 건데 할줄 아는 사람이 노무현 이후 없다. 물론 정치인이 연출을 너무 심하게 하면 가식이 되지만 말이다. 진정성타령을 하면서 연출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정치는 연출이다. 해야 한다. 다시 정이냐 동이냐다. 권력은 동에서 나온다. 사회의 모든 차별은 정이므로 나쁜 것이다. 흑인이냐 백인이냐 피부색은 정해져 있으므로 정이다. 그러므로 피부색의 차별은 나쁘다. 그러나 창의와 혁신과 도전과 모험과 사랑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동이다. 창의가 모방을 차별하는 것은 정당하다. 혁신은 구태를 차별한다. 도전은 방관을 차별하고, 모험은 타성을 차별한다. 할 차별을 하지 않으면서, 연출하지 않고 가만이 앉아서 진정성을 보여주겠다는 식의 태도는 거짓말이다. 할 차별은 당연히 해야 한다. 정치는 연출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성이다. 진정성은 정에 없고 동에 있다. 우리는 움직임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것을 차별해야 한다. 왜인가? 그것이 자연의 본래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동이다. 자연은 진화한다. 자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자연은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라간다. 자연은 확률로 예측이 가능하다. 어릴 때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코카서스 인종의 코가 뾰족한 것은 그들이 사는 지역이 유난히 춥기 때문에 찬 공기를 막기 위함이라고. 아프리카인의 코가 넓적한 것은 더운 공기를 순환시키가 위함이라고. 거짓말이다. 코카서스 인종이 사는 지역은 춥지 않다. 추운 지역은 몽골이다. 몽골리안은 코가 뾰족하지 않다. 사실은 그게 인종차별이다. 케냐의 흑인도 코는 뾰족하다. 그들이 유난히 코가 뾰족한 이유는 그냥 그들이 그리로 몰려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뿌리는 인도에 있다. 인도가 특별히 추운 곳은 전혀 아니다. 몽골리안의 눈이 백인이나 흑인처럼 움푹 꺼지지 않고 돌출되어 있는 것은 잘 보기 위함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듈단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능동적으로 적합한 곳을 찾아 움직여 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반드시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진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만 결정론은 아니고 확률론입니다. 주사위를 몇 번 던져서는 예측이 무의미하지만 백만 번 던지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상당히 의미있는 데이터가 얻어진다는 거죠. 정에 두면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동에 두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움직이면 만나게 되고 만남의 접점은 작은 1이며, 누구라도 그 1의 좁은 관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