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시기 임박이다. 오시기 전에 뭐라도 하나 깨달아놔야 체면이 선다. 첫째 나를 깨달아야 한다. 배우라면 내가 맡은 배역을 깨달아야 한다. 내 배역이 홍길동인지 일지매인지 헷갈리면 곤란하다. 나의 캐릭터가 무엇이냐다. 둘째는 무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내게 에너지를 주는 원천이다. 객석이 들어찬 무대인지 아니면 텅 빈 극장에서의 리허설인지 헷갈리면 안 된다. 내게 힘을 주는 것은 감독님의 격려가 아니라 객석의 함성임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는 대본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맡은 구체적인 미션이다. 다음은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 관객이 오르가즘을 느끼도록 밀당을 연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걸로 세상에 되돌려 주는게 진정 무엇인지를 알아채야 한다. 돈 받았으니까 거기에 맞는 값을 하는게 아니고 이러한 구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당신이 지구라는 무대에 초대되었거든 캐릭터가 있고 무대가 있고 역할이 있다. 완수해야 한다. 나를 깨닫는다는 것은 나의 권리, 존엄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독립적 의사결정능력이다. 무대는 곧 세상이다. 그 세상의 진리와 그 진리의 작동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의 진보가 내게 에너지를 주는 원천이다. 먼저 독립적인 의사결정능력을 얻고 다음 세상을 장악해야 한다. 리더십을 키우고 통제권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나무처럼 나는 자라나야 한다. 공간적으로 나는 크게 자라나야 한다. 자라는 그것이 내가 세상에 보내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만큼 자란다. 또 시간에서 풍요롭게 연주해야 한다. 그리고 후배에게 전달해야 한다.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고집멸도, 연기법 따위다. 별 거 아니다. 고집멸도는 내가 바로 하나의 독립적인 의사결정단위라는 거다. 그래서 고집이다. 인간의 불행은 가족, 친구, 국가 때문에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더라는 좌절감 때문이다. 가족, 친구, 국가의 문제는 가족, 친구, 국가에 맡기고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문제를 분명히 하면 답이 명확해진다. 연기법은 사건의 단위다. 우주는 사건의 단위로 존재하며 나는 의사결정단위로 존재한다. 우주는 우주로 완성되면 그만이고, 나는 나 자신으로 완성되면 그만이다. 문제는 우주가 나의 적이냐 아군이냐다. 각자 완성되어야 한다. 우주가 미완성인 채로, 내가 미완성인 채로 만나므로 서로 불행해진다. 각자가 서로 완성되어 다시 만날 때 세상과 나는 한 편이 된다. 문제는? 그 세상이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거다. 편가르기가 되는 이유는 변화 때문이다. 서태지가 나오면 구세대의 음악과 차별화 된다. 신호탄이 쏘아진 거다. 대중의 권력이 작동한다. 명백히 의도가 있다. 차별화 해서 해체모여 할 심산이다. 판갈이 하고 무대를 새로 세팅하겠다는 흐름이 있다. 이걸로 편이 갈린다. 정답은? 세상의 편에 서면 된다. 세상에 대한 신뢰,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조금 지체되기는 하지만 역사는 결국 돌고 돌아서 바른 길로 돌아온다. 당신이 흔들린 이유는 미완성인 세상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인생사의 허다한 고뇌가 무엇이던가? 나를 종잡을 수 없다. 세상을 종잡을 수 없다. 내편인지 네편인지 헷갈린다. 미완성인 채 미완성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를 완성하고 완성된 세상에 인사할 일이다. 바람은 잦아들고 꽃은 핀다. 세상의 흐름 안에 나를 태우고 가면, 세상이 중심을 잡고 나도 중심을 잡는다. 그것이 도다. 깨달음의 결론은 길게 보고, 중심을 잡고, 큰 세상의 편에 서라. 세상에 빨대를 꽂고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하라. 작은 물결에 놀라지 말라. 대양을 건너는 큰 배처럼 의연하게 가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완성된 나의 모습으로 완성된 세상의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 완성된 나는 독립적 의사결정능력이며 완성된 세상은 역사와 문명의 진보다. 진보하여 어딜 가는게 아니다. 팽이는 돌때 안전하고, 배는 항해할 때 안전하며, 비행기는 뜰 때 안전하고, 세상은 진보할 때 안전하다. 그 진보하는 과정이 곧 완성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가 불안해 하는 이유는 세상이 연극무대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날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연극은 끝나야 완성되는게 아니고 열정적으로 연극할때 그 과정에서 완성된다. 끝나고 쫑파티 할 때만 기다리다가 당신은 애드립을 놓치고 연기를 실패하고 어색해진다. 그래서 좌절한다. 열정적인 이 순간이, 이 혼란스러움이 바로 생동감 있는 완성의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죽은 세상이 아니라 산 세상을 원하였다면 동물처럼 뛰어다니는 세상의 역동성에서 완성의 모습을 포착하고 화음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은 동적 환경이다. 세상이 멈추면 보조를 맞추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움직이는 동에 당신은 보조를 맞춰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어야 한다. 다들 무대에서 내려가면 혼자 독창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어울려야 한다. 작은 바늘구멍으로 보면 세상은 온갖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큰 마음으로 보면 세상은 정확히 제 갈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21세기는 나름대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대본의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씌어져 있을지 뻔한 것입니다. 기승전결로 가는 법인데 반전이 있기 직전에 좌절한다면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다가 중간에 극장에서 빠져나온 꼴입니다. 끝까지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