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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877 vote 0 2009.11.06 (16:14:48)

의식의 발달단계

도둑의 세계에도 도(道)가 있다더라. 감추어둔 재물을 알아내는 성(聖), 남 먼저 뛰어드는 용(勇), 맨 나중에 나오는 의(義), 실수없이 드나드는 지(知),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인(仁)이 있더라고.

이 다섯 가지 덕(德)을 지니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전례는 없다고 하니 이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런던 남부지역 슬럼가 소매치기 세계에도 도덕은 있다. 그 바닥에서 통하는 법도가 있다.

유명백화점 명품매장에서 태연히 명품백을 따야 그 바닥에서 인정받고 명성을 얻는다. 품위가 있지 뒷골목의 퍽치기, 아리랑치기 따위 잡배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또한 책에서 읽은 이야기.

높은 의식의 세계가 있다. 깨달음이 있다. 한 단계씩 밟아올라서 높은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의식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사용하지 않는다. 왜? 통용되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미학이 필요하고 스타일이 필요하다. 높은 수준의 세계를 능숙하게 소화하려면 걸맞는 언어, 개념, 논리, 컨셉,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서 행할 수 없다.

미학과 스타일을 만들어 놓으면, 문화양식이 발달해 있으면, 그 내밀한 논리를, 언어를, 개념을 모르는 일반 대중도 쉽게 따라온다. 세종대왕이 쉬운 한글을 만들어 놓으니 다들 공부하듯이.

학자들이 의식의 발달단계를 말하는 이유는 아기들은 그 언어, 논리, 개념, 스타일을 배우지 않아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낮은 단계에서 약간씩은 태내에서부터 사용한다.

또 그 논리와 언어를 가졌다 해도 그것을 알아주는 그룹에 속해야만 한다. 도척도 거느리고 있는 졸개들이 있으니 우쭐해서 폼잡느라고 성과, 용과, 의와, 지와, 인을 말하는 것이다.

혼자서 터는 탈주범 신창원도 치사한짓 다 하다가 방송을 타게 되니 갑자기 폼잡고 대도인 척 하더라고. 그러므로 사회가 총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으면 인간들의 수준은 낮은 단계에 머무를 뿐이다.

그렇다 해도 인디언 추장은 홀로 높은 의식을 가진다. 단지 소통하는 수준이 낮을 뿐이다. 명박이, 인촌이, 운찬이들이 설치면 군자도 입을 닫고 선비도 몸을 감춘다. 다들 수준이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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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항상 오해되는 법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벌써 오해할 준비를 갖추고 이맛살 잔뜩 찌푸린 채 읽는 분들이 있을 터이다. 아무리 침착하게 설득해도 결국은 오해하고 만다.

오해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오해가 상대방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개미당, 달마실에서 구조론연구소로 넘어온 이면에는 그러한 갈등이 있다.

기저에 수준차 문제가 있다. 잠깐 스톱! 일부 독자들은 벌써 오해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이미 오해다. 수준차가 있고 또 수준이 높다고 해서 인격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수준은 더 높은 레벨에서의 소통이다. 덧셈 하다가 방정식으로 넘어간다. 무엇보다 ‘수준문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소통의 문제다. 수준은 두 사람 이상 있을 때 성립한다.

두 사람이 대화하면 어느 기준에 맞추게 된다. 초딩과 대딩이 대화하면 초딩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계속 초딩 수준에 맞추고 있으면 발전이 없다. 여기에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려야 유익한 대화가 가능하다. 지난번에 썼던 ‘지성’에 관한 일련의 글도 그렇다. ‘난 지성이 없단 말인가?’하고 화를 내는 독자들이 많았다. 물론 누구나 지성을 가지고 있다.

지성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지성이 그 동아리에서 통하는 좁은 의미의 지성일 뿐. 개에게도 불성이 있지만 개떼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불성일 뿐이다. 수준 올려야 한다.

‘의식의 단계는 없다.’ 이런 말은 다들 좋아한다. 그리고 일제히 긴장을 풀어버린다. 공부하지 않는다. 단 번에 도가 통했으니 놀자판이다. 탱자탱자 잘 논다. 역시 모임은 망하고 만다.

지성이 있고, 수준이 있고, 소통의 레벨이 있고, 격차가 있다고 하면 다들 삐쳐서 등 돌리고, ‘단계가 없다’고 하면 탱자탱자 놀자판 벌여서 역시 깨지고 만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

모순적 상황의 존재 자체를 납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함으로써 명석한 인식이 가능하다. 군에서 간부와 사병으로 계급을 갈라놓은 것은 수준차가 있기 때문이다.

625때 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일도 많았다. 저격수에 의해 소대장이 전사해 버려서 소대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소대장 임무를 맡기면 소대장 역할을 해낸다. 역할이 있을 뿐 단계는 없다.

역할은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다. 누구든 소년가장이 되면 일곱살이라도 어른처럼 행동한다. 한국학생들처럼 부모가 과보호하면 의식성장이 중지되어 애들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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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제에 있어서 항상 이것이 문제가 된다. 아무님의 바탕소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모토를 내걸었다. ‘단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공자는 이 방법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단계를 두고, 석차를 내고, 시험을 치르고, 라이선스를 발급했다. 공자의 방법과는 정반대로 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아무님의 바탕소가 성공해서 다수의 아류가 생겨나면 어떨까?

그들은 가르치지 않는 1단계, 가르치지 않는 2단계 등으로 등급을 나누고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을 맹렬히 가르쳐서 더 큰 성공을 이룰수 있다. 어쨌든 공자의 방법을 배반한 제자들은 크게 성공했다.

구조론을 이해하려면 닫힌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단계가 없다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다. 사회적인 의식의 발달에는 확실히 소통의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크게 보면 역시 단계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혼란스럽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어낸다. 과거에는 사용하지 않는 개념들을 조직한다. 나는 논리를 머리에 띄워놓고 이야기 하지만 독자들은 단어를 접수하니까.

뱉어진 어휘를 보지 말고, 머리에 띄워진 논리를 보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만 봐도 1단계 점수는 나온다. 달을 보느라고 고개 들어봤자 목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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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의가 맹자와 순자의 논쟁과 같은 패턴임을 포착할 일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 내부에 미리 갖추어져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끌어낸다. 바탕소의 ‘가르치지 않음’과 일맥상통이다.

필자의 ‘단계가 없다’는 입장과 같다. 이 노선이 옳음은 누구나 직관으로 안다. 그러나 논쟁을 벌이면 순자가 이긴다. 학부모들은 대치동 순자학원에 자기 아이들을 보낸다. 맹자학원 망했다.

순자의 차별주의에서 법가사상 나왔다. 법가로 진왕 정은 중국을 통일했다. 이쯤 되면 현실에서는 순자가 옳고, 법가가 옳고, 스파르타식이 옳고 민주주의가 틀렸음을 누구나 긍정할 수 밖에 없다.

맹자는 ‘뉘라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지 않겠는가?’하고 깨우쳤지만, 이런 식이라면 벌써 말이 길다. 한 단어로 압축해야 한다. ‘측은지심?’ 역시 어렵다. 맹자는 상당히 실패했다.

맹자의 이 논리는 상당한 고급논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자가 옳음을 직관으로 알아도 이런 정도의 복잡한 논리를 소화못한다. 이 논리로 친구와 논쟁해서는 진다. 순자의 반론은 간단하다.

“다 필요없어. 성적표 들고와봐!”

과연 순자가 옳은가? 그런데 왜 진나라는 망했지? 과연 스파르타는 옳은가? 그런데 왜 아테네의 영광이 더 오래 남았지? 최종적으로는 맹자가 옳다. 입구와 출구는 맹자의 방법이 성공한다.

입구의 공자는 ‘가르치지 않음’으로 가르쳤고, 중간은 순자의 법가주의로 매질을 해서 인위로 가르쳤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맹자가 승리하여 출구에서 유종의 미를 장식한 것이다.

맹자와 순자. 인위와 무위.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상과 현실, 합리와 실용, 미학과 과학 두 교육노선은 단군이래 대립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다.

구조론은 순서와 방향을 지시한다. 입구와 출구는 맹자가 옳고, 중간은 순자가 옳다. 입구와 출구는 단계가 없지만 중간은 차별과 단계가 있다. 그러나 총론에서는 역시 단계가 없다. 맹자가 옳다.

의식의 구조

과거에 쓴 글에서는 정신을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의 5단계로 나누었다. 전체가 의식이지만 굳이 세분하자면 이렇다. 갓난 아기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3개월이 되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의사’는 ‘돈을 다오.’ ‘밥을 다오.’ ‘옷을 다오.’ 하며 구체적으로 액션을 취하는 것이고, 의지는 돈이든, 금이든, 부동산이든, 증권이든, 좋은거면 됐다는 식이다. 역시 좀 더 높은 수준이 된다.

의식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컨셉을 가지는 것이다. 정신은 총체적인 깨어있음이다. 배로 말하면 정신은 선장이 있는 것, 의식은 엔진이 있음, 의지는 방향타가 있음이다.

의사는 스크류가 돌아가고 돛을 펼치는 것이며 감정은 피드백이다. 그 배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취다. 파문이다. 아기가 의식이나 의지의 높은 단계를 표현하지 못하지만 내부에 숨겨져 있다.

아기는 높은 단계가 없는게 아니라 외부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섯 단계는 엄마 뱃속에서 갖추어져 있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낮은 단계부터 순서대로다.

인간이 사회에서 의식을 드러내는 것도 그러하다. 의식화가 되어야 의식을 드러낸다. 과거의 중국인들은 중국이 천하라고 여겼으므로 세계의식이 없다. 그들에게는 중국의식이 세계의식이다.

우물안의 개고리들은 우물의식이 세계의식이다. 이는 사회화과정을 거쳐서 학습되어야 하는 인식론 영역이다. 이는 의식을 표현할 단어가 없고, 논리가 없고, 컨셉이 없고, 스타일이 없는 것이다.

인디언 추장도 훌륭한 세계의식을 갖추고 있다. 악플이나 다는 알바들도 세계시민의식이 있다. 단지 사용방법을 모를 뿐. 그들은 수준이하들과 상종하므로 수준이하를 상대하는 초식만 발달시켰다.

김동길, 전여옥, 조갑제, 지만원들 모인 자리에서 누가 세계시민의식을 이야기하면 비웃음을 살 뿐. 그들도 알지만 창피해서 그런 단어 안 쓴다. 어색해서 안 쓴다. 언행일치가 안 되잖아.

의식이 있다고 해서 곧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 언어와 논리와 스타일을 얻어야 한다. 훈련되어야 한다. 언행이 일치해야 어색하지 않아서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

다들 역할게임에 빠져 있다. 의식이 낮은게 아니라 자기역할에 빠져서, 그 역할에 중독되어서, 늘 하던 익숙한 짓을 계속한다. 그들은 더 높은 관점을 탐내지 않는다. 그 관점을 소화할 능력도 없고.

누구든 나치장교가 되고 일본군이 되면 태연하게 학살을 저지른다. 의식이 없는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다. 의식은 리더에게 필요한데 자신은 리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철부지 어리광이다.

● 정신-선장(깨달음, 스타일)
● 의식-엔진(컨셉, 주제파악, 주도권 확보)
● 의지-방향타(가치판단, 짝짓기)
● 의사-스크류(구체적인 액션, 의도)
● 감정-물결(피드백)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행동을 할 때 위 다섯 단계를 1초만에 다 거친다. 찰나의 순간에 위 과정을 모두 밟아 진행한다. 그러므로 의식에 단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행동은 다르다.

이성친구를 사귈때는 감정부터 확인한다. 그 다음 의도를 드러낸다.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수작이 먹히면 가치판단을 한다. 하룻밤관계냐 배우자감이냐를 생각한다. 그 다음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막상 결혼을 한 다음에는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다섯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사랑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임자 만나면 첫눈에 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눈에 반해도 행동과 표현은 밑에서부터 단계를 밟아올라간다. 그리고 수준이 낮은 자들은 낮은 단계에 계속 머무른다.

그들은 청담동 거리를 헤매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차 한잔 어때요?” 하며 말을 건다. 깨달음은 처음부터 높은 단계로 바로 간다. 그러나 이 또한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 한정된다.

잘못 들이대다간 귀싸대기 맞는 수 있다. 통하는 사람끼리 만났다면 다르다. 그들은 첫 만남에서 완전히 통한다. 상대를 떠보며 단계를 밟아올라가는 일이 없다. 깨달음은 절차를 생략한다.

정리하면

● 구조론은 다섯 단계가 있다.
● 실행에 있어서는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까지 단번에 진행된다.
● 의식은 실행이므로 단계를 하나씩 밟아나가는 일이 없다.

● 인식과 사회적 행동에 있어서는 단계가 있다.
● 이는 부분을 볼 때의 현상이고 전체를 보면 역시 단계가 없다.
● 어떤 사람 갑과 을의 사회적 행동에는 단계가 있지만 인류로 보면 없다.

● 단계를 모르므로 단계가 필요하며 단계를 알면 단계가 필요없다.
● 사회적 소통은 언어, 개념, 논리, 포지션, 스타일의 필요로 단계가 있다.
● 깨달음은 그 단계를 초월하여 완전성으로 바로 간다.

귀족들의 모임에는 에티켓이니 매너니 해서 복잡한 규칙이 있다. 그러나 자기네들 끼리 모였을 때는 그 규칙을 싹 무시한다. 그러다가 외부인이 들어오면 갑자기 규칙을 들이댄다.

규칙이란 귀찮은 자들을 쫓아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흥부전에 놀부에게 쫓겨난 흥부가 ‘서울에 가서 살려니 경우를 몰라서 못살겠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런걸 말하는 거다.

경우란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자기들끼리는 규칙을 따지지 않다가 촌놈이 나타나면 갑자기 규칙을 들이댄다. 의식 차제는 단계가 없으나 사회적 소통에는 코드를 맞추어야 하므로 단계가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역시 단계가 없다. 소통이 실패하므로 단계가 있는 것이다. 단계가 있다는 말은 소통이 잘 안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소통이 잘 안되는 이유는 언어, 논리, 관습, 문화, 양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학과 스타일을 통해 번거러운 소통의 절차, 곧 언어와 논리와 개념의 학습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소통할 수 있다. 눈치로 그냥 통하게 하는 것이 스타일이고 스타일을 포착함이 깨달음이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7]젬마

2009.11.08 (01:35:32)

아 재미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로드샤인

2009.11.08 (23:46:27)

이런 글을 당대에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행복합니다.
구조론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학문이 차곡차곡 제자리를 찾아 의미를 발하는군요.
참으로 명쾌한 해석입니다. 

 

[레벨:1]퍼즐조각

2009.11.10 (08:33:30)

김동렬님/이명박이라는 사람도 어느 날 문득 깨달아서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걸 인정해야 하는거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11.10 (08:56:20)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안되더라는게 미학이지요.
영화나 소설에서는 잘 되는데 현실에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미학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거고 그 기준은 보통 15살 이전에 만들어지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지요.
물론 퍼즐조각님도 문득 로또가 맞고, 빌 게이츠의 숨겨진 상속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여러 조력자를 만난다면 졸지에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소설같은 설정이고
현실에서는 우리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개인이 문득 깨닫는 일은 잘 없고
시대가 그것을 요구해야 하고 사회가 그것을 유도해야 합니다.
이명박 같은 자도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사회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우리가 진정 꿈 꾸는 사회이지요.
한국인 모두가 제가 주장하는 미학을 배우면 이명박도 사람됩니다.
가능합니다. 
물론 이명박은 한국인 중에서 가장 나중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5]aprilsnow

2009.11.11 (21:39:04)

교육에 있어서 단계, 등급을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었다.
왜? 그것이 대중에게 먹힌다는 것을 아니까. 조금만 열의를 갖고 재주를 부려도 할 수 있으니까. 돈이 되니까
그렇지만 언제나 마음에서 부딪히게 되는 내 안의 거부감..벽들이 있었다....

빨리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센스있는 직원에게 맛난 당근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것도 유혹적이다.
그것에 대해 헛갈리기도 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
그 사람과 방향성이 같음을 확인하고 그의  인성에 대한 신뢰와 이심전심을 믿을 수 있지만 너무나 느리다는 것과
그런것들이 다르지만 일을 맡겼을 때 그의 센스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느리게 가더라도... 설령 못간다 할지라도...
결국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다시 묻게 되는.......

------------
이분법적인 사고와 예측속에서 수없이 스스로 자조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곳은 어디인가.....
둘이 아니다.
완전성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가? 
순진하게 모두를 다 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노릇.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같은 배를 탈 수 없을진대....
소통이란 무엇인가... 소통하지 못하는 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사는게 인생이라고.. 참아야한다고도 생각했었다.
더 넓혀지지 않는 내 마음을 자책하며
깔대기를 넓히는 것이 그냥 모두다 사랑하리 하면서 참아주는 것이었는가...... 아니다.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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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승하여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가...
거대한 벽. 슬프다.
---------------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며 땀흘려 만든 장소에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성과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심전심 소통되지 않는 재주와 기법은 아무 소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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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림을 잘그리는 테크닉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높은 세계에 대한 이끌림과 고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이해하는 척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면
너는 예술가가 아니다.

아이가 사랑스럽다고 하는 감정의 울림이 제자신의 인생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예술 교육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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