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담갔다가 꺼내기 -앞서 약간의 언급- 여러분은 지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과거의 지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현장의 지식입니다. 그 최초의 현장을 체험하고 증언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지식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식은 서구에서 수입되는 것도 아니고, 교과서에서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남의 책에서 인용하는 것도 아니고, 암기한 것을 리플레이 하여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선생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말할 때 그 학(學)은 타인 혹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제자들과 문답하는 과정에서 공자선생 자신의 배움이 함께 창조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머리속에서 바로바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동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것은 어제까지는 지구에 없던 지식이며 오늘 이 순간 이후로는 지구에 있는 지식이 됩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지식은 의심됩니다. 후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속임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다리 건너서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왜곡이 일어납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지식이 진짜입니다. 지식의 자궁에서 새 지식이 탄생한다는 자체가 참지식이라는 증거입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낳음이 있느냐 없느냐니까. 진짜 지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파생시킵니다. 지식이 새끼를 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끼를 치지 않는 고립된 깨달음은 가짜입니다. 대중의 마음과 널리 소통되지 못한 깨달음은 가짜입니다. 미학도 마찬가지. 새끼를 쳐야 미학입니다. 새끼를 치려면? 짝을 지어야 합니다. 코드가 맞아야 짝짓습니다. 표준을 정해야 코드맞출 수 있습니다. 요소들을 통일시키는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서말의 구슬을 꿰어내게 하는 그 한 줄이 있어야 합니다. 소실점-원근법의 발견이 근경과 중경, 원경을 한 줄에 꿰어냄으로써 르네상스를 낳았습니다. 르네상스가 산업화를 낳았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대중의 눈을 띄워준 것이 시작입니다. 대중이 눈을 떠야 합니다. 대중의 눈은 미켈란젤로와 세잔이 뜨게 했습니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뜨게 했습니다.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 그리고 스탕달이 뜨게 했습니다. 대중이 눈을 뜰때 위대한 문명의 도약은 일어납니다. ### 소실점-원근법의 발견의 의미는 ‘완전성에의 도달’ 가능성에 있다. 완전성이 모든 낳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성이란 작가가 작품을 끝내는 단계의 논리다. 왜 하필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가? 한국의 저렴한 소설가들은 편하게 주인공을 죽인다. 주인공이 죽었으니까 소설이 끝난다? 이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완전한 그림, 완전한 작품은 있을 수 없다는 좌절이 있다. 그 좌절을 극복하여 르네상스다. 어떤 화가도 완벽하게 자연을 복제해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그릴 것인가? 이발소 그림은 원경과 중경, 근경이 있다. 그 중간은 애매하게 처리한다. 안개 비슷한 효과 혹은 호수를 배치하는 수법이다. 동양화의 여백이나 산수화에서 물의 의미도 그렇다. 과거 일본그림도 그렇다. 예컨대 겐지이야기(源氏物語)의 삽화라면 실내의 장면과 실외의 풍경을 한폭에 같이 그려놓고 중간을 애매하게 지운다. 한국은? 점점 그림이 지도가 된다. 왜 한국은 산수화가 지도로 변하는가? 근경과 중경과 원경이 겹치는 부분의 처리가 곤란하기 때문에 모두 원경으로 잡고 삼천피트 공중에서 조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원근이 무시되므로 그리기가 쉽다. 곤란함을 피하고 그리기 쉽도록 그리므로 아웃이다. 보통은? 만화를 보면 온갖 기호들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사전 약속들이 있다. 화났다는 표시는 =3=3 이런 거다. 혹은 뭔가에 맞아서 머리가 빙빙 돌고 별이 반짝반짝 ☆☆ 등의 기호가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관습적인 기호로 처리하면 그림이 점점 텍스트가 된다. 그래서 아웃! 나뭇잎 숫자를 낱낱이 세어서 그릴 수 없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은 호랑이의 터럭을 낱낱이 세어서 그렸다. 역시 무리하다. 원근법이 구세주다. 작가와 피사체의 상대적인 관계 안에서 절대성이 유도된다. 그것이 주제다. 작품 안의 제 요소들을 하나의 관점, 하나의 시선, 하나의 눈높이로 묶어내는 것이다. 요소들을 한 줄에 꿰어내기다. 통짜 시선의 완성이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촉발시킨 조형적 관점이다. 그러나 답답함이 있다. 왜 단 하나의 기준에 묶여야 하는가? 묶여서 답답하다. 어쨌든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대단한 자유를 준다. 인간이 자연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선생님이 그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모두 선생님께 복종한다. 그 하나는 대단한 힘이 있다. 권위가 있다. 그러나 만약 제자가 어찌어찌해서 그 하나를 움켜쥐었다면? 스승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제맘대로 간다. 그곳에 자유가 있다. 무엇인가? 이상주의는 제왕에 의해 독점된다. 제왕은 이상주의를 궁성과 교회에 장식한다. 이상주의를 왕이 독점할 뿐 대중들에게 분양하지는 않는다. 왕이 멋진 궁궐을 짓고 웅장한 교회를 세우면 모두 감탄한다. 거기에 어떤 신묘한 진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안다. 왕은 진리를 장악한 것이다. 그 진리를 대중에게 공표하지는 않는다. 왕이 진리를 독점한다. 선생이 제자에게 결정적 기술을 가르쳐주는 순간 교실은 텅 빈다. 무협지 방식으로 말하면 선생이 가진 비급서를 제자가 넘겨받는 순간 선생은 죽는다. 무엇인가? 르네상스란? 소실점이란? 원근법이란? 이상주의를 대중에게 넘겨준 바와 같다. 스승이 제자에게, 왕이 백성에게 진리를 나눠줘 버린 것이다. 대중이 자유로워졌다. 왕은 망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전복이다. 새로운 지평의 열어젖힘이다. 바로 그것이 미켈란젤로가, 뉴튼이, 콜롬부스가, 세익스피어가, 르네상스형 천재들이 해낸 일이다. 콜롬부스 신대륙 진출의 의미는 누구나 신천지를 정복하고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야욕에 점화. 소실점을 뛰어넘는 생명성의 관점은 무엇인가? 최초 작가와 피사체 사이에서 성립한 시선의 일치가 더 많은 일치점들을 낳아낸다. 그림 안에 묘사된 인물과 제 3의 대상과의 시선의 일치로 증폭된다. 작가는 그림을 바라본다. 작가가 바라본 것을 독자도 바라본다. 김홍도의 선비와 꾀꼬리 그림을 이야기하자! 그림 속의 선비는 꾀꼬리를 바라본다. 그 선비와 꾀꼬리의 마주봄을 통하여 작가와 독자가 마주친다. 무엇인가? 그림 안에서는 선비와 꾀꼬리가 마주보지만 그림 밖에서는 그 그림을 통하여 작가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마주본다. 그것은 낳음이다. 하나의 마주봄이 무수한 마주봄으로 증폭된다. 그 마주봄들 사이에 또다른 소실점이 있다. 소실점 위의 소실점이다. 완전성이란 무엇인가? 도달해야 할 절대성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종결시키는 단계에서 성립하는 ‘완성도의 논리’는 무엇인가? 소실점은 작가와 피사체 사이의 연결선이다. 그 하나의 선이 그림 내부를 전일적으로 통일한다. 그 지점에서 1차적으로 완성도가 드러난다. 그림은 어디서 끝나는가? 화룡점정에서 끝난다. 용의 눈을 그려야 작품은 완결된다. 눈이 중요한가? 한국 소설식으로 주인공을 죽여야 하는가? 원근이 맞으면 완결된다. 왜인가? 하나의 일치가 또다른 일치를 낳아서 생명의 1사이클을 완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려지는 대상 내부의 질서 드러내기다. 원근만 맞으면 일단 스케치라도 완성이다. 대략 색칠만 해도 완성이다. 사인을 넣고 액자를 씌우고 표구를 마치면 더욱 완성이다. 진정한 완성은? 완성은 도처에 있다. 일정한 논리를 부여하고 그 논리를 충족시키면 완성이다. 음악이라면 화음을 맞추면 완성이다. 시인이라면 대구(對句)를 맞추면 완성이다. 수학이라면 미지수를 찾아 등호를 성립시키면 완성이다. 1+2=□은 미완성이다. 등호를 중심으로 좌변과 우변 사이에 대칭의 성립여부가 불투명하다. 미지수 3을 찾으면 대칭성립이다. 한 사람이 ‘산은 높다’고 운을 띄웠을 때 맞은편에서 ‘물은 깊다’고 댓구치면 완성이다. 쿵짝만 맞으면 완성이다. 무수한 완성들이 있다. 소실점은 그 무수한 완성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구도로 보면 좌우의 균형만 맞으면 완성이다. 명암으로 보면 밝기의 균형만 맞으면 완성이다. 색채만 조화되어도 완성이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따라붙으면 완성이다. 왜? 그곳에 낳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칭이 있는 곳에 하나의 낳음이 있다. 구조의 연쇄고리가 작동을 시작한다. 소실점 1은 그림 밖에서 그림 안으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며 그림 전체를 전일적으로 규정하는 근원의 대칭성이다. 소실점 2는 그림 안의 요소들 간의 관계다.소실점 3은 소실점 1과 소실점 2의 관계다. ● 소실점 1 - 그림 전체를 하나의 통짜 덩어리 시선으로 보게 하는 논리장치. 원근, 명암, 구도, 색채 등 기본적인 사항의 일치. 그림 안에서 원경과 근경, 인물과 배경의 불일치에 따른 어색함을 물타기 하는 매너리즘적인 관행적 속임수 수법을 배제하고 작품을 전일적으로 규정하는 논리의 제시.(쿠르베의 사실, 피카소의 입체, 세잔의 형태도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그 하나의 논리다.) ● 소실점 2 - 그림 안에 묘사된 제 요소들 간 상호관계의 일치.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명(明)은 오똑하고 암(暗)은 우묵하다. 꽃이 피면 나비는 온다. 소실점 1의 상부구조에 종속되며 여러 대상과 자유롭게 짝짓기하는 하부구조의 논리다.) ● 소실점 3 - 소실점 1과 소실점 2를 통일시키는 바깥에서의 에너지 유입 통로 개설.밖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여 품 담가주는 방법으로 소실점 1과 2를 통일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소실점 1과 2를 통일하는 논리를 전개하여 최종적으로 작가와 관객의 마음이 다이렉트로 연결되게 하는 즉 한 마디로 ‘그림에 꽂히게 하는’ 장치. 그것은 보통 굵은 선으로 나타난다. 무엇인가? 스타일이다. 절대성이다. 절대성은 대칭성에서 나온다. 원경은 작고 근경은 크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빛은 밝고 그늘은 어둡다. 산은 우뚝하고 골은 우묵하다. 음과 양, 강과 약, 고와 저, 강과 유, 주류와 비주류, 중앙과 지방, 서로 마주보고 대칭되는 이것이 모두 소실점이다. 모든 대칭이 소실점이다. 소실점만 소실점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소실점들이 있다. 모든 소실점들은 최초의 소실점 곧 작품을 매개로 한 작가와 관객 사이의 근원적인 대칭에서 유도되어 얻어진 것이다. 하나의 근원적인 대칭이 무수한 작은 대칭들을 낳는다. 큰 소실점이 작은 소실점을 낳는다. 그림 안에 계통을 성립시킨다. 대대손손 이어지는 것이 있다. 리니지가 있다. 낳음이 있다. 계통관계에서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남남관계로 전개하여 가는 중심이 있다. 센터가 있다. 자궁이 있다. 절대성의 발견이다. 모든 낳음의 어머니. 근원의 자궁. 그것을 발견했을 때 작품은 완성된다. 완결된다. 끝내는 단계의 논리가 제시된다. 최종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근거가 밝혀진다. 소설작품 안의 모든 단어와 문장과 표현들이 표준이 되는 하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가고 있다. 무엇인가? 이상주의라는 이름의 절대성이 나타나면 모두가 복종한다. 왕은 그 절대성을 숨겨놓고 혼자 킥킥댄다. 왕이 혼자 책력을 보고 일식을 알아맞히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대중들에게 왜 일식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엄숙한 표정으로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책력을 공개해버린다면? 왕이 신통력으로 일식을 맞춘게 아니라 책력보고 알았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해방이다. 자유가 그곳에 있다. 신대륙의 존재를 콜롬부스가 공개했다. 뉴튼이 법칙을 공표하여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겁대가리가 없어진 인간들이 천벌을 무서워하지 않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지리상의 발견이 얻어졌다. 남극도 가고 북극도 갔다. 그 모든 것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출발점이 르네상스인 거다. 문득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바다의 신이 노한 것이 아니라 실은 태풍 때문이며, 일기예보만 잘 들으면 된다고라고라? 자유다. 해방이다. 도전이다. 자신감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생명성의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그림 안의 제 요소들이 하나의 기준을 보고 줄선다. 그것은 전제군주의 독재와 같다. 우리가 얻어야 할 생명성의 소실점은 위대한 전복이다. 전제군주가 꼬불쳐놓은 책력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뉴튼이 역학법칙을 공개하고, 갈릴레이가 행성들의 질서를 공표하고, 콜롬부스가 신대륙의 존재를 알려준 바와 같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천하는 하나의 질서 안에 갇혀 신음하지 않고 만가지 질서로 번식했다. 질서가 질서를 낳았다. 질서가 새끼를 쳤다. 중산층이 집과 자가용을 소유하고 의기양양해 하듯이 모두들 자기 질서 하나씩 소유하게 되었다.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의 독립적인 질서를 획득했는가? 남이 세운 줄 뒤에 서지 않고? 작가 자신이 스스로 창안한 질서를 얻어야 현대성이다. 결정적 시선을 얻어야 한다. 이상주의에 도달할 때 자유주의로 전개한다. 그림 안의 제 요소들이 제각기 자유를 획득할 때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기세가 있다. 생명성이다. 소실점이란 인간의 눈으로 피사체를 때리는 것이다. 강하게 타격하는 것이다. 피사체는 원래 그냥 있는 건데 인간의 시선에 의해 줄세워진다. 높고 낮은, 멀고 가까운 서열이 매겨진다. 질서가 얻어진다. 생명성의 소실점이란 밖에서 에너지를 투입하여 무엇인가로 그림을 때리는 것이다. 고흐는 끈적끈적한 두터움으로 거칠게 때렸다. 마구 때렸다. 사정없이 난타하였다. 중섭은 그 특유의 앙증맞은 붓터치로 때렸다. 박수근은 안개효과로 때렸다. 아주 푹 담갔다가 꺼냈다.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는 도공처럼 작품을 자기 개성이라는 항아리 속에 통째로 한번 푹 담갔다가 꺼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 내부에 독립적인 자기 질서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통짜 덩어리 시선이다. 그 이전에 억압자였던 고객의 주문으로부터 작가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독립적인 질서가 없었을 때는 자본이 지배했다. 주문자가 원하는대로 화공은 그려바쳤다. 왕이 ‘이렇게 그려라’하고 지시하면 그렇게 그렸다. 밀레는 주문자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종을 너무 작게 그려서 애석하게도 만종의 그림값을 챙겨받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더라고. 그러나 그림 안에 자기 질서가 생겨버렸다. 귀족이 화가에게 화를 낸다. “왜 고객 주문대로 하지 않고 당신 맘대로 그렸소?” 화가가 비웃는다. 귀족은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간다. 작가가 고객보다 우위에 설때 진정한 해방이 있다. 전복이 있다. 자유가 있다. 예술성 탄생이다. 어떻게 작가가 우위에 설 수 있었지? 북종화는 고객이 우위에 선다. 남종화는 작가가 우위에 선다. 그림 안의 독립적인 자기 질서를 획득할 때 작가가 우위에 선다. 그렇다. 그 우월성을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이 생명성의 소실점이다. 작가의 관점이라는 첫번째 질서에서 파생되어 그림 내부에 자기 질서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림 전체를 마구 두들겨서 완전히 푹 담가서 비맞게 하는 것이다, 빛맞게 하는 것이다. 밀도맞게 하는 것이다. 푹 고아서, 푹 달여서, 바싹 졸여서, 푹 삭여서, 잘 다져서, 완전히 흐물흐물해지도록, 아주 농익도록 하는 것이다. 밖에서 모든 방법으로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위대한 탄생이 있다. 창조가 있다. 류와 흐름이 보인다. 탐구되지 않은 신천지가 드러난다. 우후죽순으로 아류가 나와서 크게 세력화 된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 조금 덜 그렸고, 조금 더 그려보태고 싶은 욕망이 느껴진다. 그게 낳음이다. 이상의 소설이 그러하다. 삼국지나 수호지를 읽으면 독자가 몇 페이지 뒤에 더 써주고 싶은 욕망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야기가 자꾸 길어져서 사족으로 후삼국지가 생겨나고 충의수호지가 생겨났다. 그렇게 흘러가는 방향성이 드러난다. 세잔이 실천해 보이고 고흐가 탐구한 그것 말이다. 스탕달 혼자서 외로울 때, 발자크가 유일하게 옹호하였고 뒤늦게 모든 사람들이 가세하였다. 울림과 떨림이 있었다. 거기서 흐름이 생겨나고, 기세가 생겨나서, 신문명의 지평이 열어젖혀진다. 그러나 이외수는 고립되어 있다. 그는 깨달음이라는 문학성의 본질로 쳐들어 갔으나 한국에는 아시다시피 평론가라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문열들이 설치는 암흑세상이다. 코엘료와 이외수 그리고 칼릴 지브란은 본래 같은 계열이다. 이들은 모두 아웃사이더다. 그들이 진정한 21세기 신문명의 주류라는 사실을 아직 이 문명의 참가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잠들어 있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해야 한다.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글을 썼지만 세익스피어 이전에는 그 글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라도 문학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미학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 나타나고 붐업이 일어난다. 가세하는 자가 있고 새 지평이 열려야 한다. 역사의 방향성을 드러내기에 이외수는 아직 역부족이다. 후속타는 불발하고 있다. 김기덕의 포지션도 어색하다. 깨달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못한 이외수 자신의 한계도 있다. 김기덕은 정면으로 쳐들어갔지만 미학적으로 세련되게 디자인하지 못했다. 바스키아가 앤디 워홀을 만나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간 격이다. 서구기준으로 생각하고 한국기준을 찾아내지 못하는 살롱문단의 한계다. 지식이 교과서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등신들의 한계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목을 얻어야 한다. 알아볼 것을 알아보기다. ### 소실점이론의 등장은 평면적인 그림에서 입체적인 그림으로의 비약을 의미한다. 생명성의 관점은 거기서 다시 한 차례 도약을 의미한다. 입체적인 그림은 내부에 다양한 대칭성이 존재한다. 평면적인 그림은 그 대칭성이 없다. 그러므로 사건이 선형으로 나열된다. 아라비안 나이트나 수호지나 한국의 군담소설은 모두 백가지 사건의 나열식 전개다. 사건들의 무질서한 집합이다. 작품을 전일적으로 규정하는 통짜 덩어리 시선으로서의 논리장치가 없다. 푹 담갔다가 꺼내는 그런게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 나오는 사건을 다른 소설에 꿔주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실제로 사건을 서로 꿔주어서 수호지에 나오는 무송과 무대 형제가 금병매에도 같은 캐릭터 그대로 나온다. 단편적인 사건들의 집합을 두고 선형적인 연결로 가면 입체적인 구성이 안되므로 긴장감이 상실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니 계속 새 인물 캐릭터를 투입하는 것과 같다. 수호지나 손오공이나 계속 새로운 괴물, 새로운 도적이 얄궂은 캐릭터로 무장하고 등장하며 극적 긴장을 이어간다. 그 경우 전체적인 통일성보다 특별히 조명되는 부분이 강조된다. 부분이 강조되면 점점 무협지로 변한다. 희곡이 칼싸움만 남게 된다. 그래서 세익스피어 이전의 연극은 거의 칼싸움으로 시작하고 끝났다. 극적 긴장감이 유지하려면 세익스피어 방식의 입체적인 구성이 필요하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에서 보여주었듯이 한 인물이 둘 이상의 성격을 가지는 복합적인 캐릭터의 제시가 필요하다. 한 인물이 여러 성격을 가지면 그게 사이코다. 사이코가 아닌데도 여러 성격을 가지고 고민하게 하려면 심리의 소실점이 필요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햄릿의 고민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일본 가면극 노(能)의 검은옷 입은 사람은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라는 약속이 있다. 약속의 종류가 점점 늘어나면 긴장감이 해체된다. 중국의 경극은 분장형태에 따라 기본적인 패턴이 정해져 있다. 점점 텍스트화 되어서 결국 점점 칼싸움으로 갈 수 밖에 없다. 항상 나오는 유형이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각각의 이름이 붙어있다. 항우같은 무서운 분장을 한 남자가 등장하는가 하면 멍청한 코미디언 관료도 있다. 멍청이 관료를 혼내주는 지혜로운 아가씨도 항상 있다. 이렇듯 역할이 나누어지면 나열식 구성이 되어서 극적 긴장감의 유지가 실패로 되니 결국 경극은 무대에서 칼싸움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연극이 처음에는 연극이었는데 나중에는 서커스가 된다. 한국의 만화방에서 80년대 전성기를 이루었던 무협지가 90년대에 갑자기 증발한 사건도 이와 같다. 긴장감 유지 실패는 작가소외를 발생시킨다. 입체적 구성을 하지 않으면 대칭요소가 사라져서 극적 긴장감 유지의 실패로 관객들이 ‘야 재미없다. 칼싸움이나 해봐라’하고 요구하게 된다. 서커스로 변질되고 또 버라이어티 쇼로 변질된다. 패턴이 정해져 있어서 관객이 내용을 다 짐작하기 때문이다. 문학성이 소멸하는 지점이다. 무협지는 본래의 무협패턴을 독자들이 다 알아버려서 ‘야한 장면이나 묘사해 봐’ 하고 관객이 요구하게 되었다. 무협지는 점점 야설로 변해갔다. 결국 멸종하고 말았다. 문학성이 떨어지는 모든 드라마, 영화, 연극들은 반드시 이러한 몰락의 코스를 예약하고 있다. 부단한 자기혁신에 의해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짜 덩어리 시선을 얻었을 때, 푹 담갔다가 꺼낼 수 있게 될때, 그 담그는 정도를 작가 자신이 결정할 때, 문학성은 살아난다. 예술성은 살아난다. 다음 라운드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에서 자유주의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한국 TV에서 시청자의 힘이 점점 커지는 현상이 곧 문학성이 망하는 현상이다. 이미 시청자가 관습적인 패턴을 읽어버린 것이다. ‘더 막장으로 가봐’ 하고 요구한다. 문학성은 여러 입체적인 대칭구조의 집약으로 무수한 가능성을 숨긴 통짜 덩어리 캐릭터를 유지함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 입체로의 도약이 소실점이론, 명암이론, 색채와 구도에 관한 이론이 된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서 꾀꼬리 우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사월의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져야 한다. 봄꾀꼬리 유혹에 이성과 살을 맞댄 연인들처럼 완전히 긴장이 풀려야 한다. 얼떨떨해져야 한다. 하나의 단서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파생되어 나와야 한다. 증폭과 공명과 소통이 그곳에 있다. 이외수가 나무를 그리면 뒤에 온 사람이 그 나무에 핀 꽃을 그린다. 더 뒤에 온 사람이 그 꽃이 결실한 열매를 그린다. 그 뒤에 온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 까치를 그린다. 더 뒤에 온 사람이 그 까치가 물고 가서 퍼뜨린 씨앗에서 나온 새로운 싹을 그린다. 그 나무가 자라서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1 사이클이 완결된다. 그 방법으로 완결성을 드러낸다. 완성도가 드러난다. 작은 씨앗이 그 1 사이클 전개의 모든 이야기를 자기 내부에 감추듯이 입체를 넘어 밀도로 담가서 통짜 덩어리 시선을 얻어야 진정한 자기 것이 된다. 그러지 못하고 텍스트 형태라면, 선형구조라면, 온갖 사전 약속과 기호로 가면, 전문 장인집단이 장악하는 매너리즘 현상이 나타난다. 매너리즘의 ‘매너’는 ‘법식’을 의미한다. 곧 기법이 된다. 그 기법의 집합체가 만화다. 백설공주식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톰과 제리라면 동작 하나하나에 약속이 숨어 있다. 소설에도 기법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이문열이 그러하다. 일본의 노(能)에서 볼 수 있는, 중국의 경극에서 볼 수 있는, 무협지의 뻔한, 한국 막장드라마의 뻔한, 산수화가 괜히 물을 그리는 그 사전약속들을 다 깨부셔버려야 통짜 덩어리 시선이 드러난다. 만화의 온갖 기호를 배우려면 문하생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예술가에서 장인으로 격이 한 단계 떨어진다. 고가구를 만드는 장인이라면 법식을 지켜야 한다. 예술은 그 관습을 깨뜨리는 것이다. 통짜 덩어리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거기서 하나를 제거할 때 마다 새로운 창조의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 5 단계는 한 단계를 진행할 때 마다 하나가 빠져나간다. 질에서 입체로 가면 무게를 잃는다. 입체에서 힘으로 가면 부피를 잃는다. 힘에서 운동으로 가면 너비를 잃는다. 운동에서 양으로 가면 길이를 잃는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덩어리는 씨앗이다. 그 씨앗이 껍질을 잃을 때 싹은 자라난다. 그 싹이 대지를 잃고 흙에서 멀어질 때 꽃은 피어난다. 그 꽃이 동정을 잃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그 나무를 완전히 잃고 홀로 떠나가서 새로운 싹을 틔운다. 하나를 잃을 때 마다 새로운 하나의 짝을 만나 그 빠져나간 빈 자리를 채운다.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만나서 새로운 창조가 얻어진다. 그것이 위대한 창조의 법칙이다. 나무는 물주기를 멈추면 꽃을 피우고, 햇볕주기 멈추면 단풍들고 열매 맺는다. 죽어서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다람쥐가 달려온다. 하나가 제거될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무한한 가능성의 꿈많은 아기가 하나씩 꿈을 버릴 때 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과 같다. ** 유튜브 동영상 주소 ** 소실점의 소실점2 : http://www.youtube.com/watch?v=abCc1_BKzqA 완전성이 목적이다2 : http://www.youtube.com/watch?v=Db3jD5Tl2fo 완전성이 목적이다3 : http://www.youtube.com/watch?v=mZmTOt-NtPo ∑ |
제자신에 대한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었던가 봅니다.
이즈음 계속 르네상스 주변에서 생각이 머물고 있는것을 보면.......
세상을 보는 안목을 얻고싶다. 그리하여 재탄생하고싶다라는...... 그런 갈망같은게 생기더군요.
그간 마음을 비웁네 하는 어줍잖은 명상과 현실도피로 조로하고 있지 않았나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동렬님과 만나지는 않더라도 동렬님의 생각의 흐름 근처에서 항상 얼쩡거리게 되는걸 보니.....분명 통하는게 있다 싶어서 혼자서 미소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