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적 인간 신은 원자를 모아 우주를 만들었다고. 그런데 그 원자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지? 구조론이 답이다. 인간은 너와 나 작은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거대한 학문의 체계를 만들어간다. 만인의 생각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지? 미학이 답이다. 생각을 모으려면 표준이 있어야 한다. 표준의 첫 단추가 꿰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그 표준은 ‘하나’여야 한다. 만유를 한 줄에 꿰어내는 하나의 미학적 표준은 1인의 ‘르네상스적 인간’에 의해 창안된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통짜 덩어리’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네이처’ 지는 미켈란젤로, 다빈치, 세익스피어, 괴테, 제퍼슨, 알렉산더, 아인슈타인 등을 르네상스형 천재로 꼽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재주꾼이 아니다.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 사람들이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회화와 조각, 건축들이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인 사고의 혁신이 있다. 그것은 ‘조형적 관점’의 도입이다. 관측자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실점’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의 이상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근원의 맞섬이라 하겠다. 작가의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근본적인 입장의 설정이다. 거기서 작가의 개성, 곧 캐릭터가 나와준다. 소실점의 발견 이전에는 그저 피사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존재와 능동적 역할은 알아채지 못한다. 관측자와 피사체가 하나의 축에 꿰어져 서로 연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작가 자신이 관계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은 못한다. 소실점은 작가와 피사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관계’다. ‘관계의 존재’를 포착하고 보면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와 인간의 관계’로 인식의 지평이 넓혀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바뀐다. 비로소 ‘작가의 눈’을 뜬다. 그 정점에 이상주의가 있다. 그 연장선 상에 자유정신이 있다. 르네상스로 되살아난 그리스 정신이다. 소실점은 작가와 피사체 사이의 조형적 관계를 규정한다.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는 세계와 인간 사이의 전일적 관계를 규정한다. 그렇다. 세상 모두 한 점에 연동되어 있다. 깨달을 일이다. ● 소실점이론 - 작가와 피사체는 하나의 조형적 질서로 통일된다. ● 이상주의 - 인간과 세계는 하나의 근원적 질서로 통일된다. 그 이전에는 보여지는 세계를 모방하기 급급했다. 소실점은 보여지는 대상이 수레바퀴의 바퀴살처럼 하나의 축에 꿰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 축을 장악함에 따라 작가가 우위에 선다. 그것이 조형적 인식이다. 마찬가지다. 이상주의는 우주가 하나의 축에 꿰어져 있음을 포착함이다. 그 축을 장악하면? 무한의 자유가 있다. 이상주의를 얻었을 때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 인간이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이다. [배경의 소실점은 예수와 제자의 소승적인 관계에서 인간과 세계의 대승적인 관계로 그 지평이 확장됨을 알게 한다.] [아담과 하느님의 관계가 인간과 우주의 근원적 관계로 확장된다. 아담과 하느님은 절대적 지배종속관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상대적인 포지션 관계다]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천지창조’와 다빈치 ‘최후의 만찬’이 특히 르네상스인의 통짜 덩어리 시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와 제자의 관계를 그렸지만, 배후의 소실점은 이를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로 확대시킨다. 천지창조는 우주가 통째로 하나의 관계틀 안에 통일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운동장에 흩어진 50명을 통제하려면 한 명을 지목하여 오른팔 들고 ‘기준’을 외치게 해야 한다. 기준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인간은 굉장한 자신감을 얻게 된다.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그 기준의 발견이 이상주의다. 이는 필연 자유정신으로 전개된다. 십자군전쟁 이후 아랍의 도서관에서 신지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스의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도 함께 묻어왔다. 이를 조형적으로 구체화 한 것이 소실점이다. 작가는 흙을 주무르고 돌을 다듬으며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한다. 머리속에 이상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기본컨셉이 세팅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상주의와 자유주의, 그 마음 속에 품은 우주의 질서를 화가는 캔버스 안에서, 조각가는 조각작품 안에서, 건축가는 건축물 안에서의 조형적 질서로 이식하여 낸다. 창작이란 작가 자신이 창안한 조형적 질서를 사회를 향해 발표하는 것이며 이는 근원의 우주질서를 포착했을 때 가능하다. 본래 자연은 인간의 모방대상이지만 완전한 모방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그려놓고 붓을 놓아야 할까? 나무를 그린다면 나뭇잎 숫자까지 낱낱이 세어야 할까? 아니면 대충 색으로 칠하고 말까? 완벽한 자연의 복제는 불가능하다. 작가는 좌절하고 만다. 작가의 전략은 관습으로의 도피다. 만화라면 명량만화냐 순정만화냐 무협만화냐에 따라 그림체가 정해져 있다. 정해진 그림체 안으로 도피하면 된다. 디즈니 만화영화 같은 상투적인 그림체 있다. 슬램덩크의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각별하다. 쓸데없이 땀방울을 일일이 그렸다. 그렇게 정밀하게 가자면 한이 없다. 문제는 완전성이다. 인간의 모방은 한계가 있으며 절대적 완전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이 있다. 소실점의 발견은 작가와 피사체의 관계포착이며 이는 절대성의 논리에서 상대성의 논리로 변경됨을 의미한다. 상대성의 논리라면 얼마든지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 완전한 그림, 완전한 조각, 완전한 건축은 있다. 소실점은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화가가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으로 백퍼센트 완벽하게 자연을 복제하기는 결단코 불능이지만 그 논리의 충족은 충분히 가능하다. 완전할 수 있다. 자신감의 획득이다. 완전성의 정복이 이상주의다. 그 정점의 도달에 의한 자신감의 획득이 자유주의다. 한강의 모래알이 몇 개인지 절대숫자는 알 수 없다. 한강이 넓은지 금강이 넓은지 상대적인 관계는 알 수 있다. 그것이 만유의 척도가 된다. 기준이 된다. 표준의 성립이다.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소실점은 무질서한 평면적 마인드를 질서있는 입체적 마인드로 끌어올린다. http://www로 시작되는 웹주소 체계가 만들어진 셈이다. ‘따따따’라는 이상주의를 거치기만 하면 어느 웹사이트라도 찾아갈 수 있음이 자유주의다. 자신감 획득이다. 이상주의 완성이 자유주의를 낳는다. 인터넷 상의 모든 웹사이트가 ‘따따따’로 모이듯이, 소실점으로 하여 ‘만유가 한 점에 모여야 한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 점을 찾았다면 첫 단추가 꿰어졌다. 이후 근대과학의 등장, 계몽주의 사조, 산업화는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그리고 인류는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이제 새로운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소실점 위의 또다른 소실점이 필요하다. 미학이 그 답이다. 만유를 한 줄에 꿰어낸다는 것, 그것이 보편성이다. 그러나 고작 평면에서 입체로 도약했을 뿐이다. 단지 자신감을 얻었을 뿐이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가능성을 얻었을 뿐이다. 이후 전개된 르네상스, 뉴튼역학, 합리주의, 산업화가 그 눈높이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다. 그리고 이제 더 높은 시선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더 큰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평면에서 입체로 옮겨왔다. 입체 위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근원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입체는 합치거나 쪼갠다. 그러나 자연은 공명한다. 생명은 증폭한다. 감응한다.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나 수호지는 여러 에피소드를 선 위에 나열한다. 단선적인 마인드가 아랍문명, 중국문명의 한계다. 세르반테스 이후 세익스피어 등은 입체적인 마인드를 보여주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시도하고 세익스피어가 완성했으며 스탕달이 심화한 인물의 캐릭터야말로 인간 마음의 소실점이다. 악인이나 선인 혹은 우스꽝스러운이, 허풍선이, 겁쟁이, 배신자 등으로 나누어져 정형화된 평면적 인간형이 아니라 복합적(세르반테스), 입체적(세익스피어) 인간형의 등장이다. 더 나아가 진화하는 인간형(스탕달)의 등장이다. 여러 사건의 조각들을 길게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건의 여러 측면을 다각도로,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마음의 소실점 있고 문학의 소실점 있다. 복합적, 입체적, 심층적 모형인 사건의 여러 측면이 전부 하나의 주제로 모이는 데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떠오른다. 그리고 20세기다. 인상주의 이후 회화나 문학은 또다른 길을 간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있게 그 중핵을 지적하지 못한다. 세상은 복잡해졌고 입체적 마인드의 소실점 기준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없게 되었다. 소실점은 움직이지 않는 고착된 물체의 중심이다. 움직이는 물체에서 운동의 중심, 성장하는 생명체에서 기운의 중심, 소통하는 너와 나에서 인격의 중심, 진보하는 집단지성의 중심을 포착해야 한다. 체육선생님은 한 명의 학생을 기준세워 운동장에 흩어진 50명 학생을 통제할 수 있으나 다만 50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들 50명 개개인의 내적인 가능성을 온전히 끌어내지는 못한다. 천만 네티즌을 통제하려면 자신의 의지대로 줄세우는 방법으로는 실패다. 조형적 마인드를 뛰어넘는 생명성의 마인드를 얻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일만마리 양떼를 통제하는 기술이다. 소실점은 평면 위에 입체를 구축한다. 입체는 가로*세로*높이의 세 변수를 장악함으로써 통제가능하다. 달리는 자전거의 속도증가에 연동되는 공기저항의 크기를 측정하려면 더 높은 관점이 필요하다. 입체 위에 밀도의 세계가 있다. 생물의 성장리듬이나 자본주의 시장질서에서 경기변동의 흐름은 더 복잡한 프랙탈적 동심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의 소실점은 태풍의 눈과 같은 움직이는 파동의 중심 형태로 되어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정교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지시나 요구가 아닌 쌍방향적 조율이 필요하다. 오서코치가 김연아선수를 훈련시킴은 일방적인 주입이나 강요가 아니다. 네 안에 감추어진 능력을 끌어내기다. 21세기 인류의 진로는 더 높은 시선의 발견여부에 달렸다. 소실점은 전부 한 축에 꿰어진 디지털 구조다. 새로운 중심은 축이 감추어지고 각자 독립된 채 연동되는 아날로그 구조를 가진다. 두 씨름선수가 어깨를 맞대고 한꺼번에 용을 쓴다면 그 힘의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산은 물을 감싸안고 물은 산을 휘감아 돈다. 둘이 대결하는 힘의 접점에 가장 높은 절벽과 가장 깊은 소가 생겨난다. 소실점은 활의 과녁과 같다. 화살은 움직이고 과녁은 움직이지 않는다. 제왕처럼 제자리에 도사리고 앉아서 천하를 지배한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 공격수와 수비수가 충돌하는 접점은 축구공처럼 움직인다. 자본주의 시장질서처럼 움직인다. 점원과 고객의 흥정처럼 유동적이다. ∑ |
=> 발견이 되었네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