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명령이다. 하나가 되었다면 구태여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나,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알려야 한다. 명상을 하는 목적은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하나가 됨으로써 구태여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마음의 답은 바깥에 있다. 눈 감고 앉아있는건 바보 짓이다. 사유의 절대량은 많아야 하지만 그것을 격발하는 방아쇠는 바깥에 있다. 책을 읽든, 여행을 하든, 농사를 짓든, 영화를 보든 수백가지 에피소드가 뇌에 주입되어야, 비로소 머리 속이 와글거리면서 명상을 해도 시스템이 작동한다.
제대로 생각이 되어준다. 세상과 강력하게 연동되어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다섯시간을 흥분된 상태로 있게 된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깝게 되고,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깝게 된다. 세상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동되어 반응한다면 말이다. 좋은 음악을 듣다가 중간에 자를 수 없는 이치다.
중간에 자를 수 없는 방송 생각의 정석 67회 시작합니다
1. 민주당이 집권해야 경제가 산다
"그레그 발리에르 포토맥리서치그룹 수석 정치전략가는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며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덕을 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임기기간 동안 S&P500지수는 210% 올랐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에서 주가가 더 가파른 오름세를 보인 건 단순히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다. 정부와 의회 주도권을 각각 다른 정당이 차지하는 ‘그리드락’ 구도가 주가를 끌어올렸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부와 의회 간 교착상태 때문에 월가에 대한 제재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해서 월가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공화당의 반대에 번번이 막혔다."
단순한 겁니다.
재벌끼리 서로 죽이면 누가 손해죠?
교실만 해도 덩치 큰 애들끼리 쌈질하면 누가 손해죠?
쌈 말리는 교사가 있어야 학생들이 이익입니다.
재벌들간의 쌈 말리는 정부가 있어야 경제가 이익이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쉽게 돈 버는 방법은 남의 것을 뺏는 거.
보수정당 집권은 '남의 것을 뺏어라'는 거고 그 경우 경제는 당연히 파멸.
극한의 법칙으로 말하면 시장경쟁의 극단적 형태는 전쟁.
보수의 집권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전쟁의 결과는? 파멸.
전쟁이 아니라 시장 내에서의 경쟁이라도 약육강식이 되면 당연히 파멸.
생태계 전체로 보면 약육강식은 자기 자신의 팔다리를 잘라먹는 꼴입니다.
자연에서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최종 승자는 자손을 많이 퍼뜨리지 않습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자손을 대거 퍼뜨리면 당연히 생태계 파멸.
사바나에서 사자는 늙거나 병든 동물, 과잉번식된 새끼 위주로 제거합니다.
특히 일베충을 중점적으로 제거하죠.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경제의 팔다리를 잘라먹으면 당연히 결과는 파멸.
그렇다면 정답은? 농부의 방법.
유능한 농부는 경쟁력 없는 썩은 가지를 잘라내지만 무리한 경쟁도 시키지 않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선제대응에 의한 감독, 유도, 균형이 필요한 거죠.
민주당 정부는 시장을 감시하고 공화당 정부는 시장을 방치합니다.
시장은 방치하면 파멸하고 감독해야 살아납니다.
시장에서 반칙 저지르는 자는 적극 제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재벌기업 중에 시장경쟁으로 큰 기업 하나도 없습니다.
현기차를 일본기업과 경쟁시켰다면 과연 살아남았을까요?
현기차는 30년 전에 이미 멸망.
재벌은 특혜와 반칙과 유착과 비리로 큰 것입니다.
온갖 특혜로 무리하게 외형을 키운 다음에는 공정하게 시장경쟁하자고 말하지요.
근데 그 공정이라는 말은 정경유착 무한허용을 전제로 한 시장에서만의 공정입니다.
정경유착으로 은행돈 빼돌려서 잽싸게 자기 덩치만 키운 다음
큰 덩치로 밀어붙이면서 이제부터 공정하게 덩치로 경쟁하자?
재벌이 은행까지 장악하면 국가는 이미 인질로 잡힌 신세입니다.
재벌이 국가를 인질로 잡아놓고 공정하게 경쟁하자?
지금 한국 정부는 재벌의 인질신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개념탑재
-연애의 구조
3. 제국의 위안부,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을 두고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군인과 동지적 관계”,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등으로 표현해 논란을 빚어온 박유하(58) 세종대 교수(일문학)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법원이 문제적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판매·배포를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21부(재판장 고충정)는 ‘박 교수의 책이 사실관계를 왜곡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 교수와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낸 도서출판 등 금지 가처분 신청 사건과 관련해, 17일 “책 내용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광고 등을 할 수 없다”며 일부 인용 결정했다.재판부는 유엔인권이사회 권고와 한국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관련 결정을 언급한 뒤 “위안부 강제동원 및 위안소 운영 등에 일본이 광범위하게 관여한 점, 성노예이자 피해자로서의 일본군 위안부의 지위 등에 비춰볼 때 책의 일부 내용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격권·명예권을 중대하게 침해한다”며 이렇게 결정했다.재판부는 ‘학문의 자유’이자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박 교수 쪽 주장에 대해 “표현의 자유 및 학문의 자유와 비교해도 책 내용 일부를 삭제하지 않으면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나 인격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책의 나머지 내용에 대해서는 “헌법상 보장되는 학문의 자유 내에 있다고 보인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등을 통해 시민사회가 스스로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013년 8월 <제국의 위안부>가 출간되자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난해 6월 법원에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는 한편, 박 교수와 출판사 대표 정아무개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페북 옹호자1. 박유하 교수 출판긍지가처분에 분노한다고 해서 내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거나 정대협 할머니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내 담벼락에 박유하 교수를 욕하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관점의 차이는 있어도 범죄시할만 것은 아니었다.
구조적 관점에서 위안부 전반을 분석한 것일뿐이다. 사례로 든 것은 정대협 할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일본인 위안부도 성노예로 살았고 오키나와 홋가이도 출신은 조선인 이하로 취급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의 착취가 제국주의의 단계에서 가부장적 파시즘과 결합하여 일본여성 식민지여성을 남성들의 성노리개로 만든 구조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배계급을 위한 애국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전쟁을 강화하고 여성들이 희생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과학적 접근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맥락을 모르면서 민족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문제이다.
페북 옹호자2. 제국의 위안부>의 가장 훌륭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책을 읽는 관점에 따라 독자를 가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제 강점시기를 '일본에 의해 수탈을 당한 조선'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읽을 수 없다. 오직 근대적 국가 경계를 떠나서 사유하는 사람만이 그 책을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 책은 민족주의 담론이 횡행하는 한국에서 그 담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분리해낸다. 이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좌파의 역사관으로 읽으면 아무 문제 없이 깔끔하게 읽힌다. 한일문제를 풀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 내용에 거슬릴 것은 하나도 없다. 좌파의 역사관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제국주의 국가의 범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며, 갈등으로 얼룩진 한일관계도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책인 것이다. 그 책의 주장은 한일의 우호와 평화를 위해 전쟁범죄의 당사자(대놓고 천황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서라는 것이다. 좌파의 역사관이란 일본인=가해자, 조선인=피해자라는 구도 대신 국가권력 대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을 뜻한다.
하지만 민족주의 역사관으로 읽으면 전혀 다르다.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제국의 국민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장에 뒷목 잡고 쓰러질 얘기인 것이다. 그것을 지탱하는 역사적 자료가 탄탄하면 탄탄할 수록 이들의 반발은 더욱 커진다. 왜냐면 조선인을 순수하고 무고한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역사관은 단지 다수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한국인이 공유하는 사회통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통념을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곧, <제국의 위안부>가 가진 관점은 다수의 한국인에게 있어서 국가 또는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불순한 관점이 되는 것이다.
"위안부 소녀상"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곧 애국이며,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표식이기도 하다. 몹시 도착적이지만, 르낭이 유대주의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이, '피해의식으로 뭉친 공동체가 더 강하게 결합한다'. 이런 사람들에겐 역사적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소한 미시사는 중심서사를 위해 생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인즉 민족 관념 자체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해 유지되며,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강하다. 감정으로 똘똘 뭉친 군중에게는 하나님도 거스를 수 없다. 군중심리에 휩싸인 비난자들을 향하여 일본인들도 똑같이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 그것이 진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즉 진짜로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상상을 위협하기 때문에 더 큰 분노를 산다.
문제는 <제국의 위안부>가 그런 민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관점에서 읽어달라, 하는 가이드라인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주류에 속하는 관점의 책을, 그런 관점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에게 내민 것이다. 이것이 <제국의 위안부>가 가진 커다란 약점이다. 게다가 저자는 지난 반 년 동안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한 보완 작업을 사실상 하지 않았다. 아마도 재판 송사에 휘말려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누구라도 책을 읽으면 자신의 뜻을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이지만 독자 대중의 수준은 생각보다 훨씬 낮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독하는 사람에게 "책을 직접 읽어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리 좋은 대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진화론자에게 "성경을 읽어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말하는 종교인처럼 스스로 욕을 버는 일이다. 어차피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읽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친일파 매국노를 봤나! 이것도 학자라고...", 그리고 대중적 층위에서는 이런 사람이 압도적 다수다. 그들에게 대응하려거든,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 위한 명료하고 단순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관점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씩 수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물론 대중적 차원의 대응을 얘기하는 거고 그 책이 법적 재판에 넘겨진 것과는 별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통의 민족주의적 한국인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인한 공격성과 대화 중단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가 분리해낸 새로운 독자들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자주 본다. 멀쩡한 책이 하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다 보니, 자신을 그 책이나 그 책의 저자와 함께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모양이다. 그래서 곱지 않은 말을 주고 받으며 비난자들과 싸운다. 그 책은 한일 간의 화해를 말하지만, 한국인끼리도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분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동류(同類)가 되고 싶지가 않다.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받는게 달갑지는 않은 일이겠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며, 똑같이 전쟁범죄와 국가폭력에 반대한다. 그들에게 굳이 맞서서 이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애국으로 포장되는 집단주의 자체가 문제이고, 그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한일 간의 갈등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하겠지만, 전쟁범죄에 강제로 동원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병사를 이해하는 것의 반 만큼만이라도 저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을 이해할 수는 없는 걸까.
장정일 : 저는『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리뷰를 쓴 바 있습니다. 발제문을 쓰기 위해 그 리뷰를 다시 보니, 지면의 제약과 계몽적인 절차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장 뜨거운 쟁점(문제)을 지은이만큼 날카롭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발견한, 아니, 저보다 먼저 그 뜨거운 쟁점을 발견해서 그것을 법정으로 가져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책의 두 가지 문제(쟁점)가 있다고 합니다. ①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당하지 않았다(이런 주장은 27, 33쪽부터 나오다가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38쪽에서 명백해 진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쪽에서도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라고 썼듯이 ‘강제성이 없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항상, ‘경찰이나 군인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이라는 유보 단서를 달고 있다. 42, 50, 51, 110, 111, 152, 291~292쪽이 대표적이다). ②위안부는 일본군과 동지적 의식을 나누었다(67쪽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고 처음 나오며, 75, 162쪽 등에서 볼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대목은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군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일본의 극우의 주장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의 증언을 부인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반박한 경우가 없습니다. 지은이는 그것이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51쪽)라고 말할 뿐입니다.
일본 극우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하므로 군위안부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지은이는 이 책의 서두 여러 곳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군위안부라는]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5~26쪽),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잇는 것은 분명하다.”(49~50쪽),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91쪽) 식민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일본 우익이 이런 주장을 하겠습니까? 극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은 식민지 조선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原點)’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제는 전쟁 말기에 초등학교 선생이 군도를 차고 수업을 할 정도로 엄한 통치를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치안․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군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습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입니다. 이런 조직을 유지하고, 그들을 하수인으로 부리지 않을 바에는 뭐하러 조선총독부를 세웠겠습니까? 일본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한 명의 군인도 아까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군인을 보내서 마치 ‘보쌈’하듯이 강제연행해본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가끔씩 한국 신문을 보면, 한국의 연구자나 외국의 연구자에 의해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라면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발굴된 자료가 대서특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158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을 더 잘 뒷받침해 줄 뿐, 조선의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조선은 무법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데다가, 일본 내지는 물론 일본군을 위한 자원과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병참입니다. 형식적으로 마나 내선일체를 흉내 내어야 할 일본이 군경을 동원하여(물론 그들만의 법이겠지요), 강제연행을 저지른다면 조선인의 대대적인 저항을 사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시대에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일선동조론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자고 그들이 저런 만행을 눈뜨고 보면서도 일선동조를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은이가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일본 군경에 의한 강제연행보다 “마을 내부 사람”(39쪽), “동네 사람”(41쪽), “우리들 자신”(52)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근거에서입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이 식민지 조선의 성격 혹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전략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면, ②는 우리를 일본군 위안부의 ‘복잡성’과 대면하게 합니다. ②의 주장은 이 책의 제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책 제목에 나오는 ‘제국의 위안부’는 누구를 주체로 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제목은 자칫 위안부를 주체로 ‘위안부들 스스로가 자신을 제국의 위안부로 생각했다’로 해석되기 쉽지만(그렇게 해석되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는 일제가 주체입니다. (방점 필자)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 -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61쪽),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정신적․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65쪽) 요즘 말로 하자면, 일본군은 군위안부에게 육체적 봉사에 그치지 않고, ‘감정노동(착취)’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야말로 군은 물론 남성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지금껏 원해 왔던 게 아니었는지요? 그 결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바, 그것은 일본군과 남성 일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감정 노동의 압박을 도외시하고는 옳게 납득될 수 없으며, 그 처지에 놓인 군위안부 여성의 절박한 생존법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체는 절대 위안부(여성)로 오독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군위안부들의 (윤색되지 않은)초기 증언, 즉 일본군 군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센다 가코의『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1973), 한국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한울,1993~1999), 미국 정부 전쟁정보국이 전시에 포로로 보호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보고서 등을 보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한’, ‘나이 어린’ 일본군 위안부상과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을 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위안부상은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는 다양한 측면”(19쪽)을 없애버리고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17쪽)로만 고착되었을까요? 한일 사이의 풀리지 않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한국인의 ‘피해자성’을 부채질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이 일본 우익을 혐한으로 극우로 몰아가는 것일까요?
이 발제문을 쓰기 위해『제국의 위안부』를 재독하면서 저는 이 책의 꼬투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많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잠시 나왔지만, 한국이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너무 내세우는 바람에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혐한과 우경화로 내몰았다는 주장(203, 314쪽),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74쪽)는 주장(이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를 대신해서 약간의 변명 섞인 부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에서 식민지의 구조적 강제성과 “가부장제의 강제성”(26쪽)을 동렬로 놓는 주장 등이 그렇습니다. 이 꼬투리들은 앞으로 좀 더 심화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를 둘러 싼 한일간의 사죄와 보상 문제를 거론한 3부와 냉전 종식과 군위안부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4부에 대해서는 요약과 발제를 생략했습니다. 먼저 저는 현실 정치가 관련된 2․3부는 한일 사이에 ‘하나’가 아닌 ‘여러’ 위안부상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속단이겠지만, 이번 세미나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놓고 논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제국의 위안부 관련 언급된 내용은
수준이하의 정신병자 글인데 굳이 이렇게 길게 써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1, 2, 3, 4가 안 되는 수준입니다.
하긴 1+1=2 정도만 이해해도 말귀가 통하는게 세상인데
기본적으로 말귀가 안 통하는 일베똥들이 넘 많지요.
게다가 지식인의 탈을 쓰고.
사람을 죽여놓고, '내가 죽였나 총이 죽였지' 하는 수준.
총을 욕하지 왜 애먼 사람을 건들여?
위안부 문제는 빙산의 일각, 말하자면 뉴욕 지하철의 깨진 유리창 하나
그 뒤에는 3천만명에 대한 학살범죄가 있습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참.
임진왜란과 왜구활동까지 따지면 1억쯤 죽였을라나.
위안부 문제는 서론의 서론의 서론에 불과합니다.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군조종사를 요리해서 먹은 넘.
남방에서 심심풀이로 백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넘.
731부대를 비롯해서 이런 왕초들은 아직 언급도 안 된 겁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본질적인 전쟁범죄를 건드리는 하나의 단서에 불과한 것이고
일본도 그걸 두려워 해서 위안부 문제를 막는데 필사적인 거죠.
사람들이 백만원짜리는 잘 계산하는데 백억짜리는 잘 계산을 못합니다.
그리고 백억짜리는 잘 계산하는게 오히려 나쁜 경우도 많습니다.
차라리 잘 계산 못하는건 잘 계산하지 않는게 현명하다는 거죠.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백억을 열심히 따져서 물고 늘어지면 사업이 안 됩니다.
의외성이라는게 있어서 세상만사가 뜻대로 가는게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큰 돈은 미리 정확하게 숫자를 맞추려 하지 말고 대략 유드리를 두어야 하는 거.
작은 돈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셈을 끝내는게 귀차니즘을 예방.
한일관계도 근본적인 문제는 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얼핏보기에 작아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호소력이 강한게 위안부 문제이지요.
그리고 이런건 결국 국력에 의해 결판이 나게 됩니다.
일본이 부강하고 한국이 가난하면 과거 덮어둘테니 현찰 좀 꿔달라 이렇게 되고
그 반대로 되면 과거를 자꾸만 들추는 거고.
한국은 올림픽 직전에 처음으로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불렀죠.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시점이 일본은 없다고 떠든 전여옥 책이 나오던 전후.
일본이 뭔가를 잃어버린 10년, 20년, 30년을 카운트 시작하던 때.
국제관계에서 빚진거 없는 한국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해야 할 때가 된 거죠.
하여간 일본이 침략전쟁을 하던 시점에는
조선인들도 일본이 세계를 먹으면
우리에게도 궁물이 떨어지지 않겠나 하고 대거 친일로 돌아선 거.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그때 조선인 너희도 친일한거 아니냐'는 건데
속았잖아요. 무슨 국물이 떨어져? 625 재앙이 떨어졌지.
625 재난도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미소간 나눠먹기 밀약이 원인인데
이것도 청구서 들이대기로 하면 100년 동안 100조원씩 받아내도 셈이 안 될거.
하여간 한국인들은 일본에게 두 번 속은 겁니다.
1) 왜정 때 - 일본이 세계를 지배해서 조선에 국물이 떨어진다. -> 625 재앙이 떨어짐.
2) 한일협정때 - 일본경제가 살아나서 세계를 지배하면 한국에 국물이 떨어진다. -> 잃어버린 30년
죽 암묵적인 약속에 의해 거래가 일어난 것이며
그 거래는 다 파토가 났습니다.
일본은 세계를 정복하지도 못했고
일본경제 역시 세계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암묵적인 약속이 깨졌으니까
퉁치기로 했던 청구서가 다시 효력을 발휘하는 거.
제국의 위안부 관점은 좌파인척 하면서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본질을 물타기 하는 전형적인 사기꾼 꼼수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고
우리는 부채질을 계속해서 일본이 살아나고 있는 동북아시장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일본의 주도권을 박살내버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3백조원 *1백년의 큰 돈이 걸려있습니다.
당신은 30경 정도 가치 되는 유전을 일본에게 그냥 줘버릴 정도로 바보입니까?
그러니까 1+1=2가 안 되는 바보라고 모두에 말했잖아요.
과거 미국이 전쟁해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다 빼앗았습니다.
당신이라면 멕시코는 우리의 이웃나라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하고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멕시코에 돌려주겠습니까?
미친 놈의 새뀌 아냐. 이런 바보는 죽여야지.
우리 미국과 너희 멕시코의 전쟁은 말여. 다 악랄한 권력자들이 벌인 흉악한 전쟁놀음이라고.
우리 미국 민초들과 멕시코 민초들이 그 문제로 화낼거 없잖어.
권력자, 압제자, 지배집단이 악랄한 전쟁을 벌여서 일으킨 일이니
우리 민초들끼리는 화해하자고. 자 캘리포니아도 가져가고 텍사스도 가져가. 우리 친하게 지내. ㅎㅎㅎ
네바다, 애리조나, 콜로라도까지 가져가. 다 원래 너네 것이잖어.
오레곤주와 그 북쪽은 원래 러시아것이지. 캐나다 서부와 알래스카도 러시아에 돌려주자구.
내가 미국인인데 어떤 미국인이 이딴 소리를 한다면?
총으로 쏴버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