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참/거짓’ 개념의 기반 위에 설계된 지식체계를 ‘완전성’ 개념으로 다시 조직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리다. 진리는 ‘참인 것’이라고 정의된다. 실패다. ‘참/거짓’ 개념은 지식인의 언어로는 부적절한 원시의 사유형태다. ‘맞다/틀리다’ 외에도 ‘옳다/그르다’, ‘같다/다르다’, ‘있다/없다’, ‘이다/아니다’라는 더 높은 레벨의 범주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참과 거짓으로 판별할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다.
◎ 이다/아니다.. 전체의 판단 ↑ 부분을 보면 참인데 전체로는 참이 아닌 경우가 있다. 의미로는 맞는데 맥락으로는 틀리는 경우가 많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지는 수도 많다. 열 번 겨루어 아홉 번 이겼는데 마지막 판을 져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일도 많다. 그러므로 참/거짓 개념으로 세상을 헤아리려는 시도는 유아틱한 사유가 된다.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 정신 번쩍 차려야 한다. 완전성 개념으로 갈아탈 일이다. 완전성은 서로 다른 둘 사이에 통하는 것이다. 전류가 통하면 회로는 완전한 것이다. 자식을 낳으면 부모는 일단 완전하다. 싹이 돋으면 씨앗은 완전하다. 참/거짓이 연결된 대상을 측정하여 얻은 값을 문제삼는데 비해 완전성은 그 대상과의 연결이 바로되었는지를 본다. 참/거짓은 어떤 하나를 두고 판단한다. 사과 한 개를 두고 이게 과연 사과나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벌레먹은 사과도 사과냐? 유통기한 지난 식품도 식품이냐? 이런 애매한 상황이 발생한다. 하나를 두고 판단하려면 안 된다. 완전성은 둘로 시작한다. 당구공 둘이 닿으면 둘 사이에 하나의 접점이 발생한다. 이 점은 원래 없었는데 새로 생겼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있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면 화살과 과녁 둘로 판단한다. 화살만 있는데 과녁이 없거나 혹은 과녁이 있는데 화살이 없다면 판단할 수 없다. 축구시합이라면 축구공과 골대 둘로 판단한다. 바둑을 두어도 백돌과 흑돌 둘 사이에 하나의 승부가 결정된다. 둘 사이에서 하나를 새로 얻을 때 판단은 명확해진다. 이것이 완전성이다. 완전성 개념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과학은 ‘참/거짓’개념을 버리고 완전성 개념으로 갈아타야 한다. 완전성 개념 위에서 지식은 새로이 건축되어야 한다. 하나를 두고 판단하면 상대성이 성립하고 둘을 두고 판단하면 절대성이 성립한다. 상대성은 믿을 수 없으므로 절대성으로 갈아타야 한다.
◎ 참/거짓 판단 – (A다.) 이것은 사과다. 차이는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것은 속일 수 있지만 지금 막 결정되려는 지점은 속일 수 없다. 기록된 스코어는 조작될 수 있지만, 골이 들어가는 장면은 속일 수 없다. 탄생과 죽음의 지점은 속일 수 없다. 완전성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존재하므로 모형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모형을 실제로 작동시켜 보여야 한다. 모형의 시뮬레이션으로 판단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모형 안에는 맥락과 가치와 의미와 관점이 들어 있다. 참/거짓의 판단은 이미 특정한 관점이 개입해 있으며 그 관점은 왜곡되어 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세상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기 좋아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상대성을 뒤집으면 절대성인데 끝내 그 동전을 뒤집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식에 있어서의 게으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조론은 용기있게 그 동전을 뒤집는 것입니다. 상대성으로 보면 틀리고, 절대성으로 보면 맞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