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의 의미 어제 팟캐스트 녹음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나는 아직 이 땅에서 믿음있는 기독교도를 한 명도 보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한다. 기독교도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우리들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믿음은 신뢰를 뜻한다. 부모가 자식을 믿는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여 의사결정에 있어 재량권을 넘겨준다는 말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믿고 곳간 열쇠를 맡긴다. 자식은 부모를 믿고 두 팔을 크게벌린 엄마의 품 안에 뛰어든다. '혹시 저 자가 나를 저녁 끼니로 잡아먹지 않을까?' 하고 부모를 의심하는 자식은 없다. 그런데 동물 생태계라면 물고기가 입 안에서 새끼를 키우다가 삼켜버리는 일도 더러 있다. 토끼는 첫 출산으로 낳은 새끼를 잘 키우지 못한다. 신경과민이 되어 새끼를 물어죽이는 토끼도 있다. 그래도 새끼가 어미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나무는 겨울을 맞아 낙엽을 죽여 떨어뜨린다. 그럴 때 나무를 원망하는 잎은 없다. 그 잎은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었다가 다시 나무로 올라간다. 만약 당신이 방 안 어딘가에서 백원 동전을 잃었다면, 그 동전은 방 안 어딘가에 있다. 그 동전은 여전히 당신의 재산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왼쪽 호주머니로 옮겨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A에 없는 것은 B에 있다. 그러므로 걱정할 일이 없다. 그것이 믿음이다. 예수가 말한 믿음 역시 이와 같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인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의 길을 부인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말하는 믿음은 부모가 자신에게 물려주는 재량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한다.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주인의 눈치를 보고 의중을 읽으려 애쓴다. 자기 의사를 삼가고 주인의 의사를 자기 의사로 삼는다. 이는 정확히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도 중에 믿음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의사결정능력이 있느냐다. 무언가를 믿는다고 떠벌이고 다니는 사람은 보나마나 자기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쓸개 빠진 사람이 쓸개를 찾아다닌다. 그게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돈 없는 사람이 쩔그럭거리며 동전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구태여 티를 내는 것이다. 본인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있으면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으면 결정이 자유로워진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는게 믿음이다. 실수를 저질러도 지옥에 안 간다는 사실을 아는게 믿음이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지구가 이미 교회이니 신경쓰지 않는게 믿음이다. 어제 저쪽에서 잃어버린 동전과 오늘 이쪽에서 찾은 동전이 같은 동전이듯이, 부모와 자식은 같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면 제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식을 구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은 같은데 남은 수명은 자식에게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식의 성공을 질투하는 부모는 없다. 아내의 성공을 질투하는 남편이라면 그 안에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충만되어 있느냐다. 동사로 표현되는 사랑하다 이전에 명사로 나타내는 사랑이 배터리에 완충되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믿음이 완충되어 있다면 추가배터리는 필요없다. 일요일마다 교회를 찾아 믿음을 재충전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몸이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잘못은 신의 잘못이며, 인간을 벌함은 신을 벌하는 것이니, 인간의 죄는 신의 죄다. 인간이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신에게 죄를 지우는 행동과 같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행동이다. 거짓 믿음을 버리고 진정한 믿음을 찾아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신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인간은 언제 신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진정한 인간을 발견할 때다. 부모와 자식은 같으므로 만약 자식을 발견했다면 이미 부모를 발견한 것이다. 떨어진 동전은 주변 어딘가에 있다. A에 없으면 B에 있다. 인간을 발견했다면 A를 발견한 것이며, A를 발견했다면 이미 B를 발견한 것이다. 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대는 이미 인간을 발견했는가? 발견하고 보니 그게 인간이 못된 일베충이라면 낭패가 아닌가? 어디서 인간을 찾으랴. 보통은 짐승과 인간을 비교한다. 닭이나 돼지를 보고 인간과 비교한다. 돼지나 개보다 우월하니 인간이 아닌가 하는 식이면 실패다. 왜 인간이 짐승과 비교되어야 하는가? 짐승과 비교되고 있으면 이미 짐승이다. 그대는 짐승과 비교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을 발견했는가? 신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신의 의사결정을 발견했는가이다. 출애굽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리가 이집트를 떠난 것은 아니다. 가나안은 원래 이집트 땅이고 그 북쪽의 레바논도 이집트 땅이고, 시리아도 한 때는 이집트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잘나갈 때는 시리아에서 튀니지까지 일대가 다 이집트 영토였다. 모세는 이집트인이다. 유태인이 홍해를 건넌 적은 없다. 갈대습지를 지나갔을 뿐이다. 이집트 군대가 유태인 무리를 추격한 흔적도 없다. 훨씬 전에 아케나톤이 처음 일신교를 만들었으며 후대에 와서 일신교 세력은 탄압받았다. 아케나톤의 아들 투탕카멘의 이름에서 보듯이 유태인들이 기도때 쓰는 ‘아멘’도 이집트어다. 출애굽 전후로 있었던 중대사건은 '바다 사람들'의 침략이다. 그들은 앗시리아와 이집트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나라를 멸망시켰다. 앗시리아와 이집트 또한 공격을 받아 영토가 축소되었음은 물론이다. 전쟁은 영토와 포로의 획득이 목적인데 그 시기의 바다사람들은 그러한 분명한 목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내쫓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포로를 잡아도 끌고갈 자기 영토가 없다.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파괴와 방화를 자행했다. 약탈을 해도 운반하여 가져갈 고국이 없으므로 약탈도 침략의 목적이 아니고, 오직 파괴를 위한 파괴만 일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부단히 이동했으며 이동에 방해가 되는 도시를 불태웠다. 그때만 해도 지구촌 인구가 다 합쳐서 1억 2천 정도에 불과하던 청동기 문명이었으므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았고 도시의 규모는 작았다. 하이집트 인구가 다 합쳐서 60만에서 100만 밖에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여러 민족들의 연쇄적인 이동이었으므로 침략을 해도 그곳에 정주할 수가 없었다. 다른 집단이 잇달아 밀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태인들도 터를 잡지 못하고 휩쓸려다닌 것이다. 바다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주하게 되자 이집트에서 독립하여 정주하였다. 출애굽이 아니라 탈애굽이라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료를 종합한 대략적인 추정이다. 어떤 사료에도 바다 사람들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임금도 없고 국가도 없고 체계도 없으므로 기록을 남길 수도 없다. 그들이 지중해의 청동기 광산을 없애버려서 철기문명이 일어났다. 인간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인간이 터를 잡고 정주하면 개체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무리지어 이동할 때는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출애굽사건은 우리에게 강렬한 영감을 준다.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단서다. 광장에서 촛불시위를 할 때, 순례여행을 할 때, 인간의 원형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여럿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보조를 맞추어 일제히 나아갈 때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개체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의 고향은 집단이다. 인간은 고향에서 도시로 나온게 아니라, 자궁에서 아기로 나온게 아니라,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온게 아니라 집단에서 개인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찾는다. 교회에 그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집단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단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그 집단을 믿는다. 집단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타산의 믿음이 아니다. 아기가 문득 엄마가 있는 쪽을 돌아보듯이 모든 의사결정의 근거를 찾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이다. 아기가 놀다가 두리번 거리며 엄마를 찾는 것은 그래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게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엄마를 모든 의사결정의 소실점으로 정해놓고, 마음놓고 의사결정하기 위해서다. 이는 국가가 헌법을 정해놓고서야 마음놓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아기는 엄마를 잊고 편안하게 놀 수 있다. 헌법이 작동할 때 국가는 그 헌법을 잊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계속 헌법을 들추어보고 헌법재판소에 사건을 가져간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는다며 아침 저녁으로 교회를 찾는다면 이는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의사결정단위로 기능한다. 가장 큰 집단에서 최고단위의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울타리를 잡고 그 단위에서 의사결정하면 그것은 곧 신의 모습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최고단위의 의사결정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고단위를 타자로 자신과 분리할 때 그것은 불신이 된다. 나를 떠난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신이 나를 떠나 저쪽에 있다면 나는 이미 버려진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타자이며, 그것은 버려진 자의 신이다. 출애굽시대에 이집트로부터 버려졌다는 고통의 기억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배를 타고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한다. 그러나 종종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다. 터를 잡고 정주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선장과 갑판원과 기관실이 하나였다. 그러나 순풍을 만나 지루한 항해가 계속되면 선장은 선장식구끼리 브릿지에 모인다. 갑판원은 갑판원끼리 구석에 모인다. 기관실 사람은 기관실 안에 따로 모여서 고스톱을 친다. 그러다가 사나운 폭풍을 만나면 다시 얼싸안고 하나임을 확인한다. 가끔은 그렇게 배가 흔들려야 한다. 거센 폭풍이 몰아쳐야 한다. 큰 파도를 힘들게 넘어줘야 한다. 그래야 정신차린다. 그 배 안에서 나와 타자의 구분은 있을 수 없는 거다. 폭풍을 만나 한 명이 살아남았다면 그 한명이 선장이면서, 기관장이면서, 갑판장이다. 인간이면서 신이다. 개체이면서 집단이다. 구분은 의사결정을 위한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인간을 발견해야 하며 그 인간은 광장으로 나와 순례여행을 떠나면서 무리를 짓는다. 먼 길을 함께 갈 때 그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섬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획득되는 것이다. 대표성이 획득되고 존엄성이 획득된다. 진짜 인간은 짐승과 구분되는 영장류 인간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자궁으로부터 낳아진 인간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서 대표성을 획득함으로써 존엄한 인간이다. 기독교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완전성의 원형을 가진다. 그것은 원죄≫추방≫대속≫구원이다. 이렇게 자체적인 완결성을 가진다. 원죄는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인간은 왕따가 되었을 때, 해고되었을 때,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 입시에 낙방했을 때, 병에 걸렸을 때 그러한 원죄의 상태가 된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며, 거기서 사건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원죄는 분리불안의 고통이다. 아기의 시야에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의 고통이다. 그 집단이 사막의 유목민과 같은 유랑집단이면 그러한 원죄의 고통은 더욱 가혹할 것이다. 그러니 누구 죄없는 사람 있겠는가? 집시무리에서 쫓겨난 소녀집시의 운명과도 같다.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에서 쫓겨나 홀로 남겨진 징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 무리와 같다. 사막의 베드윈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절대고통이다. 원죄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존적 사건이다. 구원은 다시 무리를 찾아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원초적 두려움은 바로 그것이다. 유목민 무리가 텐트를 걷어 새로운 목초지로 이동하였는데, 바위뒤 구석에서 늦잠을 자다가 무리를 잃고 사막을 헤매이는 그런 그림이다. 인간이 정주생활을 한 것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며 그 전에는 사냥감을 찾아 끝없이 이동했다. 불교의 기승전결 완성형은 고≫집≫멸≫도다. 기독교의 원죄나 불교의 고나 본질은 같다. 생로병사는 그다지 고가 아니다. 진정한 고는 다들 떠나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돌사막의 바위틈에 버려지는 것이다. 환자라고 해서 버려지고, 장애인이라고 해서 버려지고, 귀신들렸다고 해서 버려진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버려지고,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사냥을 못한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인간은 온갖 이유로 무리에서 버려지고 배척된다. 유전자에 각인된 무서운 고통이 거기에 있다. 그럴 때 무리를 찾아 엄마품에 뛰어드는 아기처럼 울면서 뛰어드는 것이 깨달아야 할 도다. 마르크스의 기승전결은 소외≫착취≫투쟁≫해방이다. 패턴은 같다. 이렇듯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구조를 가지면 먹힌다. 기승전결이 동그랗게 말려서 입자를 이루고 이는 무한복제된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무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근원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기승전결 역시 같다. 소승이 극복해야 할 고립이고 대승이 이루어야 할 해방이다. 다시 무리를 찾아 넉넉한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을 발견해야 한다. 믿음은 그 인간 무리에 대한 믿음이다. 비록 낙오되어 대오에서 이탈했을지라도 터벅터벅 걸어가면 부대를 만날 수 있다. A에 없는 것은 B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다'는 식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은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와 같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태여 스위치를 켜지 않아도 자동으로 전구에 불이 들어올 것이며, 믿음이 고갈되면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전구에 불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단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는 의사결정능력을 가지는 것이 정답입니다. 개가 낳으면 무슨 짓을 해도 개일 것이고, 사람이 낳으면 무슨 짓을 해도 그 자는 사람입니다. 과연 사람이 낳았는가? 과연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여 집단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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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들은 믿음을 직관으로 판단하지 논리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그 믿음을 가진 기독교도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같은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입니다. 제가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은 되도 않게 옛날책에서-성경이라죠 아마- 주워온 글자 몇 마디로 논쟁하려고 하는 자들이 우스워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존재론적 직관에 기초한 본능으로 신앙을 믿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때는 인식론으로 바꾸어서 되도 않은 조잡한 논리를 끌어대어 어쩌구 저쩌구 말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제 말은 반대로 들어야 합니다. 증거타령 하는 목사들 말은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기독교인 중에 목사들 말 듣고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믿음은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단 교회에 혼자 가면 재미가 없고 안 가는 사람을 설득하여 같이 가려니 논리가 필요하고 엉터리 말을 꾸며대는 거죠. 인간이 화장실에 가는 것이 본능이듯이, 신앙도 '무리짓는 본능'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의사결정원리와 일치할 때는 강력해지는 것이며 반대로 갈 때는 비루해지는 거죠. 신앙이 중대한 의사결정의 에너지로 작용함은 강력해지는 것이며 쓸데없이 없드려 절하고 빌고 찌질대는 것은 비루한 것입니다. 제가 역겨워 하는 것은 선비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신에게 무릎꿇는 행동은 신을 무릎꿇리는 행동입니다. 누가 감히 신의 아들을 무릎꿇게 한다는 말입니까? 목사들이 즐겨 쓰는 증거라는 단어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단어입니다. 증거 대면 믿는다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신에게 무릎꿇는 행동은 신을 무릎꿇리는 행동입니다. 누가 감히 신의 아들을 무릎꿇게 한다는 말입니까?
제말은
기독교인 가운데에서도 동렬님처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라는 겁니다.
자세히 읽어보세요.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성경에서 증거 찾는다는 사람 빼놓고 다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영화보다 억배 좋은 글이네요. 보면서 도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며 만든걸까... 신은 왜 저런 대사를 하게 했을까... 이랬다지요.
이러한 글들이 책으로 나온다면..'깨달음을 그리다' 처럼 이쁘게....ㅎ~
요즘 글 완전 최고입니다.ㅎㅎ~^^
좋네요
앗수루의 수도 니느웨성에는 앞뒤를 분별하지 못하는 인구 숫자가 12만명이라고 했습니다.
대충 12만명의 어린아이들 숫자를 계산하여 어른 숫자를 유추하면 약 55만에서 60만명 정도가
니느웨성에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동렬님의 말씀에 동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인구를 1억 2천 정도로 보는 부분 말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는 약 500년 정도를 살았습니다. 노아홍수 이전에는 900살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나이가 170살 정도 였습니다.
지금 인류의 평균수명은 약 70~100세정도 입니다. 만약 노아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이 500년 정도
살았다고 하면 지금 연대로 계산하면 1600년대 사람들과 현대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70세정도의 평균수명에도 인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500세를 살았던 약 4000년 전의 시대를 본다면 기원전 4천년전부터 3500년대까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대충 계산해도 최소 지구인구는 10억이 넘습니다.
노아와 그 세아들과 세자부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숫자가 미미하게 늘어나겠지만
노아가 죽기전 100년정도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처음엔 20명의 자녀를 낳았다면 그다음에는 200명 그 다음에는 2000명 그 다음에는 200000명.....
그 다음에는 2백만명 그 다음에는 2천만명 그 다음에는 2억이 넘는 인구가 생깁니다.
아이를 낳을수 있는 나이가 150살 정도까지라고 하면 아브라함은 120살에도 7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70살 기준해으로 6세대만 지나면 지구인구는 폭팔적이되는 것입니다.
전 산수를 잘 모르니 대충 계산하겠습니다.
앗수르 수도 니느웨성에 살던 인구가 60만명입니다. 앗수르 전체인구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의 후손이 출애굽때 200만명정도로 보는데....한 민족을 이루기에는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 인구가 600만명정도라고 하는데.....
전쟁때 죽은 이스라엘 인구가 600만명이 넘으니....참
지구 인구 숫자 너무 축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셈(5OO세이상) - 아르박삿(438) - 셀라(433) - 에벨(464) - 벨렉(239) - 르우(239) - 스룩(230) - 나홀(148) - 데라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노아의 아들 셈이 홍수후 2년뒤에 아르박삿을 낳습니다. 그리고 30년 주기로 자녀를 낳습니다.
셈은 아브라함이 태어날때에도 살아있었을 것입니다. 약 9세기 300년 후에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을때쯤 셈도 죽었을 것입니다.
저 많은 세대가 한시대에 동시에 살아있다고 생각해보십시요...그리고 성경에는 30세에 누굴 낳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렇게 500년동안 자녀를 낳아서 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지구인구가 1억???? 저는 도무지 믿을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 사람들과 현대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면 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숫자가
지금보다 더 적을까요? 남북한 다 합치면 7천이 넘는데....
그냥 정확하게 반박을 해보시든지요^^
저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휴!! 쩝!!
절창이네요, 큰 깨달음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신은 우리를 동급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릎꿇는 이유는 신에게 뭔가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우리가 알아서 지혜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원하신것입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것은 신과 같이 된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나는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나를 예수님과 동급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것에서 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한몸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와 동급입니다.
그것은 내가 실력이 있어서 동급이 된것이 아니라 신이 그렇게 만들어준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신과 같이 된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원하는것은 신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어서 신의 성품을 닮아 신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인이유는 우리는 영원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것만으로 설명은 부족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인것입니다.
우리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가 얻게 했습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은 스스로 얻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입니다. 아담에게 준 생명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갖습니다. 죽어도 죽는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육신은 죽으나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말고 영까지 죽이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영의 죽음은 단절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몸되어서 그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단절은 살아있어도 산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죽엇다고 표현합니다. 영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영은 영원히 죽지 않는데 죽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생명과의 단절때문입니다. 영이 원하는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생명을 그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이 가진 생명을 나누는 자들이 생명을 얻게됩니다. 곧 아들과 소통하는 자들만이 단절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하는 자들이 그 생명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가 얻게되었다는 것으로 기독교는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는 에수님과 하나되어야합니다. 이 하나됨은 성령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랑할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인카네이션 해서 우리를 만나주신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 생명을 달라고 구한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지않아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는 양을 잡아 죽여 피를 내어 그 피로 정켤케 하는 의식 제사를 드린것을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제물이 되실수 밖에 없냐면 생명나무 열매를 얻게 하기 위함인것입니다. 선약과를 먹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생명나무 열매도 얻지 못하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이 생명나무 열매를 얻어야 영원히 살수 있는데 바로 이 생명나무의 근원인 그 생명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을때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빛의 아들님...
자꾸 엉뚱한 말씀하지 마세요.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님은 동렬님이 말하는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 예수님, 성령하나님, 십자가, 진리, 길, 생명, 선악과(성경에 선악과 라는 말이 있나요?)
이런 말들을 하시는데 여기 저기서 들은 이야기들로 마구 뒤섞인 채로 말씀하시니 참...
이건 비빔밥도 아니고 다 비벼서 국에 말아먹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성경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라고 나오지요. 줄여서 선악과 라고 약칭한것은 맞습니다.
선악과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나.......
저는 신학을 한 사람이고 마구 뒤섞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성경자체가 마구 뒤섞인것이 맞습니다.
모세오경 선지서 예언서 역사서......날짜별로 잘 정리된것은 아니지요.
믿음은 믿는자에게나 이해되는 문제이지 믿지 않는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김동렬 선생님은 구조론적으로 기독교의 문제를 본거지 믿음의 관점에서 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주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위치에 까지 올려놓으시고 우리와 소통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 위치에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믿음이 없는 이유는 자기의 위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없이 했는데
여전히 죄인처럼 살고 있고 하나님이 자녀로 불렀는데 여전히 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소통의 대상이 아닌 섬김의 대상으로 보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 만남을 원하시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도구로 나의 성공의 도구거나 편한삶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동렬선생님이랑 종교에 대한 생각은 많은 부분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감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부분까지는 동감하지만 믿음의 부분은......
우리가 스스로 나약해지고 연약해지는 그런 한심한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오늘 죽으면 어떻고 내일 죽으면 어떠하리 하고
자신감 가지고 오늘을 열심히 사는 인생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인생을 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불렀는데....내일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써먹는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그런짓은 그만두자...
하나님을 진정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우상처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소통입니다. 십일조 내고 십일조 냈으니
10배 100배 1000배 달라고 하는 것이 소통이 아니지요.
아니... 누가 뭐라 그러던가요?
하나마나한 얘기를 자꾸 하시면 안되지요.
1+1=1 이다 왜냐하면 1+1=1이니까...
신학을 했다 그러셨는데...신학을 했다는 분이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시면 안되겠지요?
여기서 님과 신학 논쟁을 하는 것은 민폐가 되니까
더 길게 말할 수는 없겠지요.
어디 다른 데 가서 만나 이야기하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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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선악과 라고 말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지금 자판에서 손을 떼시고 묵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1+1=2 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라고 말할수 있는건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지만 믿으니까 믿습니다.가 아니라
아니까 믿습니다. 까지 되어야합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아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거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아는것은 믿는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르는걸 믿어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내 안에 있는 장기,뼈,심장,뇌의 구조를 알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것을 알면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알기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은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었다고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했고 빛이 생겼습니다.
빛을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빛을 보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 빛은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것입니다. 실제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은게 아닙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善惡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라는 한자어 이 한자어에 맞는 열매를
아담과 하와가 먹었다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의 잎파리를 먹은것도 아니고 가지를 먹은것도 아니고
줄기를 뿌리를 먹은게 아니라 과일과자인 果(열매과)를 먹은 것입니다.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묵상하라고요? 45년 묵상하고 살았습니다.
앞으로 죽을때까지 묵상하고 살겁니다.
하라마라 하는 것도 월권입니다.
제가 님에게 기도하십시요! 라고 강요했습니까?
믿으라고 강요했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라고 말하는건 제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반박하시면 됩니다.
원문은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건 못믿겠다. 못믿겠다 하는 것과 같은 말이거든요.
왜냐면, 못 믿으니까 믿습니다 하고 반복하는 거지요. 진짜 믿는 사람은 저런말 안 해요.
말은 반댓말이지만 그런거죠.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시라구요.
못 믿으니까 자꾸 확인하고 인증받으려는 거여요.
하지만 우리엄마가 확실한데, "나는 우리엄마라고 믿어요"라는 말을 엄마한테 합니까??
울엄마한테 이런말을 하는게 더 이상한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그래도 캄캄??
"나를 낳아준 친엄마라고 믿어요"라고 말하는건 계모한테나 하는거죠.
친 엄마처럼 믿는다는 말이 필요없데도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반복하는건 믿지않기 때문이죠.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행위 자체가 믿지 않는다는 뜻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거죠.
그래서 동렬선생이 믿는사람 못 봤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는다는 말이 필요없이 믿는것일까요.
이미 동렬선생이 다 써 놨습니다. 깨달아야 한다고...
신과 일대일이고 신과 동격이란걸 깨달으면, "우리엄마라고 믿어요" "내 자식이라고 믿어요"
"난 밥먹고 산다는걸 믿어요" 이런말이 필요없는거죠.. 그런말 하는게 더 이상하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떻게 그런 것과 비교하냐고.. 신을 믿는건 다르다고 하겠죠?
자꾸만 차별하고 자꾸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쪽으로 갖다 놓으려 할겁니다.
동격은 왠지 두렵고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거 같아서 주종관계로 설정해야 안정이 될거여요.
오래동안 그래왔으니 그게 더 익숙하고 관성의 법칙이니 어쩔수 없지만 그래도 여기 오시면
좀 생각을 바꿔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딱 석줄만 쓰려고 했는데 하다보니 또 주절주절 별 영양가도 없는 말 많았네요. 죄송~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부터 왕자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입에 금수저물고 태어났다고요..
그런데 친히 옆에서 대면한 제자들이나 바울이도
그럴리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입양된 양자라고 우깁니다.
입양아냐 친자냐 이게 핵심입니다
물론 상징적 표현입니다 입양아라는 표현에 오해들 마시길
댓글을 달땐 반드시 본문을 읽어 보고 달아야하는것이 규칙입니다.
규칙을 지키소서
빛의 아들님!
님은 지금 19세기를 살아가고 있어요.
과학실증주의, 역사실증주의 그런 시대 말이죠.
성경이 쓰여질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진짜 있었던 일이냐? 아니냐?"
거기에 관심이 있을 수도 없거니와 관심도 없었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에 사람들은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요?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이것은 무슨 뜻일까? 에 대한 이야기죠.
토마스 쿤이 지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어보셨나요?
그거 읽고 말씀하시죠.
읽으셨는데 저런 말씀하셨다면...
할 말이 없구요.
딴짓거리 하나 합니다.
곱슬이님한테 가끔씩 혼나지만 ㅠ
뎃글까지 읽다보니 넘의 나라 이야기는 사람들이 잘 아는데 한국 이야기는 얼마나 알고 있나하고
여기에서 단군에 대해 검색해 보았더니 동렬님께서는 정식으로 거론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오네요.
기회되시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한번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회원님께서 혹시 동렬님께서 그전에 쓴글이 있으시면 링크해 주시고요.
단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시절 문자가 없었으니 기록할 사람이 없었지요.
단군신앙은 고려시대에 나온 걸로 되어 있습니다.
4천년 지난 후에 쓴 기록은 인정이 안 됩니다.
5천년전 당대에 기록해야 합니다.
유물을 발굴해서 고고학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물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영원한 전설이나 설화로 남겠네요. ㅠ
빛의 아드님,
교회-교리를 말씀하시네요!!
차라리
성경구절 만 대 보시죠
그게 더 명료하겠네요.
제가 볼 때는
성경은 만민들 의 것이고
교리는 교회의 것이죠----가끔 은 바뀌지만[슬거머니,] 아니면 아예 언급을 안하든지---ㅎㅎㅎ
교리는 성경안에 많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내용들을 교리로 할수 없어서
핵심만 줄인게 교리입니다.
기독론/성령론/교회론/신론/인간론/구원론/죄/
성경을 풀어 이해하기 쉽게 만든게 교리입니다.
성경이 근본이고 교리는 교본입니다.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교리는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원리강론이니 이만희의 성령론그런건 다 사기....
여호와증인은 성경을 변개했으니 사기.
안식교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하니 사기..
우리 기독교인은 이스라엘백성이 아니라 이방인이지요.
기독교인이 이스라엘 백성 행세하면 사기.
하나님의 양자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 사기 아님.
아브라함의 친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양자들인 이방인이
하나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회론입니다. 나머지는 가짜들입니다.
동렬선생님이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수 있습니다.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1800년대 세계인구가 9억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2015년 세계인구가 75억입니다.
예수님당시 세계인구가 약 2~3억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75억입니다.
이당시 평균수명은 60세가 안되었을 때입니다.
기원전 4천년전에 인구는 8명입니다.
그리고 평균수명이 500살입니다.
노아홍수후에 수명이 점점 줄어 아브라함시대에는 170살
출애굽때는 100살정도 출애굽한 백성들은 60~80살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때 세계인구가 1억?밖에 안되었을까요?
저는 도무지 믿을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도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해 한가운데로건너지 않았다는것..
그것은 직접본 증인들의 고백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증인이기 때문이고 성경이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질구질한 역사를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좋은 모습만 기록하는게 아니라
인간을 마구마구 죽이는 인간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그런 역사들까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티들도 그걸 가지고 하나님을 살인자라고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진실이라는 증거입니다.
책들은 좋은 내용 아름다운글로 채우지만
성경은 진실을 쓴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많은것들이 있습니다.
좋은 내용 구질구질한 내용 나쁜내용 이해하기 힘든 내용.....
인간 군상들의 쓰레기같은 내용들까지....
그래서 진실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홍해를 갈랐고 애굽군대는 물속에 수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대설도 있지만 진실은 홍해는 갈라졌고 애굽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객관적 사실성에 대한 순진한 집착" 이라고 하지요.^^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믿고 있어요.
성경은 모두 사실이다... 고로 진리다...???
믿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불안해서 그러는 겁니다.
맞네요. 그런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논쟁을 하기보다는
"빛의 아들님"을 위해 기도해 드려야겠군요.^^
"나는 아직 이 땅에서 믿음있는 기독교도를 한 명도 보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한다."
이 말씀은 이 땅에 믿음 있는 기독교인이 한 사람도 없다 라는 말은 아닐테지요?
여기서 "믿음"은 보통 기독교도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동렬님이 생각하는 그 믿음으로 할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