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동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무릇 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시간적 미래의 예측이다. 다음은 공간적 내부의 통제다. 그러나 보통은 그것과 다른 것을 구분할 줄 알면 곧 안다고 한다.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자다. 종이와 글자를 구분할줄 아는 사람은 글을 아는 사람일까? 읽을줄 알고 쓸줄 알아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읽기와 쓰기만으로 충분할까? 문맹자가 없는 한국인의 독해능력은 세계 하위권이라고 한다. 세종대왕의 말씀을 빌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사람은 글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실어서 펼 뜻이 있기나 할까? 세상에 펼칠 큰 뜻을 얻은 사람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뜻은 글자와 상관없다. 그것은 이미 글자를 넘어서 있다.
◎ 보통의 앎 - 종이와 글자를 구분할줄 안다. 보통의 앎은 사실 모르는 것이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보통의 앎과 깨달음 사이에 넘사벽이 있다. 그 벽을 넘은 깨달음에도 소승적 앎과 대승적 앎이 있다. 소승적 앎은 글자를 읽고 쓰는 것이다. 대승적 앎은 부단히 변화하는 환경과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도 ‘쉬이 이겨 널리 쓰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대상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고, 보는 나를 앎으로써 가능하다. 나를 알 때 비로소 내 안에 뜻이 무르익는다. 그 뜻은 세상과 내가 마주치는 대립의 각도에서 얻어진다. 그 각으로부터 유도되는 에너지 낙차에서 얻어진다. 땡깡 조현아는 그 낙차가 작고 의인 노무현은 그 낙차가 크다. 세상 앞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돈이라도 그렇다. 500원 동전과 100원 동전을 구분할줄 아는 아이는 돈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은 사실 필요가 없다. 신용카드로 대체가 된다. 글자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 속에 참된 뜻이 있다면 글자는 몰라도 된다. 그 뜻은 그림으로도 펼칠 수 있고, 음악으로도 펼칠 수 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난독증 장애가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펼칠 수 있다. 어떤 경지에 오르면 그것은 필요없게 된다. 앎을 넘어서게 된다. 돈을 벌줄 아는 사람은 돈이 없어도 된다. 돈이 없어도 되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진정으로 돈을 아는 사람이다. 첫째는 자동차와 마차를 구분하는 앎이다. 둘째는 차의 내부를 통제할줄 아는 소승적 앎이다. 셋째는 자동차를 운전하여 목적지에 갈 수 있는 대승적 앎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겨야 한다. 자동차는 도로 위에서 비바람과 보행자와 신호등과 대결한다. 급격한 커브와도 대결하고 진창길과도 대결한다. 환경과의 대결에서 쉬이 이겨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동動의 동動이다. 동의 동을 아는 것이 여러분이 도달해야 할 진정한 깨달음이다. 지금은 봄이다. 봄을 아는 것은 정靜이다. 봄인가 하였더니 이미 여름이다. 계절은 변한다. 계절의 변화를 아는 것이 동動이다. 봄을 보고 미루어 여름을 아는 것은 동의 동이다. 이명박의 오버를 보고 그의 몰락을 미리 아는 것이 동의 동이다. 다음 단계를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예견하고 대비해야 그 겨울을 이길 수 있다. 이기고서야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펼 수 있다. 세상의 근원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볼 수 없다. 상대성 때문이다. 관측은 관측자를 필요로 한다. 판단의 기준이 되는 관측자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상대성이다. 에너지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움직임을 보려면 움직임의 움직임을 보아야 한다. 한 단계 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는 강물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를 봐야 강물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움직임은 관계를 만든다. 한 단계 위에서 관계를 볼 수 있다. 존재는 관측될 때 정靜이다. 그 관측에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관측에 성공한다. 그것은 동動이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관계다. 어떤 것이 움직이면 반드시 그것을 막아서는 것이 있다. 대칭이다. 관계는 대칭을 이루고 대칭은 교착되고 교착되면 정靜이다. 그 관계의 변화를 읽어낼 때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펼 수 있게 된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다.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 존재가 관측되면 정靜이다. 처음 수요가 있다. 수요는 얼마로 정해져 있다. 한국인 모두가 차를 한 대씩 가지면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정靜이다. 그 수요가 변한다. 차를 두 대, 세대씩 가지려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動이다. 그런데 공급에 막힌다.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멈추기 때문에 다시 정靜이다. 통제하려면 수요와 공급이 마주쳐 대칭되었을 때 성립되는 전선을 변화시켜야 한다. 남녀사이에도 그러한 전선이 있고, 여야 사이에도 그러한 전선이 있다. 예술에도 패션에도 영화에도 보이지 않는 전선이 그어져 있다. 그 사이에서 밀당은 일어난다. 그 전선을 움직이는 것은 양쪽이 공유하는 토대다. 토대를 변화시킴으로써 교착을 타개하는 동動의 동動을 끌어낼 수 있다. FTA로 인한 직구족의 증가는 토대의 변화다. 서울시향을 지휘하는 정명훈의 연봉은 비싸거나 혹은 싸다. 연봉을 깎거나 늘리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이는 동動으로 정靜을 이기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성공하지 못한다. 서울시향을 찾는 클래식 팬의 감소로 대칭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실패는 동으로 정을 치다가 상부구조의 정에 되치기 당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교착된다. 이대호 연봉 깎으려다가 망한 롯데꼴 나는 수 있다. 시장 전체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 그것은 동의 동이다. 비싼 연봉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명성이 있다. 그 명성을 듣고 한국에 유학오는 중국학생이 있다. 그 시장이 결코 작지가 않다. 앞으로 한국의 대학들은 중국 유학생에 의지하여 먹고 살아야 한다. 인구감소 때문이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 토대를 변화시키는 동의 동으로 이길 수 있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 한 끼가 수십억이나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유명화가의 그림값이나 골동품 가격이나 문화재의 가격이 비쌀수록 좋은 것도 이유가 있다. 토대를 키워 집단이 커나가는 방향성을 제시할 때 조직의 효율은 극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류현진의 연봉을 높이는 것이 방송중계권료 파는 다저스에게는 이익이다. 돈으로 명성을 사는 것이며, 명성으로 토대를 치는 것이다. 존재는 동動이다. 에너지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측은 정靜이다. 자연의 진실은 동인데 인간이 보는 것은 정이므로 인간이 어떻게 보든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하게 된다. 인간의 정이 자연의 동에 치이는 실패다. 다만 인간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관계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동은 관계에 의해 다시 정으로 환원된다. 물은 흘러도 바다에 막힌다. 자동차는 속도를 내도 신호등에 막힌다. 자연의 근본은 동이며 그 동은 대칭에 의존하고 대칭은 정이므로 인간의 관측이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럭저럭 살 수 있다. 남자가 잘난척 하면 여자가 싫어한다. 부자가 돈을 벌면 빈자가 위화감을 느낀다. 여당이 독주하면 유권자가 견제한다. 반드시 막아서는 것이 있다. 어떤 상태는 정이고, 그 정에 변화를 주는 것은 동이며, 동은 반드시 대칭에 막힌다. 그 대칭은 평소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가 튀는 행동을 할 때, 분노한 국민이 조현아 때리듯이 갑자기 나타나서 제동을 건다. 몰매맞지 않으려면 가만이 엎드려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가? 토대를 건드려야 한다. 동의 동으로 타개할 수 있다.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남자가 성공할수록 여자를 존중해야 한다. 부자가 돈을 벌수록 빈자를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를 향해 손잡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제로셈 게임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향성이 있다. 동의 동을 안다면, 관계의 변화를 안다면, 토대를 다룰줄 안다면, 내부의 통제를 넘어 미래를 예측하고 외부환경에 대응할 수 있다. 조직이 커나가는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대개는 동으로 정을 치다가 자충수가 되어 몰락하거나, 혹은 외부세력을 끌어들였지만 대칭으로 교착되어 지지부진하게 된다. 현 단계에는 답이 없다. 다음 단계를 해결할 때 거기서 방향성이 생기고 방향성이 가속도를 만들고 그 기세의 힘으로 뛰어넘는 것이다. 미래의 힘으로 현재를 이긴다. 먼저 신용을 얻은 다음 빚을 내서 사업을 하듯이 미래의 성공으로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현재로는 절대 현재를 해결할 수 없다. 교착되기 때문이다. 집은 정靜이다. 길은 동動이다. 결은 길의 길이다. 동의 동이다. 만들어진 길은 길이요 치고나가는 길은 결이다. 파죽지세로 치고나갈 때 결을 얻는다. 관성의 법칙은 동의 동이다. 정지한 버스는 정이요 달리는 버스는 동이며, 그 달리는 버스가 갑자기 멈출 때 관성의 법칙이 동의 동이다. 이때 순서가 드러난다. 다음 단계가 드러난다. 모두가 다음 단계를 예측하게 될 때 집단이 합의하게 되고 그 힘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 힘으로 이긴다. 각운동량보존도 같다. 포위망을 좁힐 때 집단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집단의 에너지가 한 지점에 집약된다. 소거법을 적용하여 선택지를 좁혀갈 때, 서로간의 관계는 긴밀해진다. 다음 단계가 예측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중의 역설, 동적균형, 동의 동은 다 같은 말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거죠.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면 다음 단계를 뻔히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이심전심이 되고 묵시적 합의가 되고 서로 신뢰할 수 있게 되고 팀플레이가 됩니다. 그러나 플러스 방향으로 가면 교착되고 개판되어 지리멸렬해집니다. 오늘날 진보의 실패는 플러스 방향으로 길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장작을 패더라도 결따라 파죽지세로 내리쳐야 하는데 잘못 친 거죠. 장작을 모로 세우지 않고 옆의 허리를 때리면 도끼로 백번 쳐도 쪼개지지 않습니다. 몽을 배제하라고 하면 합의가 되는데, 통진당을 합치라고 하니 합의가 안 되어 망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