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영화 '나쁜남자'가 여성의 지위향상에 기여하는가?
답 : 그렇다.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가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나쁜 남자이다. 미국에서 가장 나쁜 남자인 나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했을 때 보통 미국인의 권리인들 보호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쁜 남자 신창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했을 때, 보통사람 수지김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겠는가? 생각하라! 범죄자 신창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보통 사람 수지김의 권리도 보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창녀는 밑바닥이다. 인격과 명예에 있어서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이다. 우리가 창녀에게 편견을 가질 때, 창녀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까는 시선으로 대할 때, 노동자의 지위가, 노동자의 인격이, 노동자의 명예가 대접받을 수 있을까?
바로미터다. 나쁜 남자 래리 프린트가 미국으로부터 대접받는 정도는, 평균적인 미국시민이 미국으로부터 대접받는 정도의 바로미터다. 창녀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도 대접받지 못한다. 창녀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구두닦이도, 때밀이도, 청소원도, 식당종업원도 대접받지 못한다.
노예시대의 흑인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면, 어떤 위대한 감독이 아무리 잘 만들었더라도, 흑인의 분노를 싸게 되어 있다. 흑인들은 그 영화를 보는 것 만으로 고통받는다. 그렇다고 그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흑인의 지위가 향상될까?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나는 이 구절 때문에 이상의 날개를 좋아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나에게는 확실히 그런 구석이 있나보다. 내가 그것을 싫어한다면 나는 달려가서 먼저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나는 그런 의무감을 느낀다. 다리밑에 거지가 있다. 나는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거지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더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그 거지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 거지를 끌어안지 못하면, 나는 그 거지에게 패배한 거다. 나는 그 패배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는 지기 싫은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나는 패배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나와같이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드물게 나와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반갑다. 그런 사람과는 금방 친구가 된다. 김기덕도 내가 발견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혐오한다면, 내가 보기에 그가 벌레처럼 꼴보기 싫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진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틀렸는가?
답 : 그렇다.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가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나쁜 남자이다. 미국에서 가장 나쁜 남자인 나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했을 때 보통 미국인의 권리인들 보호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쁜 남자 신창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했을 때, 보통사람 수지김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겠는가? 생각하라! 범죄자 신창원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보통 사람 수지김의 권리도 보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창녀는 밑바닥이다. 인격과 명예에 있어서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이다. 우리가 창녀에게 편견을 가질 때, 창녀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까는 시선으로 대할 때, 노동자의 지위가, 노동자의 인격이, 노동자의 명예가 대접받을 수 있을까?
바로미터다. 나쁜 남자 래리 프린트가 미국으로부터 대접받는 정도는, 평균적인 미국시민이 미국으로부터 대접받는 정도의 바로미터다. 창녀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도 대접받지 못한다. 창녀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구두닦이도, 때밀이도, 청소원도, 식당종업원도 대접받지 못한다.
노예시대의 흑인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면, 어떤 위대한 감독이 아무리 잘 만들었더라도, 흑인의 분노를 싸게 되어 있다. 흑인들은 그 영화를 보는 것 만으로 고통받는다. 그렇다고 그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흑인의 지위가 향상될까?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나는 이 구절 때문에 이상의 날개를 좋아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나에게는 확실히 그런 구석이 있나보다. 내가 그것을 싫어한다면 나는 달려가서 먼저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나는 그런 의무감을 느낀다. 다리밑에 거지가 있다. 나는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거지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더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그 거지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 거지를 끌어안지 못하면, 나는 그 거지에게 패배한 거다. 나는 그 패배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는 지기 싫은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나는 패배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나와같이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드물게 나와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반갑다. 그런 사람과는 금방 친구가 된다. 김기덕도 내가 발견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혐오한다면, 내가 보기에 그가 벌레처럼 꼴보기 싫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진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틀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