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백인 인류학자가 아마존 정글에 살고있는 원주민을 연구하며 원주민 여성과 결혼했다. 원주민 여성은 백인 인류학자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영어도 잘했고 서구문화에 완전히 적응했다. 유명한 대학교수 남편과 아들낳고 딸 낳고 잘 살았다. 그렇게 15년을 살다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아마존 정글속의 고향마을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굼벵이와 송충이, 개미와 나무껍질이 주식이다. 원숭이고기는 한달에 한번쯤 먹을 수 있는 별식이다.
그녀는 문명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천만에. 그녀는 완벽하게 적응했다. 행복했다.
그녀는 다시 원주민 생활로 돌아가서 행복했는가? 아니다. 죽을 고생이다. 불행했다.
그녀는 왜 보장된 행복을 버리고 불행 속으로 도피해 버렸을까? 이건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녀는 행복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행복이나 불행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이 존재한다.
☆ ☆ ☆
김기덕감독의 영화는 관객이 안오는 걸로 유명하지만 『나쁜 남자』는 조짐이 다르다. 나쁜 남자를 경계하기 위해 여성들이 영화에서 나쁜 남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는 소문도 있다. 심지어는 페미니스트들이 나쁜 남자를 반대하기 위해 일단은 본다는 뜬금없는..
남자가 잘못된 길로 가면 조폭이 되고 여자가 잘못된 길로 가면 매매춘을 한다. 조폭이 범죄이듯 매매춘은 범죄다. 왜냐하면 법이 그러니까. 그러나 영화에서는 범죄자라고 차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좋다.
조폭영화를 보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듯이, 극 중의 창녀를 선악의 논리로 볼 필요는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관대해져 매매춘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고,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포스터를 박박 찢어버리면 여성평론가 강한섭씨다.
강한섭의 경우는 황당한 발언을 많이 한데다 조선일보의 시다바리.. 어쩌구 되어 유쾌하지 않다. 일단 대화가 안되는 사람이다. 페미니즘도 좋지만 우선은 대화가 되고 볼 일이다. 매매춘이라 해서 극중 주인공을 이상하게 본다면 잘못된 페미니즘이다.
조폭이 된 남자나 창녀가 된 여자나 도덕적 무게로는 동일하다. 더구나 극중에서는 도덕적인 잣대로 볼 필요가 없다. 물론 마초들의 남성판타지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유명영화제 진출작에 별하나반을 준 건 너무했다.
선화는 한기에게 납치당해서 강제로 창녀가 되었다. 즉 '나쁜 여자'가 된 것이다. 기 맥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한기는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이었다. 억울하기로 치자면 나쁜 놈으로 태어난 것은 나쁜 놈에게 납치당한 것 보다 더 기가 맥힌 사연이 된다. 졸라 억울하다.
쓰바 누구는 예쁜 공주님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처음부터 나쁜 넘으로 태어나고.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떤 사람은 장애자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못생긴 사람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그렇게 납치당한 것이다. 누구에게? 운명에게. 선화만 납치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납치당했다. 만약 그대가 장애자라면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신에게 납치당했다. 신을 원망 하겠는가?
☆ ☆ ☆
백인 인류학자와 결혼해서 아들낳고 딸 낳고 15년 씩이나 살다가 아마존 정글로 돌아가버린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극 중의 선화가 한기를 떠나지 않는 심리를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길들여져서 포로가 되었다거나 이런 식으로 보아서 안된다. 이건 파이란류, 꽃섬류, 라이방류 서푼짜리 먹물영화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사이비다. 진짜가 아니다.
양아치의 꿈은 어떤 경우에도 양아치계에서 알아주는 근사한 양아치로 상승하는 거다. 영화 '친구'를 보자. 극중 장동건과 유오성은 이미 그쪽 세계에 발들 들여놓은 즉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을 밥먹듯이 한, 갈 때 까지 간 놈들이다.
이들에게 가치있는 삶은 '쪽팔리지 않는 것'이다. '빵에 간 선배들 옥바라지 잘하고 동생들 잘 먹여살리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에? 조폭세계에서 손을 씻고 선량힌 민주시민이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악당 조폭을 타도하고 조폭계의 스타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장동건에게 구원은 멋지게 죽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도루코를 죽였으니깐) 유오성에게 구원은 떳떳하게 감방을 가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친구를 죽였으니깐) 그렇게 조폭계의 전설로 남는 것이 구원이다.(자수하고 광명찾아 민주시민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즉 사회가 인정하는 규범과 가치를 떠나서 그들은 그들만의 어떤 가치를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역 노숙자들이 다 일거리가 없어서 그러는건 아니다. 3D업종에 취업할 곳은 많다. 구인난이다. 노숙에는 중독성이 있다. 노숙자의 목표는 완전히 망가져 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집도 있는데 노숙이 좋아서 서울역에서 자는 위장(?) 노숙자도 있다.
노숙자의 목표는 노숙계의 스타가 되는 것이다. 2호선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뻔뻔스럽게 오후 2시까지 자빠져 자는 넘이 스타다.
우리는 아마존으로 돌아간 원주민출신 여성을 이해할 수 없듯이 이런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행복의 논리도 아니고 선악의 잣대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미학의 논리다. 그런게 있다.
거꾸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선화가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가 길들여진 것이다. 행복한 삶, 고상하고 부유하고 안락한 삶이라는 미끼에 우리는 중독되고 길들여진 것이다. 한기와 선화는 동일한 한 사람의 두 모습이다. 한기가 선화다. 누가 누구를 납치하고 길들이는가? 나가 나를 납치하고 유폐하고 길들이는 것이다.
☆ ☆ ☆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매매춘을 하는 직업여성이나 조폭이나 범죄자나 막노동자나 이런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저번에 읽은 어떤 글의 도입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런던 남동부 XXX가에서는 소매치기가 명예로운 직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빈집털이나 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매치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소매치기들은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어쩌구 저쩌구"
이 이야기의 소매치기는 순전히 소매치기의 쾌감을 위해서 뻣뻣한 가죽핸드백을 왼쪽어깨에 맨 최고난이도의 지갑에 도전했다가 잡혀서 콩밥을 6년이나 먹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소매치기의 기술을 과시하려는 즉 자기만족을 위해 안해도 될 모험을 한 거다.
우리가 소매치기의 악을 질타하기 앞서 빈집털이나 강도보다 훨씬 고상한(?) 직업인 소매치기에 경의를 표할 수 있을 때, 세상은 진정으로 평등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매매춘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말이다.(그렇다고 매매춘을 하는 남성을 교양인으로 인정해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조폭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매춘에 대해서도 연민의 시선은 거두어야 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국가의 잘못으로 해서 조폭이나 매매춘이 증가하는 건 안된다. 그러나 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부당한 참견은 옳지 않다. 매매춘여성들이 제일 재수없는 손님으로 여기고 소금뿌리는 사람은 대학교수다. 그들은 할거 다하면서 연민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 ☆ ☆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것.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몸을 버린 조폭의 구원은 영화 '친구'의 장동건처럼 멋지게 죽는 것이 구원이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고마해라" 이 말 한마디 남기고 죽는 것이 구원이다.
이미 몸을 버린 선화에게 구원은 어여쁜 부잣집 막내딸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매춘부들 세계에서 후배들이나 잘 챙겨주고 직업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XX경찰서 XX순경 X대가리를 통쾌하게 빠사버리는 것이 구원이다.
그녀는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굼벵이와 송충이, 개미와 나무껍질이 주식이다. 원숭이고기는 한달에 한번쯤 먹을 수 있는 별식이다.
그녀는 문명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천만에. 그녀는 완벽하게 적응했다. 행복했다.
그녀는 다시 원주민 생활로 돌아가서 행복했는가? 아니다. 죽을 고생이다. 불행했다.
그녀는 왜 보장된 행복을 버리고 불행 속으로 도피해 버렸을까? 이건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녀는 행복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행복이나 불행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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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감독의 영화는 관객이 안오는 걸로 유명하지만 『나쁜 남자』는 조짐이 다르다. 나쁜 남자를 경계하기 위해 여성들이 영화에서 나쁜 남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는 소문도 있다. 심지어는 페미니스트들이 나쁜 남자를 반대하기 위해 일단은 본다는 뜬금없는..
남자가 잘못된 길로 가면 조폭이 되고 여자가 잘못된 길로 가면 매매춘을 한다. 조폭이 범죄이듯 매매춘은 범죄다. 왜냐하면 법이 그러니까. 그러나 영화에서는 범죄자라고 차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좋다.
조폭영화를 보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듯이, 극 중의 창녀를 선악의 논리로 볼 필요는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관대해져 매매춘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고,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포스터를 박박 찢어버리면 여성평론가 강한섭씨다.
강한섭의 경우는 황당한 발언을 많이 한데다 조선일보의 시다바리.. 어쩌구 되어 유쾌하지 않다. 일단 대화가 안되는 사람이다. 페미니즘도 좋지만 우선은 대화가 되고 볼 일이다. 매매춘이라 해서 극중 주인공을 이상하게 본다면 잘못된 페미니즘이다.
조폭이 된 남자나 창녀가 된 여자나 도덕적 무게로는 동일하다. 더구나 극중에서는 도덕적인 잣대로 볼 필요가 없다. 물론 마초들의 남성판타지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유명영화제 진출작에 별하나반을 준 건 너무했다.
선화는 한기에게 납치당해서 강제로 창녀가 되었다. 즉 '나쁜 여자'가 된 것이다. 기 맥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한기는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이었다. 억울하기로 치자면 나쁜 놈으로 태어난 것은 나쁜 놈에게 납치당한 것 보다 더 기가 맥힌 사연이 된다. 졸라 억울하다.
쓰바 누구는 예쁜 공주님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처음부터 나쁜 넘으로 태어나고.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떤 사람은 장애자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못생긴 사람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그렇게 납치당한 것이다. 누구에게? 운명에게. 선화만 납치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납치당했다. 만약 그대가 장애자라면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신에게 납치당했다. 신을 원망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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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인류학자와 결혼해서 아들낳고 딸 낳고 15년 씩이나 살다가 아마존 정글로 돌아가버린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극 중의 선화가 한기를 떠나지 않는 심리를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길들여져서 포로가 되었다거나 이런 식으로 보아서 안된다. 이건 파이란류, 꽃섬류, 라이방류 서푼짜리 먹물영화와는 다르다. 그것들은 사이비다. 진짜가 아니다.
양아치의 꿈은 어떤 경우에도 양아치계에서 알아주는 근사한 양아치로 상승하는 거다. 영화 '친구'를 보자. 극중 장동건과 유오성은 이미 그쪽 세계에 발들 들여놓은 즉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을 밥먹듯이 한, 갈 때 까지 간 놈들이다.
이들에게 가치있는 삶은 '쪽팔리지 않는 것'이다. '빵에 간 선배들 옥바라지 잘하고 동생들 잘 먹여살리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에? 조폭세계에서 손을 씻고 선량힌 민주시민이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악당 조폭을 타도하고 조폭계의 스타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장동건에게 구원은 멋지게 죽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도루코를 죽였으니깐) 유오성에게 구원은 떳떳하게 감방을 가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친구를 죽였으니깐) 그렇게 조폭계의 전설로 남는 것이 구원이다.(자수하고 광명찾아 민주시민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즉 사회가 인정하는 규범과 가치를 떠나서 그들은 그들만의 어떤 가치를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역 노숙자들이 다 일거리가 없어서 그러는건 아니다. 3D업종에 취업할 곳은 많다. 구인난이다. 노숙에는 중독성이 있다. 노숙자의 목표는 완전히 망가져 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집도 있는데 노숙이 좋아서 서울역에서 자는 위장(?) 노숙자도 있다.
노숙자의 목표는 노숙계의 스타가 되는 것이다. 2호선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뻔뻔스럽게 오후 2시까지 자빠져 자는 넘이 스타다.
우리는 아마존으로 돌아간 원주민출신 여성을 이해할 수 없듯이 이런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행복의 논리도 아니고 선악의 잣대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미학의 논리다. 그런게 있다.
거꾸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선화가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가 길들여진 것이다. 행복한 삶, 고상하고 부유하고 안락한 삶이라는 미끼에 우리는 중독되고 길들여진 것이다. 한기와 선화는 동일한 한 사람의 두 모습이다. 한기가 선화다. 누가 누구를 납치하고 길들이는가? 나가 나를 납치하고 유폐하고 길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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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매매춘을 하는 직업여성이나 조폭이나 범죄자나 막노동자나 이런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저번에 읽은 어떤 글의 도입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런던 남동부 XXX가에서는 소매치기가 명예로운 직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빈집털이나 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매치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소매치기들은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어쩌구 저쩌구"
이 이야기의 소매치기는 순전히 소매치기의 쾌감을 위해서 뻣뻣한 가죽핸드백을 왼쪽어깨에 맨 최고난이도의 지갑에 도전했다가 잡혀서 콩밥을 6년이나 먹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소매치기의 기술을 과시하려는 즉 자기만족을 위해 안해도 될 모험을 한 거다.
우리가 소매치기의 악을 질타하기 앞서 빈집털이나 강도보다 훨씬 고상한(?) 직업인 소매치기에 경의를 표할 수 있을 때, 세상은 진정으로 평등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매매춘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말이다.(그렇다고 매매춘을 하는 남성을 교양인으로 인정해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조폭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매춘에 대해서도 연민의 시선은 거두어야 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국가의 잘못으로 해서 조폭이나 매매춘이 증가하는 건 안된다. 그러나 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부당한 참견은 옳지 않다. 매매춘여성들이 제일 재수없는 손님으로 여기고 소금뿌리는 사람은 대학교수다. 그들은 할거 다하면서 연민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 ☆ ☆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것.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몸을 버린 조폭의 구원은 영화 '친구'의 장동건처럼 멋지게 죽는 것이 구원이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고마해라" 이 말 한마디 남기고 죽는 것이 구원이다.
이미 몸을 버린 선화에게 구원은 어여쁜 부잣집 막내딸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매춘부들 세계에서 후배들이나 잘 챙겨주고 직업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XX경찰서 XX순경 X대가리를 통쾌하게 빠사버리는 것이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