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고는 훌륭한 영화이지만 마지막 한 방이 부족했다. 결국 사비망록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이구야! 말도 안돼! 사비망록이 없다면 속편은 어찌 찍으란 말이란 말이란 말인가?
몰라서들 그러시는데 사비망록은 있다. 사비망록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강호에 은거하던 무림고수들이 하나 둘씩 화산고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근데 정말로 사비망록이 없다면?
극장문 닫아야 한다! 그 영화 사기다. 진짜가 아니다.
진짜여야 한다. 진짜를 요구하는 거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과 화산고의 시나리오를 쓴 시나리오작가 아무개씨의 차이는 딱 그거다. 그것은 겨우 반걸음 정도의 거리다. 그 반걸음을 더 나아가느냐 머뭇거리다 주저앉고 마느냐에 있다.
사비망록이 없다고 말하는 그 허탈하고 쑥스러운 표정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와 이건 완전 뻥이야. 내가 생각해봐도 허풍이 심했어! 퍼하하하(최불암 표정으로)" 그러면서 얼굴이 뻘개져가지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
이거 안된다. '조앤 롤링'은 그런식으로 수줍어하지 않았다. 반걸음 더. 이야기는 계속된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마법학교를 졸업하려면 까맣게 멀었다. 그러나 화산고는 이미 졸업식을 하고 있다. 이래서 어째 던을 벌겠누?
벌자는 거다. 짭짤하게 남기자는 거다. 그러려면
"화산고는 거대한 농담이다"
이래서 안된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거 진짜인디..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더 들어볼래?"
이것이 정답이다. 당연히 사비망록은 있어야 하고 또다른 무림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 화산고의 피바람은 계속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강호의 혼란은 끝이 없다.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의 새가슴.. 반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막판에 주저않는 소극성.. 뻥을 베풀어놓고 스스로 쑥스러워하며 제 뒷통수를 긁는 못남. 안된다. 뭐가 쪽팔린다는 말인가?
'깨는 영화'라는 것은 거기서 반걸음 더 나아가는 영화를 말한다. 소설이라도 그러해야 할 것이며 영화라도 그러해야할 것이다. '주유소습격사건'에서 원래 시나리오는 일당들이 경찰에 검거되는 것이었다 한다.
김상진감독이 바꾼 것이다. 반걸음을 더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대박이 된 것이다. 바로 그거다. 반걸음 더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유소습격사건도 확실히 나아가지는 못했다. 구질구질하게 사인방의 과거 회고담을 늘어놓으며 하소연하고 있다. "나 이런 놈이여, 나 불쌍하지. 엉엉" 껄렁한 변명은 집어치라는 것이다.
주유소를 터는 데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 과거사를 늘어놓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있는 반항이어서 안된다.
엽기적인 그녀도 그렇다.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읍소하고 있다. "나 이런 여자여! 나 불쌍하지. 나 삐졌어. 동정해 조" 이거 안된다. 그래서는 엽기녀가 아니다.
만약 엽기토끼가
"나 과거에 말야. 어떤 곰한테 당했어. 엉엉! 그래서 절치부심 없는 실력을 연마하여 곰에게 복수하는 거여"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나온다면 누가 좋아허시겠는가?
구질구질하지 말자. 우리 더는 어린애가 아니지 않는가? 주유소 습격에는 이유가 없다. 엽기녀에겐 이유가 없다. 걍~ 그냥이다.
문제는 이러한 망설임, 변명하기, 삐치고 울면서 읍소하기, 이유 갖다대기가 한국영화, 문화, 소설, 드라마 일반의 뿌리깊은 고질병이라는 거다.
이제 좀 깨고 삽시다. 깨자는 거다. 이유 씩이나 필요한가? 얼어죽을!
필요한건 철학이다. 걍 마음의 감옥을 열고 탈옥이다. 이유는 없다.
최근 우리영화의 흥행기세는 '깨는 영화'의 등장 때문이다. 어떤 평론가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굳이 말하는 거다. 그러나 확실하게 깬 영화는 아직 없다.
예를 들자면 '킬러들의 수다'에서 주인공 일당들은 검찰에 범행을 들키고도 잡혀가지 않는다. 이게 깨는 거다. 여기에는 배짱이 필요하다.
조앤 롤링은 그 배짱이 좀 더 강했기 때문에 벌었고, 장진은 그 배짱이 좀 약해서 덜 벌은 거 뿐이다. 하여간 '킬러들의 수다'의 결말은 깨는 영화의 규칙에 맞다.
그렇지만 2프로 부족했다. 영화는 시종 낯간지러워 한다. 킬러들이 백주대낮에 서울 거리를 활보한다는 뻥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스스로 어색해 하는 장면이 무수히 포착된다. 다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겨우 면피한 것이다.
몰라서들 그러시는데 알고보면 킬러는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 시내 거리를 활보하며 암약하고들 있다. 심지어 어떤 킬러는 검찰청사를 들어가서 검사들과 러시안룰렛도 한다.
내공이 딴 것이 아니다. 뻥을 계속 밀고갈수 있느냐는 거다. 스스로 낯간지러워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느냐는 거다.
'이 부패한 사회를 야유하기 위해 킬러들을 이용한다'거나 '학원의 부패를 고발하기 위하 조폭을 활용한다'는 식의 핑계대기는 이미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그런 식의 걸고들어가기가 없어야 하는 거다.
킬러는 그냥 킬러다. 킬러가 부패한 사회상을 야유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에로영화가 홀딱벗는 걸 보여주고는 결말에 이렇게 섹스를 하던 주인공 일당은 벌을 받아 망했다는 식의 구역질나는 사족을 다는 것과 같다.
선데이서울이라 치자. 야한 기사를 선보인다. "요즘 음란채팅이 유행이라는데 어쩌구저쩌구 .." 근데 잘 나가다가 기사말미에 꼭 "이런 쳐죽일 년놈들이 있나, 독자여러분 이런거 하지 마세요". 이런 논평을 덧붙이는 거다. 요즘 스포츠신문도 그렇다.
"니가 더 쳐죽일 놈이다 스포츠신문 기자놈아"
야한 야그를 하면 그냥 야하게 끝내라는 거다. 목적은 야설이면서 도덕수업을 하시겠다고라? 또한 패죽여야 한다.
현재 스코어로 이런 막판 주저앉기의 고질병을 극복하고 확실하게 깨는 영화, 속속들이 깨는 영화,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영화나 소설은 이나라에 나와 본 적이 없다. 외국영화에는 많다.
당연히 좌파들이 전위에 서고 지식인들이 전위에 서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게 이놈의 같잖은 나라에는 장사꾼이 그나마 한몫을 하고있고 지식인이 제일 보수적이고 좌파들은 단연 보수의 왕초다.
그들은 깨기가 아니라 가두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고정관념과 편견의 벽을 높이고, 타성과 진부함과 관습의 기치를 높이 세우며, 되도록 주저앉고 설사하고 철푸덕 하고..
연민과 동정의 시선?.. 얼씨구 30년 우려먹은 그놈의 지긋지긋한 어둠의 자식놀음.. 구원을 빙자한 확인사살놀음 .. 패죽여야 한다.
김기덕이나 유승완이 그나마 깰 줄 아는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먹물세례에 덜 오염되었다는 거다.
따통꾼 안씨처럼 긴 칼을 휘두르며 변방에서 오는 자는 없는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눈에 대한 거다.
진짜는 있다. 가짜는 구분된다.
어떤 세계에서도.. 양아치든, 조폭이든, 노숙자든, 거지든 그 안에 미학적 자기완결성이 있다. 거지집단에도 두목이 있고, 졸개가 있고, 중간보스가 있으며 명예가 있고 자존심이 있다.
거지는 비참하지 않다. 거지에게도 명예와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거지가 비참해지는 순간은, 바깥사회와 접촉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편견과 오해와 무지와 맞닥드릴 때.
거지는 어떤 테크닉으로 시민의 지갑을 열어내느냐가 관건이며, 도둑에게는 또한 어떤 기술로 남의 집 대문을 따고 들어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대가 오늘은 어떻게 기안서를 올려서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느냐가 문제이듯이 말이다. 그 비참함의 무게는 동일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지나 양아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내부적인 미학적 자기완결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이며 밖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견해야 하는 것은 미학적 자기다움이다. 거지라면 가장 거지다운 거지, 완전한 거지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것은 김기덕감독이 말하는 끝까지 가보기와 같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세상 사람들이 만든 규칙은 무시된다. 중요한 것은 타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든 관계를 맺는데 성공하는가이다. 강간을 하든 폭력을 행사하던 어쨌던 간에.
영화 슈렉에서 초록괴물은 끝까지 초록괴물로 남아있다. 양아치의 승리는 양아치계에서 알아주는 완전한 양아치가 되는 것이다.
대접받는 양아치, 시선을 끄는 양아치, 어떤 양아치그룹을 찾아가더라도 공짜술 한잔은 떳떳하게 얻어먹는 양아치, 언제든지 좌중을 휘어잡으며 풀어낼 이야기보따리는 일발장전이 되어 있는 양아치 말이다.
패자로 낙인찍고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배신이다. 배신. 또한 패죽여야 한다.
"도둑질은 안돼! 그건 나쁜 짓이야"
이런 말은 신창원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했어야 한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의미없다. 우리는 단지
"왜 괴도루팡처럼 멋있게 훔치지 못했어?" 하고 따질 수 있을 뿐이다.
몰라서들 그러시는데 사비망록은 있다. 사비망록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강호에 은거하던 무림고수들이 하나 둘씩 화산고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근데 정말로 사비망록이 없다면?
극장문 닫아야 한다! 그 영화 사기다. 진짜가 아니다.
진짜여야 한다. 진짜를 요구하는 거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과 화산고의 시나리오를 쓴 시나리오작가 아무개씨의 차이는 딱 그거다. 그것은 겨우 반걸음 정도의 거리다. 그 반걸음을 더 나아가느냐 머뭇거리다 주저앉고 마느냐에 있다.
사비망록이 없다고 말하는 그 허탈하고 쑥스러운 표정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와 이건 완전 뻥이야. 내가 생각해봐도 허풍이 심했어! 퍼하하하(최불암 표정으로)" 그러면서 얼굴이 뻘개져가지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
이거 안된다. '조앤 롤링'은 그런식으로 수줍어하지 않았다. 반걸음 더. 이야기는 계속된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마법학교를 졸업하려면 까맣게 멀었다. 그러나 화산고는 이미 졸업식을 하고 있다. 이래서 어째 던을 벌겠누?
벌자는 거다. 짭짤하게 남기자는 거다. 그러려면
"화산고는 거대한 농담이다"
이래서 안된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거 진짜인디..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더 들어볼래?"
이것이 정답이다. 당연히 사비망록은 있어야 하고 또다른 무림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 화산고의 피바람은 계속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강호의 혼란은 끝이 없다.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의 새가슴.. 반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막판에 주저않는 소극성.. 뻥을 베풀어놓고 스스로 쑥스러워하며 제 뒷통수를 긁는 못남. 안된다. 뭐가 쪽팔린다는 말인가?
'깨는 영화'라는 것은 거기서 반걸음 더 나아가는 영화를 말한다. 소설이라도 그러해야 할 것이며 영화라도 그러해야할 것이다. '주유소습격사건'에서 원래 시나리오는 일당들이 경찰에 검거되는 것이었다 한다.
김상진감독이 바꾼 것이다. 반걸음을 더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대박이 된 것이다. 바로 그거다. 반걸음 더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유소습격사건도 확실히 나아가지는 못했다. 구질구질하게 사인방의 과거 회고담을 늘어놓으며 하소연하고 있다. "나 이런 놈이여, 나 불쌍하지. 엉엉" 껄렁한 변명은 집어치라는 것이다.
주유소를 터는 데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 과거사를 늘어놓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있는 반항이어서 안된다.
엽기적인 그녀도 그렇다.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읍소하고 있다. "나 이런 여자여! 나 불쌍하지. 나 삐졌어. 동정해 조" 이거 안된다. 그래서는 엽기녀가 아니다.
만약 엽기토끼가
"나 과거에 말야. 어떤 곰한테 당했어. 엉엉! 그래서 절치부심 없는 실력을 연마하여 곰에게 복수하는 거여"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나온다면 누가 좋아허시겠는가?
구질구질하지 말자. 우리 더는 어린애가 아니지 않는가? 주유소 습격에는 이유가 없다. 엽기녀에겐 이유가 없다. 걍~ 그냥이다.
문제는 이러한 망설임, 변명하기, 삐치고 울면서 읍소하기, 이유 갖다대기가 한국영화, 문화, 소설, 드라마 일반의 뿌리깊은 고질병이라는 거다.
이제 좀 깨고 삽시다. 깨자는 거다. 이유 씩이나 필요한가? 얼어죽을!
필요한건 철학이다. 걍 마음의 감옥을 열고 탈옥이다. 이유는 없다.
최근 우리영화의 흥행기세는 '깨는 영화'의 등장 때문이다. 어떤 평론가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굳이 말하는 거다. 그러나 확실하게 깬 영화는 아직 없다.
예를 들자면 '킬러들의 수다'에서 주인공 일당들은 검찰에 범행을 들키고도 잡혀가지 않는다. 이게 깨는 거다. 여기에는 배짱이 필요하다.
조앤 롤링은 그 배짱이 좀 더 강했기 때문에 벌었고, 장진은 그 배짱이 좀 약해서 덜 벌은 거 뿐이다. 하여간 '킬러들의 수다'의 결말은 깨는 영화의 규칙에 맞다.
그렇지만 2프로 부족했다. 영화는 시종 낯간지러워 한다. 킬러들이 백주대낮에 서울 거리를 활보한다는 뻥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스스로 어색해 하는 장면이 무수히 포착된다. 다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겨우 면피한 것이다.
몰라서들 그러시는데 알고보면 킬러는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 시내 거리를 활보하며 암약하고들 있다. 심지어 어떤 킬러는 검찰청사를 들어가서 검사들과 러시안룰렛도 한다.
내공이 딴 것이 아니다. 뻥을 계속 밀고갈수 있느냐는 거다. 스스로 낯간지러워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느냐는 거다.
'이 부패한 사회를 야유하기 위해 킬러들을 이용한다'거나 '학원의 부패를 고발하기 위하 조폭을 활용한다'는 식의 핑계대기는 이미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그런 식의 걸고들어가기가 없어야 하는 거다.
킬러는 그냥 킬러다. 킬러가 부패한 사회상을 야유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에로영화가 홀딱벗는 걸 보여주고는 결말에 이렇게 섹스를 하던 주인공 일당은 벌을 받아 망했다는 식의 구역질나는 사족을 다는 것과 같다.
선데이서울이라 치자. 야한 기사를 선보인다. "요즘 음란채팅이 유행이라는데 어쩌구저쩌구 .." 근데 잘 나가다가 기사말미에 꼭 "이런 쳐죽일 년놈들이 있나, 독자여러분 이런거 하지 마세요". 이런 논평을 덧붙이는 거다. 요즘 스포츠신문도 그렇다.
"니가 더 쳐죽일 놈이다 스포츠신문 기자놈아"
야한 야그를 하면 그냥 야하게 끝내라는 거다. 목적은 야설이면서 도덕수업을 하시겠다고라? 또한 패죽여야 한다.
현재 스코어로 이런 막판 주저앉기의 고질병을 극복하고 확실하게 깨는 영화, 속속들이 깨는 영화,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영화나 소설은 이나라에 나와 본 적이 없다. 외국영화에는 많다.
당연히 좌파들이 전위에 서고 지식인들이 전위에 서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게 이놈의 같잖은 나라에는 장사꾼이 그나마 한몫을 하고있고 지식인이 제일 보수적이고 좌파들은 단연 보수의 왕초다.
그들은 깨기가 아니라 가두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고정관념과 편견의 벽을 높이고, 타성과 진부함과 관습의 기치를 높이 세우며, 되도록 주저앉고 설사하고 철푸덕 하고..
연민과 동정의 시선?.. 얼씨구 30년 우려먹은 그놈의 지긋지긋한 어둠의 자식놀음.. 구원을 빙자한 확인사살놀음 .. 패죽여야 한다.
김기덕이나 유승완이 그나마 깰 줄 아는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먹물세례에 덜 오염되었다는 거다.
따통꾼 안씨처럼 긴 칼을 휘두르며 변방에서 오는 자는 없는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눈에 대한 거다.
진짜는 있다. 가짜는 구분된다.
어떤 세계에서도.. 양아치든, 조폭이든, 노숙자든, 거지든 그 안에 미학적 자기완결성이 있다. 거지집단에도 두목이 있고, 졸개가 있고, 중간보스가 있으며 명예가 있고 자존심이 있다.
거지는 비참하지 않다. 거지에게도 명예와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거지가 비참해지는 순간은, 바깥사회와 접촉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편견과 오해와 무지와 맞닥드릴 때.
거지는 어떤 테크닉으로 시민의 지갑을 열어내느냐가 관건이며, 도둑에게는 또한 어떤 기술로 남의 집 대문을 따고 들어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대가 오늘은 어떻게 기안서를 올려서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느냐가 문제이듯이 말이다. 그 비참함의 무게는 동일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지나 양아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내부적인 미학적 자기완결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이며 밖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견해야 하는 것은 미학적 자기다움이다. 거지라면 가장 거지다운 거지, 완전한 거지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것은 김기덕감독이 말하는 끝까지 가보기와 같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세상 사람들이 만든 규칙은 무시된다. 중요한 것은 타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든 관계를 맺는데 성공하는가이다. 강간을 하든 폭력을 행사하던 어쨌던 간에.
영화 슈렉에서 초록괴물은 끝까지 초록괴물로 남아있다. 양아치의 승리는 양아치계에서 알아주는 완전한 양아치가 되는 것이다.
대접받는 양아치, 시선을 끄는 양아치, 어떤 양아치그룹을 찾아가더라도 공짜술 한잔은 떳떳하게 얻어먹는 양아치, 언제든지 좌중을 휘어잡으며 풀어낼 이야기보따리는 일발장전이 되어 있는 양아치 말이다.
패자로 낙인찍고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배신이다. 배신. 또한 패죽여야 한다.
"도둑질은 안돼! 그건 나쁜 짓이야"
이런 말은 신창원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했어야 한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의미없다. 우리는 단지
"왜 괴도루팡처럼 멋있게 훔치지 못했어?" 하고 따질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