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read 3714 vote 0 2002.09.14 (15:51:53)

와,나,라,고의 분투에 박수를 보내면서 왜 우리는 늘 이렇게 지고만 살아야 하는지 반성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

다른건 그렇다 쳐도 '라이방'은 너무했다. 영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성공사례들을 수집하고 성공하는 이유를 분석한다. 모든 성공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좋은 것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이 없고, 성공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다. 성공과 실패는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이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거다. 근데 하는 짓들을 보면 오직 예정된 실패의 외길로만 가는 것이다.

한겨레도 딴지일보도 오마이뉴스도 성공할 수 있다. 좌파도 돈 벌 수 있고 진보도 대박을 낼 수 있다. 하여간 실패가 자랑거리는 아니다. 성공은 매우 쉽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서세원이도 하는 것이 성공이 아닌가 말이다.

씨네21의 오은하 아줌마는 올해 자신의 흥행예측이 한결같이 빗나갔다고 썼다. 반은 농담이겠지만 '파이란'이 성공할걸로 예측했다는건 좀 심했다. '파이란'과 '라이방'의 공통점은? 제목이 세 글자이다.

"세 글자는 안된다고 내 그마이 안캤나?"

파이란? 라이방? 애초에 관객무시다. '볼테면 봐라. 싫음 말고' 하는 똥배짱이다. 제목을 세 글자로 지으면 필망이다. '애니깽', '세친구'의 악몽을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몇 자가 적당한고?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이 다섯 자들이 중박이 된다.

왜 제목을 다섯 자로 지을까? 제목이 다섯자라면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일단 무게 빼고 가볍게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무게 잔뜩 들어가면?

두 자다. 제목을 두 자로 짓는다는 것은 초대박을 터뜨리겠다는 야심의 표시다. 그리하여 초대박을 터뜨린 경우는?

쉬리, 친구, 무사(무사는 911테러 때문에 맛이 갔지만 그래도 제작자는 초대박을 노리고 지은 제목이다.)

제목이 두 글자라면, 엄청난 돈과 스타시스템과 물량작전이 들어간 영화라는 거다. 안보면 패죽이겠다는 기세로 쳐들어간다는 암시다. 이건 그냥 관객의 목덜미를 잡고 극장 문안으로 밀어넣겠다는 공갈에 해당한다.

"스타시스템에, 블록버스터에, 2시간 30분짜리 대작에 이래도 안볼래? 안보면 주거!(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 대며)"

하여간 제목을 두 글자로 뽑으면 관객은 쫄아서라도 봐줘야 한다.

7자나 8자의 긴 제목도 있다. 긴 제목은 내용이 가벼우면서도 상당한 예술성이 가미되어 있다는 암시다. '인정사정 볼것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킬러들의 수다.. 시의 한 구절처럼 4.3조 혹은 4.4조의 운율이 있다.

예술성과 위트로 포장하고 있는 근사한 단편(단편영화가 아니라 단편소설에 해당하는 짧은 에피소드)들이다.

치명적으로 제목을 세 글자로 정했다면.

이 경우 두 갈래로 갈라진다. 흑수선, 화산고, 반칙왕 처럼 대박을 노리기는 하는데 준대박으로 목표를 살짝 낮춘 경우가 첫째.

애니깽, 세친구, 라이방.. 이건 뭐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도 아니니까 보지마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장난하자는 거다. 패죽여야 된다.

하여간 제목만 보고서도 그 영화가 무엇을 노리는지 대충 알수 있다. 정리하자.

두 글자 - 장편소설, 스타시스템, 초대박을 노림. 압도적인 힘의 영화.

세 글자 - 중편소설, 준스타시스템, 중박을 노림, 약간 힘이 들어간 영화

다섯 자 - 단편소설, 상업영화, 코믹물, 힘을 완전히 뺀 오락영화.

일곱 자 - 단편소설, 예술성을 가미한 작가주의 영화, 장르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특정 관객층의 취향을 노리는 틈새영화,

저예산영화가 세 글자로 제목을 짓는다는 것이 '나 죽여줍쇼' 하는 격이 되는 이유는, 원래 세 글자는 장편에 가까운 중편에, 준스타시스템에 약간 힘이 들어간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장편이면 아예 2시간 30분 이상을 해야지 어정쩡하게 2시간쯤 한다. 스타시스템을 하려면 스타를 몽땅 투입해야지 스타는 한 명 밖에 없다. 힘이 들어가면 '쉬리' 만큼 잔뜩 인상을 써야지, 힘을 넣은 것도 아니고 뺀 것도 아니고 우물쭈물한다. 어정쩡하게 되기 십상이다. 꼭 비천무처럼.

도대체 내용이 장편소설도 아니고, 스타시스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블록버스터를 하는 것도 아닌 '파이란'이나 '라이방'이 제목을 세 글자로 하겠다는 것은 무슨 똥배짱인가 말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패죽여야 된다.

물론 세 글자라고 다 안되는 것은 아니다. '화산고'는 낫다. 화산고는 스토리의 성격상 장편도 단편도 아닌 중편이 되고, 스타를 쓰되 스타범벅은 아니고, 힘을 넣을 때는 넣되 또 힘을 뺄 때는 뺀다. 적절하게 코믹하다.

흑수선도 그만하면 세 글자 제목의 규칙에 맞다. 반칙왕도 그렇다. 영화의 내용과 타킷과 제목의 길이가 적절히 일치한다.(따지기로 하면 흑수선은 두 글자가 맞다. 원작이 장편이니까. 그러나 대충 맞다고 본다.)

하여간 제목의 길이가 짧을수록, 또 제목이 고유명사에 가까울수록 더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갈수록 장편에 스타시스템이어야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이런 작가주의 영화들이 흥행을 기대했다면 반드시 7자나 8자 이상의 긴 제목을 지었어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인정사정 볼것없다'. '킬러들의 수다', '주유소 습격사건'. 좋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장르적인 특성이 강한 작가주의영화라는 점이다. 특정 마니아 층을 겨냥하고 있다는 거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는 4.4조나 4.3조의 운율과 댓구를 넣어주어야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건 댓구가 들어간 경우다.
'인정사정 볼것없다.' 이건 4.4조의 운을 맞추고 있다. 정형시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제목은 이래야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 이건 댓구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운이 있기는 한데 잘 맞지 않다. 그런대로 작가주의영화의 규칙에는 맞다.

'킬러들의 수다' 장진감독이나 '인정사정 볼것없다'의 이명세감독이나 한 작가씩 하는 감독들이다. 그럴듯한 제목을 붙였고 적절하게 객석을 메웠다. 이건 되는 그림이다.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나름대로 운율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고양이는 4.3조의 운이 약하고, 와이키키는 외국어라서 4.4조가 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주 잘못지은 제목은 아니다. 그러나 '라이방' 이거는 패죽여야 한다.

도대체 지가 무슨 '화산고'에 '흑수선'이라고 제목을 3자로 붙여! 고얀! 치도곤을 앵길!

특히 '고양이를 부탁해'는 개봉시기도 나빴지만 홍보가 잘못되었다. 관객층을 잘못 찍은 것이다. 20대를 겨냥한 아줌마의 회고영화? 헛발질이다.

'친구'의 경우를 보자. 30~40대의 향수를 자극하고 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뒷문으로 10대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고양이는 반대다. 3~40대 아줌마 아저씨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인데도 10대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획으로 간다. 까꿀로 된 것이다.

10대들은 향수가 없어서 안보고, 30대들은 10대들이나 보는 영화로 착각해서 안본다. 그럼 누가보리?

'친구'는 아저씨들 보라고 만들었는데 고등학생이 아버지 주민등록증 훔쳐들고 몰려왔다. 고양이는 10대들 보라고 만들었는데 늙다리 조영남아저씨가 보러왔다. 기획과 홍보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애니깽', '라이방' 이건 뜻도 모를 영어로 제목을 지으면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주고 있다.

물론 중요한건 제목이 꼭 두 글자냐 세 글자냐 영어냐 우리말이냐가 아니라 한번 더 생각하게 꺽어지며 암유하는 것이 있느냐이다.

'조폭마누라' 제목만으로 금메달감이다. '조폭의 마누라'가 아니고 마누라가 조폭이라고?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신라의 달밤'은 확실하게 필이 안와서 걱정을 좀 했는데 뜻밖에 고도 경주와 조폭 - 전혀 맞지 않는 커플의 앙상블이 그런대로 되었다. 잘 생각해 보면 뭔가 있다.

그렇다. 부조화의 조화다. 킬러들이 수다를 떤다? 수다는 여성들이나 떠는 것이다. 그런데 킬러라? 그렇다면 뭔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애니깽이나 라이방은? 아무런 암유도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뭐도 없다. 필이 안온다. 메타포가 있어야 한다.

화산고? 화산이라면 무협지 화산논검 아닌가? 동악태산 서악화산 하는 거. 근데 고등학교라고라고라? 이것 역시 부조화의 앙상블이다.

앙상블 - 그것은 콜라와 햄버거처럼 역할이 다른 두가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다.

햄버거와 호빵? 이건 앙상블이 아니다. 콜라와 맥주 이것도 아니다. 궁합이 있는 것이다. 앙상블이란 남자와 여자처럼 대칭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둘로 쪼개져서 댓구를 이루어야 한다.

반칙왕도 세 글자이지만 좋다. 반칙이면 나쁜건데 선한 주인공이니까 역설이 된다. 한번 생각하게 한다. 뭔가 필이 온다.

제목이 세 글자에다, 한 술 더 떠 알 수 없는 영어제목이라면 아무런 암유하는 것이 없다. 뭔가 암유가 있다해도 이해가 안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뭔가 암시하는 듯 하지만 관객들은 그 암시를 받지 못한 것이다.

라이방->레이 밴, 애니깽->용설란이다. 뭔가 있다?. 있기는 개뿔! 암것도 없다. 또한 감상해 보자.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게 몬데?"
"수안보 와이키키호텔이래"
"어 그래"

춥다. 썰렁하다.

"흑수선? 그게 몬데?"
"검은 수선화래. 그 여자주인공의 암호명이쥐"
"근데 세상에 검은 수선화도 있나?
"있대나 봐"

흑수선도 뭐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와이키키보다는 낫다. 제목은 뭔가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고,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방아쇠역할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수선이 암호명이고 검은 수선화꽃을 뜻한다고? 그렇다면 여간첩이 등장하는 첩보영화 아냐?"

벌써 뭔가 주거니 받거니 수작이 되어가는 것이다. 관객이 홀려온다.

그러나 '무사', '친구' 이건 뭐 수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이런 경우는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작영화이거나 '나비' '꽃섬'처럼 조또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다.

제목이 짧다는 것은 블록버스터로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며 그만큼 홍보비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처럼 제목이 길다는 것은 홍보비를 덜 쓰는 대신 제목으로 홍보를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꽃섬'이나 '나비'처럼 제목이 딱 두자이면서 대작영화도 아니고 글타고 홍보비를 디립다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강원도의 힘', '오! 수정'처럼 요상한 제목으로 헛갈리게 해서 호객하는 것도 아닌 영화는? 걍 자살이지 뭐. 역시 패죽여야 함.

마지막으로 딱 한 자로 된 제목은?

김기덕의 '섬'
배창호의 '정'

이건 제목이 너무 짧기 때문에 반드시 감독이름을 앞에 붙여야 한다.

그냥 '섬', '정' 하면 이게 영화제목인지 아닌지 알수가 없다. 고로 이런 영화는 유명영화제 수상을 노린 '감독의 영화'인 것이다. 온다면 감독의 명성보고 온다.

'꽃섬'이나 '나비'가 블록버스터도 아닌 주제에 블록버스터들이 사용하는 두 자 짜리 제목을 붙였다는 것은 관객을 포기했다는 증거다. 이 경우 엄청난 내공이 있던지 철푸덕 설사이든지 둘 중에 하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홍상수는 그래도 겸손하다. 나름대로 제목에 댓구가 있고 운이 있다. 다 잘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눈길은 한번 끌어보겠다는 거다.

이런 홍상수류의 눈길끌기 제목으로 아주 잘 지은 경우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제목만으로 중박이다. 작명원리는 홍상수의 경우와 같다. 다만 홍상수보다 제목을 잘 지었다. '생활의 발견'은 걱정된다. 넘 생뚱맞아서리.

제목을 세 자로 지어 쪽박을 찼을 경우 비난 받아야 하는 이유는 1초도 생각해보지 않고 무성의하게 지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댓구도 없고, 암유도 없으며, 운율도 엄꼬, 홍상수식 생뚱도 없으며 거기에다 블록버스터들만 사용하도록 헌법에 다 정해져 있는 고유명사를 사용했다면 여러 말이 필요없다. 걍 패죽여야 한다.

한술 더 떠 뜻도 모를 외국어에 한 단어로 되어 있다면. 능지처참이 가하리오다.

저예산영화에는 저예산의 규칙이 있다. 문제는 그러한 규칙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관객을 탓한다는 거다.

규칙 1) 저예산의 목숨은 코미디다. 무조건 웃길 것

규칙 2) 저예산은 단편이다. 단편의 생명은 반전, 극적 반전으로 승부할 것.

규칙 3) 저예산은 컬트다. 특정 마니아층을 겨냥하여 장르적 특성을 극대화 할 것.

특히 규칙 2)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저예산으로 장편소설을 영상에 담는 것은 미친 짓이다. 단편소설의 생명은 메멘토 식의 반전에 있다. 그럴듯한 반전도 없는 주제에 저예산으로 찍겠다면 또한 패죽여야 한다.

코미디야 말로 저예산의 유일한 비빌언덕이다. 공연히 코미디를 비웃는 지적 오만, 허위의식은 또한 패죽여야 한다.

사실은 저예산영화가 다 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 저예산으로 가려다가 이거 아무래도 뜰거 같으니까, 자본이 달라붙고 그러면 홍보비를 더 많이 쓰게 되고, 그래서 저예산이 아닌 것으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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