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역설'의 예 달착륙 음모론의 핵심주장은 둘이다. 첫째 낮인데 별이 안 보인다는 점. 둘째 깃발이 펄럭이는 것처럼 착시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둘은 모순된다. 별이 안 보이는건 낮이기 때문이고, 낮인데 밤으로 착각되는 것은 대기가 없기 때문이다. 깃발이 펄럭인다면 대기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지적이 옳다면 대기가 있는 것이고 대기가 있으면 하늘이 검게 보일 수 없다. 음모론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해버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미 입증되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대화상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식적인 대화상대가 아니다. 대화상대가 아니므로 그들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썩 꺼져!’ 이렇게 된다. 이중의 역설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다양한 팩트를 일일이 반박하는게 아니라, 원초적인 전제가 되는 상대방의 대화할 자격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사실을 치는게 아니라 전제를 친다. 사실을 쳐봤자 급조한 다른 사실로 돌려막기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의미없다. 첫 번째 역설은 관점을 보고, 두 번째 역설은 에너지를 본다. 관점은 하늘이 검으니까 밤이라고 착각했는데 그게 사실은 낮이더라는 것이다. 이는 거울의 좌우가 바뀌어 보이듯이, 대기의 유무에 따라 밤낮의 컬러가 바뀌어보인 것이다. 두 번째 역설은 에너지인데 이는 지식의 공급자 자격이 있느냐다. 자기 주장이 모순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지식의 공급자 포지션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발언권이 없다. 에너지가 없다. 자격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음모론자들이 스스로 증명하지 않고, '니가 증명해서 나를 납득시켜봐라' 하는 식의 수동적 포지션을 취한다는 점이다. 수동으로 가는즉 이미 아웃이다. 왜냐하면 납득할만한 증거를 제시해도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상대방의 지능이 떨어지면 논쟁이 끝이 안 나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언권이 있는 것이며 지식의 공급자 포지션이 되고 아는 사람간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자가 증명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권리의 갑을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니가 증명해서 나를 납득시켜봐라'고 요구하는 즉 이미 강아지가 꼬리를 내린 것이며, 지식에 있어서의 복종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종해야 한다. 말하자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 같은 지식의 주종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종을 안 한다. 이건 반칙이다. 재판을 신청한 자가 판결을 수용할 의무를 지니듯이, 요구한 자가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 복종하지 않으면 배반이다. 이는 지식영역 안에서 작동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다. 원칙을 깨는 자는 자동으로 퇴장된다. 왜냐하면 지식의 공급자가 공급하지 않아 대화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의 에너지 법칙이므로 따라야 한다.
그런데 달착륙 음모론은 많은 세월이 흘러서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 왜 당시에는 묻혔던 주장이 많은 세월이 흐르고서야 뒤늦게 히트를 쳤을까? 51구역의 로스웰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웃어넘기던 일이 많은 세월이 흐르고서야 낱낱의 에피소드들이 퍼즐조각 맞추듯이 맞춰져서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된다. 당시에는 너무나 많은 음모론을 반박할 증거가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잊어먹었을까? 나사에는 아직도 많은 데이터가 쌓여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잊은 자는 음모론자들이다. 자기가 까먹어놓고 그걸 근거로 투덜대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니까 니가 틀렸다는 식이다. 증거가 없는게 아니고 지능이 떨어지는 음모론자들이 잊어먹은 거다. 그 와중에 헛소리를 하다가 창피를 당한 음모론자는 빠져나가고 새로운 음모론자는 꾸준히 공급된다. 인물이 교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그들은 로스웰 사건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모론의 생명은 질기다. 문제는 많은 세월이 흐르면 음모론에 반박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거다. 지적인 비용증가다. 발언권을 가진 자와 복종할 의무를 가진 자의 권리체계를 새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대화상대가 되는지 전혀 아닌지 새로 말을 맞춰봐야 한다. 시간이 남아도는 음모론자는 그러한 지적 의사결정비용의 증가를 노린다. 상대방의 시간비용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쓴다. 영화 국제시장도 거짓말투성이지만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일일이 반박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예부터 해가 지면 귀신이 날뛰고, 세월이 흐르면 거짓말이 날뛴다고 한 것이다. 박정희도 당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선거때마다 지니까 유정회를 만드는 꼼수를 부리다가 세계적으로 창피를 당했다. 세월이 흐르면 대기는 거짓말하기 좋은 말랑말랑한 상태가 된다. 판타지를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논쟁의 지렛대를 얻어 반격하려는 것이다. 그 지렛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상관없다. 지렛대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박정희를 부정하는 힘이 커지면 그 힘에 대항하는 힘도 같이 커지는 것은 대칭원리다. 결론은 노무현의 인기가 박정희 유령을 호출했다는 거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관점입니다. 관점은 각자에게 고유하며 저작권처럼 개인에게 전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관점이 재산입니다. 승부는 구체적인 사실에서 나는게 아니라, 전제가 되는 관점에서 납니다. '감동은 영화의 적이다'는 필자의 표현은 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미료는 요리의 적입니다. 물론 우리는 조미료 없는 음식을 먹기가 힘들죠. 그러나 아는 사람이라면, 일단 조미료 넣은 요리는 안 쳐줍니다. 뽕짝은 음악의 적이죠.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미료 없는 요리를 먹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요리가 진보하는 방향은 조미료를 극복해가는 방향이며, 영화가 진보하는 방향은 감동을 극복해가는 방향입니다. 조미료 대신에 사골을 고아 육수를 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세계에서는 소스도 안 쳐주는 겁니다. 소스를 왕창 쓰면 그게 중국요리죠. 소스를 함부로 쓰는 중국요리는 원초적으로 아웃입니다. 물론 높은 영역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소스도 당연히 써야 하지만 진보의 방향은 그렇습니다. 더 높은 세계로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방향을 아는 자가 관점을 얻고, 그 고유한 관점에서 발언권이 주어집니다. 관점을 얻었을 때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상관없이 무대에 올라 한 곡조 뽑을 자격이 획득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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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소.
강제하다뇨?
이 원리는 이미 통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을 제가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 뿐입니다.
시를 어떻게 쓰는가 소설을 어떻게 짓는가 이런건 다 아는 겁니다.
시인들이 알고 소설가들이 알죠.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망생들이 한 수 배우러 오면 그냥 열심히 써봐 하는 식이죠.
혹은 스승의 글을 그대로 베껴 써보라고 하는 멍청이도 있죠.
알지만 체계적으로 아는게 아닌 것을 제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결론은 노무현의 인기가 박정희 유령을 호출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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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단하시네요. 또 배우고 갑니다.
이다 있다 같다 옳다 맞다
이런식으로 단어 하나 하나에도 위계질서가 있지요.
언어의 질서가 잡혀야죠.
근데, 이걸 강제할 수단에 대해 얘기 하는 것인지요?
이 원리가 온세상에 통하려면 그 바탕은 무엇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