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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098 vote 0 2009.10.01 (01:10:57)


과학을 보내고 미학을 맞이한다.
‘지난 28일자 아카데미 동영상 강의 해설입니다.’

 

왜 과학과 미학을 구분하는가?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은 센터가 하나라서 전체의 힘을 한 곳에 결집시키지만 미학은 센터가 분산되어 있어서 한 곳의 성공을 전체에 전파한다. 이건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자 작동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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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시대는 끝났다. 미학의 시대는 왔다. 과학은 집을 짓는 것이고, 미학은 그 집에서 사는 것이다. 과학이 자동차의 제조라면 미학은 자동차의 운행이다. 인류문명의 발전단계가 있다.

누가 시대의 혁신을 주도하는가이다. 과학시대에 문명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만드는 생산자, 공급자가 혁신을 주도한다. 미학시대에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소비자, 수요자가 혁신을 주도한다.

자동차 제조기술이 혁신을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자동차 여행문화가 혁신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문명의 사이클이 있다. 15세기~18세기는 발견의 시대였다.

지리상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바이러스의 발견, 뉴튼 역학의 발견 등 일련의 위대한 발견들이 인류문명의 거대한 진보를 촉발했다. 19세기~20세기는 발명과 산업의 시대였다.

인류의 삶을 토대부터 흔들어 놓을 거대발명은 나올만큼 나왔다. 산업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조건을 충족시켰다. 더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삶의 시대, 문화의 시대, 미학의 시대이다.

구조론의 학문분류

학문은 기본적으로 ‘미학’과 ‘과학’으로 대별된다. 여기서 말하는 미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 좁게 해석하거나, 혹은 미술과 혼동해서 안 된다는 말이다. 구조론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존재는 곧 사건이다. 사건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작용이다. 학문의 주체는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이다. 대상은 자연과 그 자연의 에너지다. 학문은 첫째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을 탐구한다.

둘째 인간이 다루는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그 자연의 속성인 에너지를 다룬다. 이는 문과와 이과, 혹은 인문학과 자연학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 문과, 인문학은 인간을 다루고 이과, 자연학은 대상을 다룬다.

● 주체- 인간, 가치, 문화
● 대상- 자연, 에너지, 산업

문명은 이 둘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동차가 진보하는 만큼 그 자동차의 운전기술도 진보되어야 한다. 건축이 발달하는 만큼 그 건물에 깃들어 사는 인간의 주거문화도 세련되어져야 한다.

조선시대의 선비문화라면 인간과 가치에 주목한 데 비해, 그 반대편의 자연과 에너지에 대해서는 소홀하였다. 반면 서구는 자연과 에너지를 탐구하였으나 인간과 가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밸런스는 무너졌다.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는 다시 눈을 돌려 인간과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들어 두드러진 아시아의 경제적 급성장은 이유가 있다. 인문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장이다.

지난 수천년 아시아인의 유가적, 도가적, 불가적 탐색이 전혀 헛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밸런스를 구성하는 두 날개 중 하나의 결핍이 포착되었을 때 그 낙차를 메우는 급성장은 일어난다.

적어도 아시아의 인문적 전통이 성장의 동기부여에 기여하고 있다. 성장의 토대가 되는 신뢰구축에 기여하고 있다. 서구가 혁명 등을 통하여 300년간 갈등하여 이루어낸 것을 급속하게 따라잡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인류는 밸런스의 붕괴징후를 포착하고 있다. 산업이 한 걸음 전진하였으므로 문화도 한 걸음 전진해야 한다. 이러한 문명의 밸런스를 미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은 미(美) 뿐이고, 그 미에 다가갈 방법은 힘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가치도 인간에게 직접 수용될 때는 미를 거치고, 인간에서 인간으로 건너뛸 때는 힘을 거친다.

인간에게는 미, 자연에는 힘 오직 이 둘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 없다. 우선순위로 말하면 미가 앞선다. 미는 직접적이다. 몸과 접촉한다. 몸에 좋다. 이롭다. 힘은 절차를 거친다. 힘은 도구를 통과한다.

힘에 대해서는 충분히 탐구되었다. 18세기의 발견과 20세기의 발명은 힘과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 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 인류의 문명은 여전히 세련되지 못하다.

● 미학 - 문과, 인문학
● 과학 - 이과, 자연학

인문학으로 말하면 철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줄에 꿰어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미학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학은 과학과 대비시킨 바 넓은 의미에서의 미학이다. 인문학 전체를 총괄하는 의미에서의 미학이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사학이든 언어학이든 종교학이든 최종적으로 미학에 의해 완성된다.

미학은 '양식의 완성도'를 따지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공론과 평판과 안목으로 집단지성을 형성하여 문화적 양식의 완성도를 제고하는데 미학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로 가능하다.

모든 창의는 완전성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데서 얻어진다. ‘완성된 모습은 이런 것이다’ 하는 비전이 중요하다. 자동차라면 ‘진정한 자동차는 이런 차라야 한다’는 컨셉이 그 자동차의 디자인 방향을 결정한다.

스티브 잡스가 ‘진정한 컴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었듯이. 철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인문학이 난맥에 빠진 것은 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래 미학적 깨달음에 의해 접근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면 실존주의가 알려져 있지만 역시 '삶의 양식에 있어서의 완성도'를 논하는 것이다. 문학 역시 결말부분의 완성도 문제가 걸려 있다.

역사학이나 고고학 역시 ‘역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역사철학이 중요하고, 그것은 '인류문명의 시대별 완성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완성도의 평가 문제가 역사학의 핵심이 된다.

종교학 역시 그러하다.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무식하기 짝이 없는 종교가 번성하는 이유는 과학이 ‘삶의 양식이라는 본질 문제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답할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그 대답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정답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답은 미학적 완성이다. 저 강퍅한 산업의 완력 앞에서 교착되었을 때 미학적 돌파구를 열어가야 한다.

여성학 역시 미학적 완성의 의미가 창조의 ‘낳음'에 있다면 낳는건 여성이다. 완성되면 통하고 통하면 낳는다. 낳으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망라한다. 그 외에 예술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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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제조할 때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조립되어야 할 부품은 미완성의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통짜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자동차가 하나의 통짜 쇳덩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은 부분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미학은 통짜로 된 인식이 필요하다. 덩어리 개념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컨셉이다. 개념이다. 완전성의 이해로 가능하다. 완전과 불완전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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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부분의 조립>전체의 건설, 구성..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한 채의 큰 집을 짓는다.

미학- 개인의 완성>전체로 전파, 증폭.. 한 사람이 멋진 집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이를 본받아 따라짓는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미학은 개인의 완성을 전제로, 완성된 개인의 수평적인 연대를 통한 공론의 창출, 평판의 형성, 안목의 제고를 통한 집단지성의 형성을 통하여 전체의 완성을 추구한다.

그 완성된 전체는 문화의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 완성된 개인의 수평적인 연대를 위한 코드는 가치의 공유를 통하여 얻어진다. 개인의 완성을 집단의 완성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미학이다.

노무현 한 사람의 완성을 우리 모두의 완성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문화다. 자동차의 제조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지만 자동차의 운전은 한 사람이 완성하고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미학적 완전성의 이해를 통한 깨달음≫개인의 완성≫가치의 공유를 통한 수평적 연대≫공론과 평판, 안목을 통한 집단지성의 형성≫문화적 양식의 완성을 통한 집단의 완성.

한국 여성의 옷입는 맵시도 근원을 따져보면 동대문에서 옷장사 하는 몇몇 사람의 안목이 결정한다. 그것이 전파되어 전체적인 트렌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전파의 속도가 21세기의 승부를 결정한다.

문화적 동기부여≫의사소통≫의사결집≫의사결정≫의사집행의 메커니즘을 구축하여 내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인터넷으로, 미디어로, 입소문으로, 민주주의로, 자유의 공기로, 개인의 깨달음으로 가능하다.

과학은 모방한다.
미학은 전복이다.
미학은 인간해방이다.
미학은 자기완성이다.
미학은 실용성을 배제한다.
미학은 안목이고 과학은 기술이다.
미학은 ‘의하여’ 과학은 ‘위하여’다.
미학은 존재론, 과학은 인식론이다.
과학은 집을 짓고, 미학은 그 집에서 산다.
미학이 개인의 창조, 과학은 집단적 모방이다.
미학은 돈오돈수, 과학은 점오점수다.
과학은 실용성이 중요하고 미학은 완전성이 중요하다.

과학은 밖에서 도구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치고 미학은 내부에서 동기와 열정을 끌어낸다.

동대문 옷장사는 옷 만드는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옷을 알아보는 안목을 판다. 기술을 가르치는 시대 끝내고 내 안에서 창조성을 끌어내는 시대가 왔다. 기술보다 안목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인터넷 쇼핑몰만 봐도 알 수 있다. 안목만 있으면 여고생도 거액을 벌 수 있다. 그 시대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안목이 타고난 감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미학 역시 훈련되어야 한다.

미학은 어떤 일을 독립적으로 완성시켜 본 경험, 그 일의 전체과정에 두루 참여해 본 경험이 중요하다. 일이 진행되는 일 사이클 순환구조의 체험이 중요하다. 그 체험이 주는 오르가즘에 중독되어야 한다.

그 쾌감을 얻었을 때 다른 모든 잡다한 것이 몰가치하게 느껴진다. 거기서 비롯되는 뜨거운 열정과 곧 손에 경험이라는 무기를 쥐고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오만한 시선, 그 관점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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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개념은 미학은 과학에 앞선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언명령은 가언명령에 앞선다. 실존은 개인의 실존이고 본질은 집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강조하였던 천국, 도덕, 윤리, 이성 따위 본질은 모두 집단의 가치다. 무인도에 혼자 있다면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양심도 없고 이성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사회 안에서 이성이 있는 거다.

미는 실존이다. 실존은 개인의 직접적 기쁨이므로 1차적이고 본질은 집단의 가치이므로 이차적이다. 물론 개인에게도 본질은 있다. 그것은 본능이나 욕망 따위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고 샤르트르가 받아친 본질은 집단적 가치다.

샤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은 개인적 삶의 실천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이는 수요가 먼저일까 공급이 먼저일까와 같다. 자동차가 발명되어 공급되니까 자동차여행에 대한 수요가 생긴 것이다.

자동차가 없었을 때는 누구도 자동차여행을 원하지 않았다. 자동차 수요가 실존이면 자동차 공급이 본질이다. 언뜻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듯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수요가 먼저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도 기본적으로 이동수단에 대한 수요는 있었다. 단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전파되지 않았을 뿐이다. 부분을 보면 물질문명의 진보가 세련된 문화양식의 진보를 촉발하지만 전체로 보면 반대다.

르네상스의 근대정신이 먼저 있었기에 산업화의 물질적 진보를 촉발한 것이다. 동기가 먼저 주어지고 그 동기부여에 응답하는 물질적 성취가 있고 다시 그 물질적 성취를 활용하는 문화적 양식이 완성된다.

그러나 사회전체로 보면 항상 앞서가서 그것을 요청하는 선구자가 있었다. 단지 그 요청이 한 사람 선각자의 가슴 속에서만 있고 다른 따라가는 사람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시다.

선구자의 미학적 요청≫산업의 물질적 응답≫사회의 일반화된 문화

이러한 패턴으로 진보가 일어나므로 언뜻 산업이 문화에 앞서는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 산업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 컴퓨터 문화가 정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질이 실존에 앞서고 과학이 미학에 앞서는듯 하다.

그러나 이는 부분을 본 것이고 전체로 보면 한 개인의 성취가 집단의 성취로 증폭되는 절차에 불과하며 항상 미학이 앞서고 실존이 앞서고 동기가 앞선다. 상층부 문화가 하층으로 전면화 되는 과정이 그렇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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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양식을 요구한다. 양식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공격수가 뛰어난 팀은 공격축구를 하고 수비수가 뛰어난 팀은 수비축구를 한다. 공격은 가장 돌파력이 뛰어난 한 명이 전체를 결정한다.

반면 수비는 사슬이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지듯 한 명의 멍청한 호구에 의해 전체의 수비력이 결정된다. 공격과 수비에 따라 어느 기준에 맞추어야 하므로 전략과 전술이 생겨난다.

수비가 뛰어난 자는 실리바둑을 두고 공격이 뛰어난 이는 세력바둑을 둔다.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전략과 전술이 있으므로 양식이 요청된다. 그 사회의 가장 잘하는 분야에 전체를 연동시키는 것이다.

제조업이 강점이면 제조업 중심의 문화를, 관광업이 강점이면 서비스업 중심의 문화를 전략으로 채택하므로 문화가 요청된다. 문화는 어느 기준에 맞추므로 기준이 바뀌면 전체를 다바꾸어야 한다.

전체를 다바꾸어야 하므로 문화는 기본적으로 전복의 형태를 띤다. 21세기는 전복적 가치관을 가진 자가 승리하는 시대이다. 과학은 모방과 답습이고 미학은 전복이다. 이제는 전복해야 살아남는다.

훈련된 개처럼 복종에 능한 자는 도태된다. 잡초처럼 살아남아 끝끝내 전복시키는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미학은 전복의 과학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전복에 성공한 경험이 없다는 데 있다.

중국만 해도 무수한 밑바닥 출세기가 있다. 아웃사이더 문학의 걸작 수호지가 대표적이다. 서양의 설화가 대략 영웅이나 왕자, 공주, 기사를 노래하고 아랍의 설화가 장사꾼 중심인데 비해 중국의 민중설화들은 다르다.

왜 중국은 특별한가? 한고조 유방, 명태조 주원장을 비롯하여 중국에는 무수한 아웃사이더의 성공담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산박의 패거리들처럼 거리에서 불러모은 골목아이들로 정권을 잡았다.

유럽에도 많은 성공사례가 있다. 르네상스가 그러하고 인상주의가 그러하고 다다이즘이 그러하고 대혁명이 그러하다. 한국은? 임꺽정은 죽었다. 장길산은 숨었다. 활빈도는 달아났다.

홍길동은 율도국으로 도피했다. 이런 실정이니 전복의 가치관이 꾸려질래야 꾸려질 수가 없다. 한국문학이 피폐해진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문학은 통째로 패배자의 어리광이다. 찌질문학이다.

이문열의 영웅, 황제 어쩌구는 아웃사이더의 실패담이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원초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김훈은 내면으로 도피하는 수법을 쓴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을 한다.

이는 홍길동의 율도국과 같다. 김훈은 내면의 율도국이라는 도피처를 찾아 그의 문학을 완결지었다. 좌파들은 실패한다. 그들은 이유없이 주인공을 죽인다. 어차피 출구는 없으므로. 파이란의 강재처럼 괜히 죽인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제각기 제위치에서 완성된다. 그는 김기덕과 마찬가지로 미학적 돌파구를 얻었다. 무엇인가? 악어와 여인은 한강 교각에 소파 하나 놓고 그림 한 점 걸어 완성한다.

그들만의 미학적 이상향을 완성한다. 무엇인가? 시내암과 나관중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 그들의 120회분 충의수호지는 가짜다. 김성탄이 말했듯이 70회에서 끝나야 한다. 양산박에 그들이 모인 자체로 성공이다.

그들이 그렇게 그 공간에 모여서 기뻐한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미학적 성공이다. 하나가 완성되면 그 기쁨이 전파된다. 모두가 감염된다. 모두가 각자 제 위치에서 완성되면 통한다.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왕이 될 필요는 없다. 이문열의 패거리는 왕이 되기는 커녕 사기꾼 집단으로 몰락한 데 대해 자책하지만 수호지의 호걸들은 자책하지 않는다. 그들은 헌걸차고 당당한 대장부로 완성되었다. 충분하다.

● 전제.. 누가 물어봤냐?
● 진술..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나의 존제는 전제와 진술의 대칭으로 세팅된다. 모든 미학의 기본적인 고민은 ‘누가 물어봤냐?’ ‘그래서 결론이뭐냐?’ 이 두 뼈아픈 질문에 답하는 거다. 누가 물어봤냐에 대한 응답은 전복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에 대한 응답은 완성이다. 동화는 보통 ‘잘먹고 잘살았다’로 끝난다. 우리는 춘향과 몽룡이 잘 먹고 잘살았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놀부도 회개해서 흥부와 잘 살았다지 않는가?

과연 그럴까? 사회는 냉혹하다.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21세기의 결론은 각자 제 위치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완성된 개인이 모여 평판과 공론과 안목으로 집단지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위대한 전복은 가능하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16]노매드

2009.10.01 (15:01:49)

"이문열의 영웅, 황제 어쩌구는 아웃사이더의 실패담이다. 그들에게는 축구가 없다." 축구->출구?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09.10.01 (15:25:36)

과학은 만들고,
미학은 즐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09.10.02 (10:12:38)


아인슈타인은 신의 바닷가에서 호기심에 잠긴 채 삶의 신비를 맛보는 멋진 사람이었소.
서구에서는 과학을 추구했지만 몇몇은 과학을 넘어 진정한 삶의 신비를 맛보았소.
우리나라에도 미학을 아는 큰 과학자가 있어야 할 때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17]안단테

2009.10.05 (12:08:08)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글, 장거리 마라톤을 연상케 하는 글, 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도끼.jpg

'.... 그 쾌감을 얻었을 때 다른 모든 잡다한 것이 몰가치하게 느껴진다. 거기서 비롯되는 뜨거운 열정과 곧 손에 경험이라는 무기를 쥐고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오만한 시선, 그 관점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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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소쇄원

2009.10.05 (15:11:53)

가치의 위계에 대해서,,,,,
핵심이 있다. 지름길이 있다. 결이 있다. ...... 무언가 불편하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죄스러워 진다. 앎을 향해 나아가야하는 의무감 같은게 생긴다.

하나에서 둘을 아는 기쁨과
열에서 열하나를 아는 기쁨의 차이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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