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핵심이 ‘이중의 역설’이다. 사실 이건 이전에 무수히 말했을 뿐 아니라, 너무 당연하고 간단해서 구태여 말하는 것도 이상한 편인데,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여전히 이중의 역설을 모르거나 혹은 안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거나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달이 뜨다’는 책 한권이 통째로 이중의 역설만 모아놓았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이게 핵심이라는 거다. 뭐든 좋은건 다 이중의 역설이라고 보면 된다. 뇌에 찌르르 하고 전기가 오는건 다 이중의 역설이다. 글을 읽다 보면 똥꼬가 뻑적지근한게 감이 오는게 있다. 밑바닥에서 가득히 차오르는 충일감이 있다. 수영초보가 물에서 허우적대며 불안해 하다가 발이 바닥에 닿으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가득차는 느낌 있다. 아귀가 똑 맞아떨어지는 완전성의 느낌이 있다. 그런 느낌은 성경을 읽다가 예수의 어록에서 느끼는 그런 거다. 노자의 지당한 말씀이나 공자 선생의 맞는 말, 석가의 그럴듯한 언변이 이중의 역설이다. 성철의 ‘산은 산, 물은 물도 이중의 역설’이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언어 안의 이중구조에 반응하는 거다. 꽉 차는 느낌. 이중의 역설이 아닌 것이 없다. 이중의 역설이 아니면 일단 문장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언어가 불성립이다. 말끝을 흐리고 얼버무린 느낌이 든다. 아귀가 맞지 않아 뒤가 허전하다. 인간이 모국어를 누구에게 배웠는가? 배우지 않았다.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아기는 느낌을 그냥 말한다. 따뜻하면 그냥 따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르게 말한다. 반드시 이유를 대서 말한다.
◎ 아기의 단서포착 – ‘아 따뜻하다.’ 가끔 게시판에도 주어가 없는 ‘베이비 토크’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게 박그네 수준 들키는 거다. 아기는 말이 안 되어도 말을 하지만 어른은 말을 해서 말이 되면 말을 한다. ‘말이 된다’는 것은 주어와 술어가 갖추어져 ‘A면 B다’ 하는 식으로 문장 안에 문답형태가 있는 것이다. 어른은 따뜻하면 따뜻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쪽팔리잖아. 누가 물어봤냐고? 아기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텔레토비처럼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고 말한다. 그러나 다 자란 성인이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정신병자 취급 당한다. 어른들은 ‘햇볕이 비치니까 따뜻하구나.’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말에 이유를 대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가 호응되게 말한다. 그래야 말이 된다. 그러나 역시 불안하다. 지식인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때로는 햇볕이 비쳐도 추울 때가 있으니까. 지식인은 절대 상대방에게 반박당할 가능성이 있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상대적인 표현은 곤란하고 절대적인 말을 해야 한다. 예수나 석가나 노자도 무리를 모으려면 남들과는 다른 어법을 선보여야 한다. 햇볕이 비쳐도 추울 수 있지만 봄이 오면 따뜻한 거다. 이건 백퍼센트 확실하다. 반박은 불가다. 왜냐하면 봄은 무수히 많은 따뜻함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반박할 수가 없다. 집합은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쌍으로 서고, 쌍은 반박할 수 없다. 반박한다는 것은 대칭의 쌍을 이룬 2 중에서 하나로 다른 하나를 치는 것인데 쌍은 반박할 수 없다. 시를 짓든, 소설을 쓰든, 영화를 찍든 이중구조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안 되면 아직 문장을 덜 쓴 거다. 왜 두 번 역설이어야 하는가? 언어는 동사로 시작된다. 단서를 포착하면 동사다. 무언가를 봤거나 느꼈거나 들었거나 당했다면 그것은 동사다. 동사를 그대로 말하면 ‘베이비 토크’이므로 쪽팔려서 말할 수 없고, 명사로 만들려면 대칭시켜야 한다. 정과 반, 음과 양, 머리와 꼬리, 부하와 상사, 플러스와 마이너스 하는 식으로 대칭되는 짝을 찾아야 한다. 반이 이렇게 했으니 정은 이렇게 한다거나, 꼬리가 이렇게 하므로 머리는 이렇게 한다거나, 부하가 이렇게 하므로 상사는 이렇게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게 어른들의 상대어법이다. 그런데 이건 한 번 뒤집은 역설이다. 이런 수작으로 예수급, 노자급, 공자급은 못 되는 것이다. 한 번 뒤집은 상대어법은 반드시 반박당하고 반박당하면 이미 진 것이다. 왜냐?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그다지 독특한게 없잖아. 절대어법을 구사해야 남들이 우러러보고 쳐주는 거다. 절대어법은 토대의 공유를 찾는다. 즉 어떤 따뜻함이 아니라 ‘많은 따뜻함의 집합≫봄날씨’로 레벨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게 이중의 역설이다. 이중의 역설이 되어야 비로소 발언권이 생긴다. 언어를 얻어서 스스로 말하는 자가 된다. 발언권이란 상대방의 말을 반격하는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을 지어내는 거다. 시인이 되려면, 소설가로 되려면, 예술가로 되려면 먼저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 언어를 얻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아직 작가는 아닌 거다. 게시판에서 발언권 이야기 하면 오해하는 분 있는데 먼저 언어를 얻어야 비로소 자기 이야기 할 수 있다. 남의 말 반박하는건 가짜다. 그럴 권리가 없다. 필자가 ‘한국은 교육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아냐, 한국의 교육은 엉망이야!‘ 하고 반박하는 사람 있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초딩 수준이다. 내 말을 왜 지가 멋대로 가져다 쓰는데? ’한국은 교육을 잘 한다‘는 말은 소유권이 내게 있다.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고 책 제목을 정하니 ‘일본은 저기에 있잖아.‘ 하고 반박하는 식이다. ‘일본은 없다’는 말은 말하자면 전여옥의 시詩다. 시를 반박할 수 있는가? 반박되면 시가 아니다. 어떤 시인이 ‘봄은 고양이로다.’ 하니까 ‘아닌데? 봄은 여우인데?’ 하고 반박할 수 있는가? 천만에. ‘봄은 고양이로다’는 이장희 시인에게 권리가 있다. 그 말을 남이 함부로 가져다 쓰는 거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 시라는 맥락을 이해 못한 도발이 되는 것이다. 남의 언어 막 건드리면 안 된다. 다 권리가 있다. 자기 언어를 얻어야 세상을 향해 발언할 권리가 생긴다. 그것은 내것이므로 권리가 있는 거다. ‘일본은 없다’는 표현이 아니라 전여옥의 관점이다. 관점은 개인에게 고유하다. 그래서 불가침이다. ‘한국의 교육은 좋다’는건 필자의 관점이다.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며 그 관점은 오직 내것이다. 말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유한 관점 자체가 가치를 가진다. 말의 액면을 보지 말고 관점을 봐야 하는 것이다. 전여옥이 책장사에 성공한 것은 ‘일본은 없다’는 남의 책 내용을 표절한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가 일본이 막 꺾어지던 고비였기 때문이다. 표절한 책 내용은 틀렸지만 일본을 바라보는 전여옥의 관점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후 일본은 한국에 추월당한다. 지금 일본 네티즌들은 한국의 대졸초임이 일본을 앞질렀다며 좌절해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 흐름은 그렇다. ‘일본을 읽으면 한국이 보인다’던 이규형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거. 이규형은 그날 이후로 완전 망했다. 둘 다 망했지만 중요한건 역사의 흐름이고 전여옥이 그나마 흐름을 잘 타서 10여년간은 더 흥했다. 일본은 없다. <- 이 말은 반박할 수 없다. 관점을 비판할 수 있지만 그건 맥락이 다르다. 관점 자체는 전여옥의 개인 소유물이므로 반박대상이 아니다. 내가 꼬맹이 열 명에게 굴밤 한 대씩 때렸는데, 어떤 아이는 많이 아프고 어떤 아이는 조금 아프다. 많이 아픈 아이가 우는데, 조금 아픈 아이가 반박한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왜 우느냐? 넌 틀렸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픈건 개인영역이라 반박할 수 없다. 메이웨더가 파퀴아오에게 백 방 맞고 뻗는데 ‘아직 뻗을 타이밍이 아냐. 넌 틀렸어. 오백 대 더 맞고 뻗으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절대성의 세계로 올라서야 한다. 물론 말하는 중에는 상대적 언어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는 문장을 끝낼 수 없다. 끝 안난다.
◎ 원설 – 내가 장사를 잘못했다. 예컨대 이런 거다. 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안 되면? 내가 장사를 잘못한 거다. 역설은 옆가게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중의 역설은 불경기 탓으로 보는 것이다. 옆가게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면 그러한 생각은 다른가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야구시합을 해서 졌는데 ‘상대팀이 잘해서 졌다.’ 이게 말이 돼? 이런 소리 하다가는 귀싸대기를 맞는 수가 있다. 상대팀이 잘 하면 우리팀은 더 잘해야 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절대어법 써야 한다. ‘나는 해금이 좋다. 너는 피아노가 좋다.’ 누구 말이 맞을까? 각자의 주관에 달렸다. 그러나 해금은 두 줄이고 피아노는 현이 매우 많다. 이건 절대적이다. 상대가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대어 논해야만 한다. 상대팀이 잘해서 졌다고 상대어법으로 말하면 안 된다. 동계훈련이 부족했다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안했다거나, 좋은 용병을 못 구했다는 식으로 절대적 근거를 대야 한다. 그래야 납득이 된다. 그러려면? 1을 찾아가야 한다. 연탄을 석유로 바꿔야 한다. 연탄이 백장이면 백번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석유 한 드럼이면 한 번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의사결정 횟수를 줄여서 1을 이루면 상대가 반박할 수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반박할 수 없다. 반박할 수 없는 1을 논거로 제시할 때 토론은 종결된다. 처음에는 해가 지구를 도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지구가 해를 도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일까? 근데 태양에게 허락맡았을까? 태양형님 돌아도 좋습니까? 태양이 ‘안돼. 돌지마. 꺼져!’ 어쩔까? 지구와 태양은 2다. 2는 상대성이다. 2는 아직 논리가 서지 않은 것이다. 시스템은 쌍으로 선다. 구조를 시스템으로 도약시켜야 한다. 지구와 태양이 쌍을 이루면? ‘공간이 흐른다’고 말해야 한다. 이 때는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완전히 종결된다. 이건 느낌이 딱 와주는 것이다. 이중의 역설은 훈련해야 한다. 먼저 단서를 찾고, 파트너를 찾고 최후에는 방향성 1을 찾아야 한다. 완전하다.
◎ 베이비 토크 – 화살의 꼬리를 본다. 당신이 처음 본 것은 화살의 꼬리 아니면 머리다. 둘 다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고 지각된다는 것은 접촉한다는 것이고 접촉하는 접점은 1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하나의 점이다. 그 다음 추론을 해서 언어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초의 단서는 1이다. 그런데 1로는 감탄사 밖에 안 되며 아직 문장을 못 이룬다. 아기가 ‘아야!’ 하면 문장이 아니다. ‘아이고’ 라든가‘ ’제기럴‘이라든가 ’아 씨바!‘ 이런건 문장이 아니다. 아기언어다. ’밥 줘!‘ 하면 아기어법이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줘.‘ 이게 어른 언어다. 현자어법은 ’점심식사시간이니까 밥을 줘.‘ 이렇게 한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는 아기어법도 먹힌다. 그러나 어른이 ’배가 고프니까 밥을 줘.‘ 이러면 상대는? ‘난 아직 배 안 고픈데 이따가 먹자.’ 이렇게 반격당하는 거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밥을 먹자.’ 이건 반박당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은 모두에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은 모두가 공유하므로 1이다. ‘내가 배고프다’는건 남은 아직 배가 안 고프므로 2다. 1을 들이대야 먹힌다. 아기토크와 어른토크 현자토크가 있다. 현자어법으로 말해야 씨가 먹힌다. 물론 일상적으로는 대충 말해도 되지만 나서서 발언할 때는 반드시 이 원리대로 말해야 한다. 훈련되어야 한다. 모두에게 공유되는 토대, 에너지의 방향성을 근거로 삼아 발언하면 먹힌다. 소승으로 말하면 반격당하고 대승으로 말해야 먹힌다. 두 번 뒤집어야 한다. 한번은 관측자의 위치를 뒤집고 두 번째는 에너지의 입력처를 뒤집는다. 이는 절대규칙이다.
이런건 3분만 대화해보면 다 들킵니다. 대화하는데 주장의 근거가 공유되는 토대인지 아니면 대칭되는 상대개념인지 간파되는 거죠. 어떤 식이든 상대가 반박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면 일단 지성인이 아닙니다. 반대로 제 글은 함부로 반박하면 안 됩니다. 그게 맥락을 모른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죠. 제가 숭산은 가짜고 성철은 진짜라고 하는건 그 사람의 어휘선택을 보고 1분 안에 판단하는 겁니다. 숭산어법은 전부 반박당하는 겁니다. 언어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는 거죠. 몰라도 공유되는 토대를 근거로 발언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대칭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칭을 만드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이용해서 말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먼저 말하도록 시키고 자신은 늦게 말하려고 합니다. 이걸 들키는 것입니다. 먼저 말 못하면 진 겁니다. |
우와아아~~
ㅋㅋㅋㅋ
앱솔루트 수입처 중에 제일 괜춘한 곳을 찾았으므로 곧 들고 날아가겠습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