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규율하는 근본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스위치와 같다. 현재상태로 스위치는 켜져 있다.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끄는 것 뿐이다. 혹은 그 끌 계획을 끄는 것 뿐이다. 즉 인간은 언제나 NO만을 결정할 수 있다. 현재상태는 YES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NO와 NO, NO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은 매우 쉽다. 단지 NO라고 하면 된다. 반면 의사결정이 쉬운 만큼 스위치를 차지하기는 어렵다. 나는 하나이나 세상은 여럿이다. 그 관계를 일대일로 만들어야 스위치를 장악한 상황이 된다. 연탄이 백장이면 우리는 백번의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스위치를 반복하여 백번 눌러야 하므로 피곤한 작업이 된다. 헷갈리게 되고 오판하게 된다. 반면 석유가 한 드럼이면 한 번의 결정으로 족하다. 인간이 진리를 추적하는 방법은 연탄을 석유로 바꾸는 것이다. 가능한 한도까지 의사결정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병사는 소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소대장은 중대장에게 위임하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위임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횟수를 줄인다. 이는 잘 훈련된 부대에서만 가능하다. 오합지졸이면 누가 소대장인지도 알 수 없다. 하극상의 상태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풍경과 같다. 기본적으로 한글독해가 안 되는 50대 이상의 고령층이 함부로 권력을 행사한다. 조현아처럼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대대장을 맡고 있다. 경험있는 전문가들은 이등병 신세다.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정비해서 체계가 잡힌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한 번의 스위치 조작으로 통제가 되는 상황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세상은 다多이나 1로 보면 에너지다. 에너지는 석유와 같다. 유체는 1의 스위치 조작으로 통제가 된다. 반면 입자는 아침저녁으로 연탄을 갈 듯이 갈아줘야 한다. 연탄재 처리도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껏 세상을 입자로 보아왔으며 입자는 통제불가능한 잘못된 상태, 아는 전문가는 이등병이 되고 모르는 조현아가 부사장을 맡는 대한항공식 막장상태다. 세상은 에너지 1로 되어 있다. 세상이 이것저것 다多임에도 1로 되는 때는 내가 세상을 상대하여 의사결정할 때다. 보통은 세상은 혹은 이렇거나 저렇다. 세상의 모습은 참으로 여럿이다. 그러나 내 인생 전체를 걸고 세상과 맞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1이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내가 1이면 세상도 1이다. 반면 세상이 다多일 때 나도 다多이다.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지위 등 나는 다양하다. 시간적으로 보아도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로 다양하다. 이래서는 의사결정할 수 없다. 오직 NO만 결정할 수 있는 운명의 스위치가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드물게 내 인생 전부를 거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나를 1로 환원시켜야 한다. 종교를 선택하거나, 정당을 지지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진로를 결정할 때는 나를 1로 환원시켜야 한다. 그럴 때 나는 일자一者다. 대개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나를 일자로 보지 않고 다자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의 내 처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거짓 나다. 내 인생 전체, 내 바운더리 전체를 하나로 묶어 일자를 도출해야 한다. 내가 일자이므로 세상도 일자다. 세상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연결된 전체의 모습은 에너지다. 세상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운동한다. 운동하여 일한다. 일하면 사건이다. 하나의 사건은 다섯 차례의 의사결정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사건이 시스템이라면, 다섯 번의 의사결정은 구조다. 세상은 구조와 시스템이다.
◎ 세상 <-> 나 세상과 나는 마주보고 있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다. 이렇듯 마주보고 있으므로 오판이 일어난다. 바른 의사결정을 위해서 세상은 일자一者라야 하며 그러려면 세상과 나도 연동되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존재론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발견하고, 관점을 이동시켜 통합된 하나의 관점을 얻어내야 하며 그것은 깨달음이다. ◎ 원인≫주체≫공간≫시간≫결과 통합된 하나로 보면 ‘원인≫주체≫공간≫시간≫결과’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에너지의 운동을 지정하는 공간과 시간이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서 사건의 주체가 있다. 사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며 에너지는 그 대상을 관통하면서 다섯차례 의사결정을 한다. 구조체 내부에서 다섯차례 결정하여 에너지를 처리한다.
◎ 자연의 에너지 - 원인≫주체≫공간≫시간≫결과 인간의 인식은 특정한 관점에서 일어난다. 각자 관점이 다르므로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말한다. 다르게 말해도 실제로는 같다. 연탄이 백장이라도 석유로 보면 한 장이다. 그 연탄이 내는 칼로리로 보면 하나다. 일자로 환원시켜야 한다. 자신이 바라본 관점을 찾아 의미를 찾고, 의미에서 가치를 찾고, 가치에서 맥락을 찾아 깨달음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 관측의 역설 - 레이더는 능동으로 보나 인간은 수동으로 본다. 이 과정은 이중의 역설을 수반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를 두 번 뒤집는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갑을관계를 가진다. 레이더는 능동적으로 대상을 포착하지만 보통은 태양이 보내주는 햇볕 덕에 수동적으로 포착한다. 사과가 빨갛게 보인다. 보는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이건 관측자가 을이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이더라고 바로 말하면 곤란하다. 당신이 그렇게 봤다고 말해야 한다. 수동이지만 전환시켜 능동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고 당신이 레이더로 쏘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지다. 눈, 코, 입, 귀, 몸으로 얻은 수동적 정보는 아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을 뒤집어 능동으로 바꾸어야만 진짜 지가 형성된다. 이것이 관측의 역설이다. 첫 번째 역설은 능동으로 보는 관측의 역설이다. ◎ 이중의 역설 - 하나의 사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두 번 전복된다. 한 번은 관측의 역설이고 두 번은 에너지의 역설이다. ‘먹어보니 맛이 없더라’가 아니라 당신이 맛없게 먹은 것이다. 사과를 먹었다면 첫 번째는 사과와 혀의 갑을관계고 다음은 사과와 당신의 에너지 갑을관계다. 여기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분간이다. 화살의 배후에는 활이 있고 활의 배후에는 궁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 안에서 두 번 전복된다. 한 번은 관측으로 전복되고 다음은 에너지로 전복된다.
◎ 하부구조 – 시간적 순서를 뒤집는 관측의 역설 어떤 판단을 두 번 전복시켜서 보았다면 당신은 바르게 본 것이다. 언어는 주어부와 술어부를 가진다. 그리고 술어부는 다시 명사와 동사로 조직된다. 처음은 동사로 포착된다. 인간은 정을 볼 수 없으므로 언제나 동을 보는 것이다. 자연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운동해야 관측된다. 잠복한 에너지는 관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았다면 그것은 동사다. 거기서 명사를 찾아야 한다. 본 것은 빨강이고 명사는 빛이다. 빛은 태양이 쏘았다. 빛을 술어로 삼고 다시 주어를 찾아야 한다. 두 번 전복시켰을 때 당신은 진리에 이른다. 무언가 인식할 소스가 주어졌다면 반드시 두 번 뒤집어야 한다. 뒤집는 방법은 대칭이다. 자연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대칭을 조직하여 운동한다. 대칭은 밤과 낮, 음과 양이다. 남과 여, 플러스와 마이너스, 강자와 약자, 고와 저로 짝을 지어 있다. 당신이 처음 본 것은 그 둘 중의 하나다. 당신은 처음 밤 아니면 낮을 보았다. 남 아니면 여를 보았다. 강 아니면 약을 보았다. 뒤집으면 파트너가 보인다. 한 번 역설이다. 비대칭은 다시 이를 뒤집어 일자一者를 찾아낸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 사이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찾는다.
◎ 역설 1 – 동사를 명사로 바꾸어 대칭을 찾는다. 만약 당신이 넘어졌다면 일단은 자기 잘못으로 넘어진 거다. 분명 내가 잘못했다. 역설은 이를 뒤집는다. 맞은 편에 있는 자가 밀었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다. 사실은 상대방이 잘못했다. 이중의 역설은 이를 다시 뒤집는다. 사실 우리 둘은 한 배를 타고 있었던 거다. 배가 흔들려 상대방이 내게로 자빠진 것이고 그 상대방에 떠밀려서 내가 넘어진 것이다. ◎ 역설 2 – 둘 사이에 토대의 공유를 찾아낸다. 이렇듯 우리는 토대를 공유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토대를 건드려야 한다. 내 자신을 자책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상대방을 탓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할 때 진정으로 해결된다. 항상 둘 사이에는 토대가 있다. 살펴서 찾아내야 한다. 야당이 졌다면 야당 잘못이다. 사실은 여당의 반칙 때문이다. 사실은 속은 국민이 문제이다. 이때 공유되는 토대는 대개 바깥에 있다. 한국의 야당이 패배한 이유는 북한의 김정일과 미국의 부시 때문이다. 외부에서의 교란요인을 읽고 선제대응하여 그러한 방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남녀가 헤어져도 내 탓이 아니고 상대방탓도 아니고 사실은 공유할 토대 탓이다. 내탓 자책은 괴로울 뿐이고 상대방탓 시비는 공연히 싸움만 일어날 뿐이다. 영삼이 IMF를 불러와서 실직한 탓에 둘의 살림살이에 공유되는 토대인 나의 취직자리가 날아간 결과 남녀가 다투어 헤어진 거다. 다시 취직을 해결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세상은 에너지고 에너지는 대칭을 통해서만 작동하므로 반드시 이런 구조를 타고 있다. 깨달음은 토대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토대가 일자一者임을 아는 것이다.
오늘 글은 구조론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말하자면 대승경전의 반야심경과 같은 거죠. 어떤 판단해야 할 첩보가 있으면 무조건 두 번 뒤집어야 합니다. 하나의 단서를 잡으면 그 단서를 두 번 뒤집을 작정을 하고, 관측에서의 수동을 능동으로 바꾸고 토대의 공유에서 에너지의 진행루트를 찾아야 합니다. 태양이 도는게 보이면 지구가 돈다로 바꾸고, 태양이 임의로 지구를 돌리거나 혹은 지구가 심심해서 태양 주변을 떠도는게 아니라 태양과 지구가 공유한 공간이 흐른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든, 남자와 여자든 모두 우리의 주위를 둘러싼 공간의 흐름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미국과 쿠바가 손잡는 것을 보면 공간이 흐르는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