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정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다. ‘자유, 평등, 정의’라는 슬로건도 있다. 개념들은 서로 겹친다. 예수의 사랑이나‘ 공자의 인의나’ 석가의 자비는 겹쳐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이어지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해방만 시켜주면 끝인가? 애프터서비스 해줘야 한다. 놔두면 다시 노예가 되어 있다. 노예는 사회적 투쟁의 산물이고 그 투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투쟁을 종식하려면 근원의 해방이 필요하다. 계급해방에 이어 여성해방까지 건드리면 평등이다. 평등이면 땡인가? 그걸로 끝인가? 노예는 집단이다. 여성도 집단이다. 개인적 차이까지 해결해야 한다. 개인까지 해결해주면 박애가 된다. 개인의 해결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 해방이다.
◎ 자유 ≫ 해방이다. 그러므로 자유, 평등, 박애는 셋이 아니고 하나다. 해방 그리고 더 많은 해방, 그리고 더욱 친절하고 섬세한 해방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기에서 해방은 자유다. 승에서 해방은 평등이다. 전에서 해방은 박애다. 그렇다면? 결에서 한 번 더 해방해야 한다. 그것은 정의다. 정의라고 하면 사법적 정의나 조세정의가 떠오른다. 어떤 사건의 종결지점에서의 판단이다. 시합이 끝나고 심판의 판정이 나오면 편파판정이니 뭐니 해서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결 단계의 해방이 정의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난 다음 겨울에 연말정산을 앞두고 세금을 신고한다. 조세정의도 역시 종결단계의 판단이다. ‘자유, 평등, 박애, 정의’가 한 줄에 꿰어지는 것이다. 처음 자유를 주려면 먼저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포지션 하나를 추가하면 존엄이 된다. 이는 마음의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과 통한다. 국가의 역할은 ‘존중≫인권≫평등≫박애≫정의’이고 이에 대하여 내가 추구하는 것은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이다. 앞에 존엄과 자유만 용어가 겹친다. 그 이유는 상부구조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 국가의 보장 - 존엄≫자유≫평등≫박애≫정의 국가가 개인의 행복은 보장 못한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는 객관적이다. 국가의 정의가 보장되면 개인의 행복은 각자 알아서 챙겨야 한다. 그러므로 하부구조는 공유되지 않는다. 자유라는 표현은 노예해방 시대에 걸맞는 표현이고, 현대의 용어로는 인권이다.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자유인 거다. 흔히 자유를 잘못 이해한다. 이 다섯 혹은 열가지는 실로 다르지 않다. 그저 자유에 더 많은 자유와 더더 많은 자유와 더더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면 이렇게 된다. 전체를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이어지는 맥락으로 파악해야 한다. 정의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정의와 더 큰 정의와 더욱 큰 정의와 더더욱 큰 정의다. 다섯가지 전체를 모두 자유로 볼 수도 있고 모두 정의로 볼 수도 있다. 진리는 한 줄에 꿰어지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한 번 만날 사람은 존중하고, 두 번 만날 사람은 편하게 자유를 주고, 세 번 만날 사람은 사랑하고, 계속 만날 사람은 벌여놓은 사업이 성취하게 도와주고, 평생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복까지 챙겨줘야 한다. 가게에 온 고객도 같다. 한 번 온 고객은 존중하고 두 번 온 고객은 자유케 하라. 세 번 온 고객은 사랑으로, 네 번 온 고객은 성취로, 평생토록 오는 고객은 행복으로 대해야 한다. 존엄은 처음 놀이에 끼워준다. 자유는 놀이 안에서 역할을 제공한다. 사랑은 충돌이 일어났을 때 편들어준다. 성취는 놀이에서 이기는 것이고, 행복은 이겨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순서가 있다. 일단 놀이에 끼워줘야 역할을 주든지, 편들어주든지다. 그 다음에 이기든지, 함께 즐거워하든지 할 것이다. 상부구조는 공유되고 하부구조는 차별화 된다. 존엄은 하나이나 행복 쪽으로 갈수록 여럿이 된다. 행복은 술만 먹어도 행복해질 수 있다. 몸에 해로운 마약을 먹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복잡하다. 존엄은 단순하다. 1이다. 약간 행복한 사람은 많이 있어도 약간 존엄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존엄하거나 비참하거나지 중간은 없다. 반대로 정의나 행복은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존엄은 만나주기만 해도 존중이나 행복은 아니다. 유명 배우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만나주면 존중이다. 그런데 행복할까? 그건 미지수다. 그림과 같다. 평등보다 정의가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적극적인 배려’를 반대하는 일베충 있다. '나는 두 배나 노력해서, 요금 더 내고 지정석 끊었는데, 왜 다른 사람과 똑같이 봐야 되냐? 역차별 아니냐?' 하고 거품 무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정의의 신’ 개념이 필요하다. 굳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의도를 가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의도가 있다는건 인격성이 있다는 거다.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려면 신의 전지적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기승전결 전체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거다. 기에서 한 번 개입하고 빠지면 곤란하다. 대학입시 때 한 번만 공정하게 평가하고 국가는 빠진다? 보수꼴통들이 이런거 좋아하는 이유는 반칙할 의도 때문이다. 딱 한번의 평가로 인생이 결정된다면 반칙하는 자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재평가를 반복하면 그 반칙이 안 먹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존엄, 자유, 평등, 박애, 정의는 국가에서 사람을 평가하고 또 평가하고 또 패자부활전 기회를 주고, 신용불량자에게도 다시 신용회복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노숙자에게도 재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탈락자에게도 구제수단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의의 신은 사건의 종결단계, 곧 재판이 열리거나 혹은 세금을 낼 때만 정의를 논할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통찰해서 장발장을 선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빵을 훔쳤으니 깜방행이 아니라 왜 빵을 훔쳤느냐다. 굶주린 조카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으니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의도가 필요하다. 진정한 정의를 이루려면 미래예측능력까지 있어야 한다. 규정대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여 능동적, 유기적 대응을 해야 한다. 종합적인 판단능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의도가 있어야 한다. 법대로 판결할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법을 재해석해야 한다. 과거의 판례를 뜯어고쳐야 한다. 법조문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미래까지 감안해서 판단해야 정의다. 그래서 정의의 신 개념이 필요하다. 집단을 예민한 긴장상태에 묶어두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기계적 평등을 원하는 보수꼴통은 그 긴장을 싫어한다.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이다. 존중≫인권≫평등≫박애≫정의를 다 챙기려니 그들의 무뇌로는 뇌 용량이 딸리기 때문이다. 남자인데 여자들과 말하기 싫다거나, 백인인데 흑인과 말하기 싫다거나 이렇게 울타리 치고 장벽 만들면 편안하다. 그러다 긴장 풀려 외적의 침입에 약한 상태, 면역성이 떨어진 상태, 병들기 좋은 상태가 되고 확률적으로 병들어결국 죽는다. 단 고립된 지역은 예외다. 일본처럼 고립되면 병 들어도 골골댈 뿐 잘 안 죽는다. 그래서 아베가 저런다. 한국도 고립병에 걸려서 탈이다. 대륙으로 진출해야 한다. 한국의 특수성을 극복하고 인류의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의를 원한다면 큰 경기, 큰 시합, 큰 게임을 자주 열어야 한다. 의도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한다. 정의는 부단히 재시험을 친다. 사람을 계급으로만 평가하는게 아니라, 지식으로도, 돈으로도, 문화로도, 도덕으로도, 친구로도 평가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을때까지 계속 평가하는 것이 정의다. 그래야 정의가 실행될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진다. 수구꼴통이 원하는 '반듯한 사회'는 두부모 자르듯이 단 한번만 확 잘라서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끝없이 흔들어대며 의도적으로 긴장을 유발한다. 작정하고 싸움 붙이고 논쟁을 건다. 잠들지 못하게 계속 말을 시키고 옆구리를 찔러댄다. 등산복 왜 입냐고 시비한다. 그러한 긴장상태를 즐긴다. 연주자가 있다. '정의의 신'은 존재한다.
행복 위에 진정한 행복, 더 진정한 행복, 더더 진정한 행복을 찾으면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이 됩니다. 반대로 존엄을 더욱 구체화 하면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이 됩니다. 이를 개인이 아닌 사회 혹은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존엄, 자유(인권), 평등, 박애, 정의가 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포지션 차이에 불과합니다. 구조론은 추상적 단어들을 이렇듯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일의 진행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동되는 맥락으로 파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