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기 모으기 몰아주기 풀어내기 알리기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을 쉬운 말로 바꾸면 ‘비우기, 모으기, 몰아주기, 풀어내기, 알리기’가 된다. ‘비우기’라고 했지만 ‘감시하기’가 맞다. ‘마음 비운다’는 말이 명상가들 사이에 유행하지만, 사실은 나를 비우는게 아니고 크게 확장하는 것이다. 내가 놓인 환경을 합쳐서 1로 보고 일대일로 맞선다. 마음을 비운다는 자세라야 환경의 1이 포착된다. ◎ 비우기≫모으기≫몰아주기≫풀어내기≫알리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낱낱이 따지면 수십가지다. 밀린 숙제도 해야 하고, 엄마 심부름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한다. 몰아서 외부에서의 소식 1로 삼아야 한다. 전쟁터에서 총알도 날아오고, 대포알도 날아오고, 욕설도 날아오지만 그 모든 것은 공격받고 있는 상황 1이다. 환경과 나를 일대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세월호 선장과 같은 잘못은 상황을 1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젖은 돈도 말려야 한다는 식이다. 이탈리아 군 장교들은 치열한 전쟁터에서도 냅킨을 깔고 와인을 곁들여야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가면 1이 아닌 2나 3이 된다. 환경이 여럿이 되면 나도 여럿이 되어 정신분열로 치닫고 만다. 마음을 비워 상대를 1로 만드는 것이 정신차리는 거다. 비웠다면 모아야 한다. 상대방이 1이 되었다면 나도 1로 맞서는 것이 모으기다. 정신의 집중이다. 명상은 먼저 마음을 비운 다음에 모은다. 비우는 것은 외부를 비우는 것이요 모으는 것은 내부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우기와 모으기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비우기가 먼저다. 먼저 밖을 살피고 다음 안을 다진다. 수비가 먼저고 다음이 공격이다. 힘을 한 곳에 모았다면 주먹을 내질러야 한다. 투수라면 던져야 하고, 타자라면 휘둘러야 한다. 이때 우선순위 1번에 올인하는 것이 몰아주기다. 사격이라면 겨냥하기다. 몰아주는 방법은 방향을 트는 것이다. 컴퓨터로 말하면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세 번째 제어다. ‘받기≫쌓기≫틀기≫풀기≫주기’에서 틀기다. 방향을 틀면 곧 몰아주기가 된다. 삽질이든 망치질이든 해보면 안 된다. 방향을 틀면 힘이 한 점에 모인다. 몰아주기가 되는 것이다. 비운 다음에 모으고 모은 다음에 몰아야 한다. 다음은 풀어내기 그리고 알리기가 있다. 몰아주기가 공간이라면 풀어내기는 시간이다. 마음을 공간의 누구에겐가로 던지면 몰아주기가 되고 시간에 던지면 풀어내기가 된다. 마지막은 결과를 되돌리는 알리기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은 마음 내부의 메커니즘에 주목한 존재론적 표현이고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의 인식론적 표현이 쉽다. 존재론은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으므로, 사회적인 의사소통에서는 인식론으로 말해야 한다. 자동차로 말하면 계기판에 표시되는 데이터에 해당한다. 계기판에는 연료계, 수온계, RPM게이지, 속도계, 거리계가 있다.
◎ 마음의 다섯가지 하는일 -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 다른 사람의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은 알 수 없다. 존엄한지를 보고 정신상태를 짐작하며, 자유로운지를 보고 의식수준을 짐작한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고 의도를 짐작하고, 무엇을 성취하는지를 보고 생각을 짐작하고, 무엇에 행복해 하는지를 보고 감정을 짐작한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은 타자의 마음을 알아내는 창이다. 우리말 표현 비우기≫모으기≫몰아주기≫풀어내기≫알리기로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이 뭐냐고? 몰아주는게 사랑이다. 관심을 몰아주든, 돈을 몰아주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몰아주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가 뭐냐?’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디에 몰아주고 있는지’를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틀기’라고 해도 맞는 말이 된다. 의도는 방향을 트는 것이다. 사랑도 변학도에서 이몽룡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다. 반대로 정신은 마음을 비우고 외부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은 ‘받기≫쌓기≫틀기≫풀기≫주기’로 말할 수 있다. 존엄은 처음 누군가와 만나 상대하는 것이고 자유는 역할을 가지는 것이다. 존엄은 축구팀에 들어가는 것이고 자유는 포지션을 가지는 것이다. 영어로는 freedom인데 이건 주인이 노예를 풀어주는 자유다. 이는 정확히 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E-테스트’라고 해서 이마에 대문자로 E자를 쓰게 하는 실험이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E를 쓰고, 권력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알아보도록 반대로 ∋를 쓴다고 한다. free는 이상하다. 진짜 자유는 내가 내게 딸린 여러 가지를 장악하는 것이다. 나의 돈과, 권리와, 가족과, 일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인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 자유는 풀려나기가 아니라 모으기다. 하긴 풀려나야 모을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인은 원래 풀려나 있다. 억류된 적이 없는 현대인에게 free는 어색한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존엄이다. 존엄을 얻으면 자유는 따라온다. 자유를 얻으면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하면 성취한다. 성취하면 행복하다. 이 순서대로 가는 것이며 순서가 뒤집히면 망한다. 결코 행복할 수 없게 된다. 존엄은 필자나 쓰는 말이고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이는 현대인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다. 존엄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노예에게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배부른 돼지의 행복은 가짜다. 존엄은 비우기다. 비우는 목적은 만나기 위해서다. 손님을 맞으려면 일단 방해되는 것들을 치워야 한다. 수업을 시작하려면 흑판의 낙서를 지워야 한다. 밥을 먹으려면 먼저 뱃 속을 비워야 한다. 화가를 만나려면 도화지를 비워야 한다. 관객을 만나려면 극장의 좌석을 비워두어야 한다. ◎ 존엄 – 외부 환경과 일대일로 만난다. 어떤 것을 만나려면 먼저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그러나 비우기 위한 비우기는 가짜다. 맞는 것이 진짜다. 비우려고 하면 비우지 못한다. 만나려고 하면 이미 비워져 있다. 왜 존엄이 중요한가? 만나는 부분은 뾰족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느님의 손끝과 아담의 손끝이 만나는 지점처럼 어떤 둘이 만나는 지점은 뾰족하다. 그것은 1이다. 존엄은 일대일이다. 존엄에서 자유≫사랑≫성취≫행복으로 갈수록 무언가 많아진다. 의사결정할 내용이 많아진다. 자동차도 시동키는 처음 한 번만 조작하지만 브레이크는 자주 밟게 되는 것과 같다. 조작할 일이 많을수록 모순과 충돌이 일어난다.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매운 음식을 먹고 괴로워 하면서 시원해 하는 것처럼 감정은 모순된다. 행복은 모순된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상태는 사실 좋은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정신병자의 얼빠진 상태이거나 술에 취했거나 마약을 한 상태일 수 있다. 섹스라 해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너무 잘 봐도 기운이 빠지는 때가 있다. 감정은 알리기다. 카톡처럼 계속 까똑까똑 하고 알림이 오면 피곤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할수록 불행해진다. 행복과 불행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존엄은 일대일이므로 편하다. 한 번 왕자로 태어나면 존엄을 얻으며 죽을때까지 대접을 받는다. 한 번 노벨상을 받으면 죽은 후에도 명성이 끊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엄이 마음의 정답이다. 존중받으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그러려면 스스로도 존중해야 한다. 존중받는 것은 자신이 1로 대접받는 것이다.
◎ 비우기 - 존엄/비참.. 외부의 무엇을 일대일로 맞이한다. 모임에 갔는데 손님이 여럿 와 있다면 1/n으로 대접받는다. 주인과 일대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1대1이 될 수 있다. 축구선수는 11명이지만 공을 잡았을 때는 일대일이다. 야구선수는 9명이지만 타석에 섰을 때는 일대일이다. 언제든 일대일이 될 수 있다는 것,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존중받는 거다. 그러려면 자신도 타자에게 대표성을 주어야 한다. 누구를 만나든 인류의 대표자로 만나야 한다. 진리의 대표자, 역사의 대표자, 문명의 대표자, 진보의 대표자, 신의 대표자로 만나야 진정한 만남이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어야 마침내 자신이 공을 잡았을 때 지체없이 슛을 날릴 수 있게 된다. 그런 대표성이 훈련되지 않으면 문전에서 망설이다 슛을 못한다. 존엄은 비참에 대한 말이다. 비참은 만나주지 않는 거다. 인간이 외계인을 사람 인人을 붙여서 사람 대접을 해주는 이유는 외계인과 만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외계의 존재가 사람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외계인을 지구인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외계인을 만났다면 외계인은 제 별에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할까? 졸지에 당신은 인류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 인간이 비참한 이유는 대표성을 잃기 때문이다. 대표성을 잃는 이유는 팀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팀에 끼워주지 않는 이유는 팀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팀, 진리팀, 역사팀, 진보팀, 문명팀에 들려면 인류를, 진리를, 역사를, 진보를, 문명을 알아야 한다. 아는 사람만이 문득 신의 대표자가 되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왜 존엄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식은 거의 외부에서 온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것이 거울처럼 비친 것이다. 나의 욕심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눈치를 본 것이다. 부족민들은 욕심이 없다. 눈치를 볼 외부인이 없기 때문이다. 부족민은 근친이고 부족민 외에는 마주치는 즉시 죽인다. 사람들은 욕망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단순반복행동으로 나타난다. 동물원 우리에 갖힌 동물들이 스테레오타이피stereotypy라는 비정상적 반복행위를 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심각한 비만환자들은 먹는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테레오타이피다. 심각한 일중독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스테레오타이피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부족민들에게는 과도한 식욕도 없고, 과도한 성욕도 없다. 재물욕도 없고 명성에도 관심이 없다. 뚱뚱한 원시 부족민은 잘 없다. 인류의 문명이 스트레스를 낳고 스트레스가 욕망을 낳는다. 제왕의 지나친 성욕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증거일 뿐이다. 알콜중독에 걸리거나 혹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욕망은 스트레스에 의한 뇌의 착각이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할 필요는 없으며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하면 자연히 적당한 적도의 금욕적인 생활이 된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존엄이다. 환경과 나의 관계를 일대일로 만드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행복에 영항을 주는 사건들의 종류가 많아 감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과 욕망 욕망의 대척점에 놓인 개념은 이성이다. 이성은 완전성을 추구한다. 욕망이 식욕이나 성욕처럼 감정을 통한 신체로부터의 알림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이성은 환경과의 만남을 일대일로 만드는 것이다. 맞선을 보는데 파트너가 될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나온다면 그건 일대일이 아니다. 북이나 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비워서 순수해져야 한다. 홀딱 벗고 일대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악기라도 소리가 난다. 완전성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만이 욕망을 극복할 수 있고 존엄에 도달할 수 있다. 완전한 음식, 완전한 음악, 완전한 그림, 완전한 디자인, 완전한 정치, 완전한 삶에 대한 그림을 가져야 한다. 그 완전은 황금과 같은 물체의 완전성이 아니라 사건의 기승전결 완전성이다. 공간적 완전이 아니라 시간적 완전이라야 한다. 황금도 다이아몬드도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은 완전할 수 있다. 음악은 시간 상에 연주되므로 완전에 가깝다. 그 안에 이야기를 담아내야 완전하다. 공간적 완전에 집착하면 좌우대칭처럼 틀에박힌 그림이 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절묘한 대칭을 통해 공간적 완전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시간적 완전은 동양화에서 발견된다. 동양화는 산과 물의 대비를 통해, 동과 정의 대칭을 추구하고 있다. 거기에는 산을 통해 표현되는 공간과 물을 통해 표현되는 시간이 동적균형을 이루고 있다. 완전성의 문제는 하나 안에 둘을 집어넣는 문제다. 행복은 종류가 많아 성취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성취도 종류가 많아 사랑이라는 큰 자루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사랑도 종류가 많아 자유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자유도 종류가 많아 존엄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존엄은 더 넣을 이유가 없다. 거기서 만나기 때문이다. 존엄이 정상이고 정상에서는 더 갈 곳이 없어서 만나게 된다. 정상에서는 온 천하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공간은 좌우대칭을 통해 원근을 하나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 이는 한 번 역설이다. 이중의 역설이라야 한다. 이중의 역설은 시간을 통한 대칭이다. 공간의 대칭은 하나의 사물에서 대칭을 통해 압축된다. 시간의 대칭은 여럿이 팀플레이에 의한 대칭을 통해 압축된다. 서양화보다 동양화에서 그런 점을 잘 포착할 수 있다. 단 동양화는 공간적 대칭이 약하다.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수준으로는 서양보다 성취가 높다. 공간적이고 정적인 대칭과 시간적이고 동적인 대칭이 균형을 이룰 때 동적균형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완전성을 체득함으로써 욕망은 극복된다.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어되는 것이다. 욕망은 존엄의 그릇에 담아놓았다가 필요한 때 꺼내쓸 수 있다. 존엄에서 자유를 꺼내고, 자유에서 사랑을 꺼내고, 사랑에서 성취를, 성취에서 행복을 꺼낼 수 있다. 불행한 이유는 나는 혼자인데 내가 상대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환경의 보이지 않는 개입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게 국가와 이웃과 가족들로부터 기대를 받고 부추김을 받고 영향을 받는다. 그런 영향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폭군일수록 실제로는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제멋대로인 조현아도 스트레스 받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그림은 폭의 그림 안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숨어 있다. 이발소그림과도 같다. 한 폭의 그림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공존하고, 낮과 밤이 공존한다. 호수도 있고, 절벽도 있고, 등대도 있고, 바다도 있고 갈매기도 있다. 이집트 신전의 벽화처럼 나열식으로 그리는데 이것은 실로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단 그림이 아니다. 그림은 선에서 면으로 도약하고 다시 입체로 도약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칭을 써야 한다. 대칭으로만이 원과 근을 하나 안에 집어넣어 압축률 높은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대칭이 점, 선, 각, 입체보다 높은 밀도를 만든다. 완전성은 하나가 여럿을 대표하여 그림과 관객이 일대일로 만나게 한다. 디자인이든 패션이든 영화든 문학이든 완전성을 지향해야 한다.
◎ 이성 – 인간이 환경과 일대일로 만나게 한다. ‘하나둘셋넷’ 하고 주워섬기지 말고 그냥 ‘숫자’라고 하면 된다. ‘가갸거겨’ 하고 주워섬기지 말고 ‘한글’이라고 하면 된다. 하나로 하여금 전체를 대표하게 하는 것이 논리요 그 논리를 추구하는 것이 이성이다. 그 논리가 도달하는 정점이 완전성이 있다. 존엄은 세상을 완전성으로 대하는 것이다. 반면 비참은 어디에 딸려있는 부속품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완전하면 통한다. 그리하여 소통한다. 소통은 복제에 의해 일어난다. 복제하는 지점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너=나가 된다. 너와 나는 다르지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그 통하는 부분은 같다. 내가 인터스텔라를 보았는데 그대도 인터스텔라를 보았다면 그만큼 통하고 그 통하는 부분은 놀란감독의 머릿속으로부터 복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같다. 너와 나는 같은 만큼 겹친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대표하고 너가 나를 대표하는 것이 완전성이다. 소리는 귀로 듣는다. 자연의 소리를 귀가 복제하여 뇌에 전달한다. 자연의 모든 소통은 복제로 일어나며, 복제는 평등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의사결정의 지점에서 서로는 평등해질 수 밖에 없다. 대학교수와 초등학생이 대화를 해도 그러하다. 둘은 대등하지 않지만 대등한 만큼만 소통된다. 초딩이 알아먹지 못하는 말은 해봤자 공허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각자 다르지만 대승의 팀플레이 안에서는 모두가 소통된다. 모두가 평등해진다. 각자 한 부분씩 역할을 나눠가지기 때문이다. 대승은 하나의 축구공을 열한명이 공유한다. 누가 공을 차든 그것은 하나의 공으로부터 복제되고 키커로 배달된 것이다. 슛은 한 사람이 넣지만 복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팀에 들기만 하면 된다. 존엄은 대승의 팀에 드는 것이다. 개나 닭은 들지 못하지만 인간은 팀에 들 수 있다. 한 명이 슛을 성공시키면 모두의 성공이다. 한 명이 달에 가도 인류를 대표하여 갔으므로 모두가 달에 간 것이다. 인류가 달에 간 것이지 미국이 달에 간 것이 아니요 암스트롱이 간 것이 아니다. 이성은 존엄 한 방으로 해결하는 자세다. 존엄하면 되고, 팀에 들면 되고, 신과의 일대일이면 된다. 백개의 피리가 연주되어도 하나의 악보로부터 복제된 것이다. 하나가 삑사리를 내도 연주는 망가지고 만다. 행복하고자 하면 행복하지 못하나 존엄하고자 하면 행복해진다. 단 그냥 행복해지는 법은 없고 자유와 사랑과 성취의 단계를 거쳐서 행복해지게 된다.
나는 하나인데 세상은 다국적군이라서 불행입니다. 세상을 하나로 압축해서 일대일로 바라보는 것이 존엄입니다. 자연과 진리와 역사와 문명과 우주를 하나로 압축하면 그것은 신입니다. 압축하는 방법은 짝지어서 대칭시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은 첫째 공간의 대칭이고, 둘째 시간의 대칭입니다. 먼저 소승의 대칭이고, 다음 대승의 대칭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동적균형입니다. 그럴때 존재는 완전하며 완전하면 무언가를 낳게 되고 낳으면 곧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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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일부러 질문하는것 같지만
이런 것을 모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중요하므로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자유와 사랑은 구조론의 용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은 관심을 몰아주는 것이고 혹은 관심을 그 방향으로 트는 것입니다.
이상우교사가 학생들에게 자기 에너지의 90퍼센트를 쏟는다면 제자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곳으로 갈 관심을 제자들에게로 돌린다면 그게 사랑이죠.
꼭 여기서 남녀간의 애정을 떠올릴 이유는 없다는 거죠.
달에 가기 전에는 계수나무 밑에서 방아찧는게 달에 대한 레파토리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인류가 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획득한게 자유가 되고
다른 곳에 갈 관심을 달로 돌린 것이 사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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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이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피곤한 거죠.
인류팀에 들기로 해놓고 계속
'나는 변두리에 있고' 하면서.. 나를 인류팀과 구분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건 마치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응원하기로 해놓고
한국팀이 우승했지만 내가 우승한건 아니고.. 그래봤자 나의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
이런 말 처럼 앞뒤가 안맞잖아요.
한국팀에 들었으면 한국팀 우승이 나의 우승인 거죠.
그래서 다들 즐거워 하는 것이고.
한국팀 우승이 즐겁지 않다면 한국팀에 안 든 것이죠.
비유하자면 기독교를 믿기로 해놓고 계속
그래봤자 예수는 하느님이고 나는 별 볼일없는 인간이고 하는 건데 그건 신앙이 아니죠.
자식이 금메달을 따도
'내 자식이 딴 거지 내가 땄나? 하나도 즐겁지 않아.' <- 아버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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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깨달음을 얻고 명상을 하라는 거 아닙니까?
암스트롱 아버지도 세밀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고 다음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암스트롱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운이 좋아서 우주선 한 번 얻어타고 똥폼잡아본 거죠.
일은 지상의 기지에 있는 과학자들이 다 한 거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죠.
진짜는 아인슈타인이 다 한거고.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죠.
핵심은 뉴턴이 다 한 거고.
뉴턴도 마찬가지 피타고라스 할배한테 신세진 거고.
이런 허무한 말장난이 잼있는건 아니겠죠.
진리의 존재 그 자체에 충분한 기쁨이 있는 것이며
'내가' <- 내라는 것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섹스는 꼬추가 했는데 내가 왜 좋아하죠?
밥은 입이 먹었는데 내가 왜 좋아하죠?
님이 말하는 '거리'는 평소에 님에게 쌓여 있는 좌절감의 표현일 뿐
이 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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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에 감사합니다.
때로는 맥락 연결고리를 찾는 수고를 많은 사람들이 할 수가 있다고 보는데
이런 문답 행간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서 말이지요...^
아마도 먼 훗날 해설서는 그 열배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으로 좋아보이오.<행복의 비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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