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뇌라는 자동차의 운전상태다. 뇌는 몸을 관장하고, 몸은 환경과 연동된다. 마음은 일차적으로 뇌를 일시키지만, 나아가 몸을 감독하고, 크게는 세상을 연주한다.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첫째 뇌가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몸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고, 셋째 세상이 나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나를 너무 좁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 소승의 마음 – 뇌를 뜻대로 일 시킨다. 큰 것과 작은 것이 싸우면 큰 것이 이긴다. 나를 좁게 규정하므로 나와 나 아닌 것이 싸우면 내가 진다. 내가 패배하므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이겨야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방법은 나를 크게 규정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 나여야 내가 그 싸움에서 이긴다. 어떻게 나를 크게 규정할 수 있는가? 큰 단위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면 된다. 나는 의사결정의 단위다.
◎ 나는 의사결정의 주체다. 마음의 문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뇌가 고장난 경우, 둘째 몸이 고장난 경우, 셋째 세상이 고장난 경우다. 자동차로 말하면 핸들이 고장난 경우, 엔진이 고장난 경우, 그리고 도로가 망가진 경우다. 구조론의 원칙은 밖≫안이다. 세상을 먼저 해결하고 나를 다음에 해결한다. 하드웨어를 먼저 해결하고 소프트웨어를 나중에 해결한다. 운전자는 도로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 세상의 고장 – 가족, 회사, 국가로 인한 스트레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잘못 규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결정의 주체다. 내가 담당할 구역을 잘못 정했다. 업무가 과중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같다. 세상 앞에서 나의 포지션이 잘못되었다. 나를 세상의 맞은 편에 세웠기 때문에 세상이 가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달라서 거듭 충돌을 일으키는 데서 고통이 일어난다. 도로를 역주행하는 거다. 이때의 고통은 스트레스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외부요인으로 인하여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중의 상당수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의 잘못이 아닌데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하철 계단에서 미끄러져 자빠졌다면 아무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목격자가 있다해도 모르는 사이다. 그런데도 혼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문제다. 세상과의 관계를 잘못 정했다. 초딩이면 선생님이 언제라도 나를 주시하고 평가한다. 세상은 나를 평가하는 역할이고 나는 평가받는 대상이다. 과연 그런가? 초딩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잘못은 아닌가? 세상을 갑으로 보고 나를 을로 규정한 것이 아닌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의 규모를 세상의 크기만큼 키워놓았다면 그렇게 쫄지는 않는다. 몸의 고장은 뇌 안에 축적된 과거의 데이터가 문제되는 경우다. 뇌는 신체와 연결되어 반응은 몸 전체에 나타난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숨이 가빠지거나 몸이 덜덜 떨린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만 봐도 깜짝 놀란다. 뇌만 놀라는게 아니라 몸 전체로 놀란다. 잘못된 과거의 기억은 새 기억으로 밀어내야 한다. 새 기억을 주입하는 의식적 훈련으로 상당부분 극복된다. 뇌의 고장은 정신분열증과 같이 뇌의 회로가 끊기거나 잘못 연결된 경우다. 이 경우는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것이다. 심하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강박증이나 심리장애도 이 경우로 볼 수 있다. 뇌에서 호르몬을 너무 많이 분비하는 것이다. 성적 흥분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역시 호르몬 탓이다. 뇌의 고장이라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 몸의 고장으로 표현했지만 정확하게는 소프트웨어 문제다. 뇌의 고장은 하드웨어 문제다. 좁은공간 효과 황소들은 벽으로 만들어진 좁은 공간에 가두면 안정감을 느낀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는 의외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거나 스포츠를 관전하면서 느끼는 긴장도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를 잘 제어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 문제가 된다. 고양이들은 박스를 좋아하고 개들은 개굴을 좋아하고 어린이는 벽장을 좋아한다. 좁은 공간이 의사결정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자기를 크게 만들어야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만, 반대로 좁게 만들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자신을 어린이로 퇴행시키려 하는 행동이다. 실제로 퇴행되어 1살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크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정면으로 감당하는게 정답이지만 정 안 되면 도망쳐야 한다.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532 12월 전쟁설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종북을 비방할 뿐 아니라 자신이 신앙하는 기독교도 공격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공격한다는 점이다. 이 자는 한국인 대다수를 공격하고 있다. 인류 전체를 적대하고 있다. 그의 구원의 방주 그룹은 소규모다. 그는 극소수만 구원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류의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 왜? 좁은 공간 효과 때문이다. 70억 세상은 너무 넓다. 그러므로 불안하다. 정신분열을 일으킨 사람은 뇌 안의 각 영역이 서로 쟁투하는 상황이다.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한 분열을 극복하려면? 꽉 조여줘야 한다. 이런 사람은 누가 가서 허그를 해주면 그나마 진정이 된다. 우리는 사이비에 빠진 사람을 논리로 격파하여 설득하려는 잘못된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을 패배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옳지 않다. TV토론에서 진보가 이길수록 유권자의 표는 반대로 간다. 그들을 패배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들은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본다. 이는 물리적인 상황이다. 역시 물리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허그 한 번 해주는 것이 백 마디 말 보다 낫다. 정신적 허그가 필요하다. 그들이 사이비를 추종하는 이유는 사이비가 그들에게 정신적 허그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결속력을 높이는 것이다. 결속력을 높이는 방법은 나를 작게 규정하고 인류 모두를 적으로 규정하여 일대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 소집단의 결속력은 극대화 되고 그들은 강한 정신적 허그를 느낀다. 좁은 벽 사이에 갇힌 황소가 만족감을 느끼듯이 그들의 뇌는 편안해진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의 문 앞에 간첩이 독을 뿌려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자신의 활동반경을 좁힌다. 자신을 꼭 끼는 공간에 가두려 한다. 인민사원의 집단자살과 같다. 일천명이 마사다의 죽음을 모방하여 죽었다. 오대양의 집단자살도 마찬가지다. 박근혜그룹의 심리도 비슷하다. 소집단의 강한 결속력을 원하기 때문에 문고리 3인방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다. 홍혜선의 12월 전쟁설도 그러하다. 많은 휴거설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날자로 자신의 마음을 꽉 조이려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이 분열되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뇌와 전두엽과 변연계와 해마가 갈라져서 싸운다. 좌뇌와 우뇌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분열을 막을 방법은 외부에서 침략자가 나타나 낙동강전선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수구꼴통들은 전쟁을 원한다. 중요한 점은 환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가 현실의 당면한 문제라는 점이다. 당장 아파 죽겠다는 사람에게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장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이고 악몽을 꾸는 판에 말로 가르치려 드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약을 처방하든가 혹은 허그를 해주든가 방언을 번역해주든가 당장 직접적으로 타격해줘야 한다. 정신병 환자들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심리적인 좁은공간효과를 원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그 반대로 심리적인 넓은공간효과를 얻는다. 만리장성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호연지기 효과다. 천하가 다 나의 집이면 나는 이미 좁은 집 안에 있는 셈이라서 걱정할 것이 없다. 나를 키워서 천하를 가득히 채우면 나는 이미 천하에 꽉 끼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 정신병은 심리적 좁은공간효과이며 깨달음은 심리적 넓은공간효과다. 내 수명이 일만년 정도 남아있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다. 수명을 일만년 늘리는 방법은 일만년 역사를 공부해주면 된다. 내 몸통이 지구만큼 크다면 역시 걱정이 없을 것이다. 내 몸통을 지구만큼 키우는 방법은 진리를 공부해주는 것이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통짜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나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와 같다. 나는 죽는 일도 없다. 스트레스는 없다. 결론적으로 꼴통들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눈으로 보는 한계까지가 내 몸뚱이임을 모른다. 나를 작게 규정하므로 갑은 못되고 을로 밀린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보니 좁은 구멍에 숨고 싶어한다. 심리적인 좁은공간효과는 소집단의 단단한 결속력에서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문고리 3인방만 만난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기가 무서운 것이 정신병이다.
마음의 고통은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을 쉽게 하면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의사결정을 쉽게 하는 방법은 세상 모두를 나의 적으로 만드는 결속 방법과 세상 모두를 나의 몸으로 만드는 확대방법이 있습니다. 전자는 정신병자의 퇴행행동이고 후자는 깨달음의 각성행동입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은 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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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와 같다. 나는 죽는 일도 없다. 스트레스는 없다.]
이는 심리적인 해결인가요?
실제 죽는 일이 없는 건가요?
육신이 죽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과 다른 건가요?
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입니다.
나는 의사결정 단위입니다.
나의 의사결정구조 안에서 죽음은 없죠.
죽음이라는 관념은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착각입니다.
유전자와의 게임에서 내가 져줄 이유는 없는 거죠.
육신의 죽음으로 말하면 인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바뀝니다.
세포 수명이 길지 않아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육신입니다.
육신은 흙에서 빌린 것이니 본시 내것이 아니라 논할 것이 없고
마음은 우주라는 큰 마음에 딸려 있으므로 죽지 않는 거죠.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관념이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허구라는 겁니다.
죽음이 없으므로 내세도 없고 천국도 없고 심판도 없습니다.
인간 개개인은 복제본에 불과하고 원본이 살아있는 이상
복제본의 죽음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불생불멸과 같은 의미로 해석해도 됩니까?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중요한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입니다.
나를 육신으로 보는 사람은 아이폰을 교체할 때 마다 죽습니다.
나를 유심으로 보는 사람은 전화번호를 바꿀때마다 죽습니다.
나를 구글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동기화 시킨 정보로 보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구조론의 결론은 나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나 바깥의 상부구조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사결정단위고 의사결정은 실제로 대부분 상부구조에서 일어납니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서 결정된 것을 집행할 뿐이죠.
나를 결정자로 보는 사람은 죽지 않고 집행자로 보는 사람은 죽습니다.
죽든 죽지 않든 그것은 본인의 선택할 영역입니다.
구조론적으로 보면 죽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네요.
다만 나를 어디에 놓느냐에 죽었다고 착각만 있을 뿐이고요.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상부구조를 발견하는 것이고,
이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소승이 대승으로 가는 팀플레이를 하게 되는 것이고요.
결국 세상의 모든 결정권은 나에게 있으며,
내가 대빵인데 대다수의 사람이 이를 모르고 좁은 공간에서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고요.
내가 대빵인데 해놓고 다시 나를 육신으로 좁게 규정하지 않는게 중요하죠.
맞습니다. 나를 육신으로 규정하는 습관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심리적인 죽음도 의미없습니다.
돌이켜보면 10년 전의 심리도 지금의 심리와 거의 유사점이 없는데.
20년 30년 전의 내 마음은 타인이라고 봐야죠.
마음이 이러할진대 몸은 말할것도 없고..
결국 몸이나 마음이나 계속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그 동인은 전부 바깥에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내가 아니라 밖에서 걱정할 일이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