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5314 vote 0 2004.09.07 (22:19:31)

8. 합리주의자 김구

감리서 직원 중에도 신서적을 권하는 사람이 있다. 세계역사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를 갖다 주며 열람을 권한다. 신서적을 보고 깨달은 것은 고능선선생이 유학에 조예가 깊은 것이나 기독교를 믿는 안진사와 절교한 것이 그리 달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리는 학자에게 배우고 일체 문화와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면 국가에 복리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백범일지]

소년 김창수는 인천의 감옥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신학문을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구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고 합리적으로 신학문과 구학문을 접목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요는 합리주의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충분한 성찰이 없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합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기 어렵다. 합리주의에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의 진행되는 전 과정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다.

18세기 지리상의 발견과 뉴튼의 고전역학 이후 서구에서 합리주의가 성립한 것은, 인류가 마침내 그 전모를 알아채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전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야를 마침내 획득한 것이다.

학문이 성숙되는 것은 기둥이 되는 큰 줄기에 차차로 작은 가지가 쳐나가듯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지를 붙잡아 맬 기둥이 없다면? 이 경우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여러가지 가치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 하나에 완전히 의존하고 다른 것을 맹렬히 배척하는 것이다. 이는 합리주의에 반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사상도 그러하다. 좌파든 우파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기독교든 회교든, 유교든 불교든, 다른 것은 배척하고 어떤 하나에 완전히 몸을 던지는 비합리적인 태도가 온존하는 것은 그 전모를 모르기 때문이다. 전체를 총괄하는 시야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전후로 지리상의 발견과 뉴튼의 고전역학이 그 가지들을 붙잡아맬 기둥 줄기의 역할을 해내므로서 마침내 인류가 전모를 본 것이며,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획득한 데서 비로소 합리주의가 성립하였다. 김구와 노무현의 삶에서 그 가지를 붙잡아 맬 기둥줄기의 역할을 해내는 것은 어떤 사업에 착수하여 일이 이루어져 가는 그 전과정을 겪어본 데서 얻어진 생생한 밑바닥의 체험이다.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혹은 어떤 단체를 조직하든지 간에 어떤 일에 착수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아는 사람은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이미 획득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인 신뢰와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이 곧 합리주의다.

반면 그 사업의 전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계율이나, 도그마나, 교리나, 강령이나, 이데올로기나 어떤 임의적으로 정해진 틀에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곧 비합리적인 태도이다. 근대정신은 곧 합리주의이며 이는 인류가 자연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 맺기에서 그 전모를 파악하였기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획득하였기에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구학문에 절어있던 김구가 내부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학문과 구학문의 관계를 정립해내는 것은 그러한 합리주의가 그 정신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서민의 아들로서 타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이루어가므로서 어떤 일의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체험하여 본 바 되기 때문이다.

책상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식인들은 어떤 주의 주장에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비합리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서민출신의 지도자들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현실의 경험이 없는 지식인들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간에서 끼어들어 아는 체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지식은 선배에게 물려받거나 스승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전수 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전모를 알지 못하므로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가치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을 대신하여 판단을 대행해 줄 교리와 강령과 도그마와 계율과 계명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좌파나 우파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어떤 사상에 극단적으로 의지하고 그 사상이 자신을 대리하여 판단하게 하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여전히 근대 합리주의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봉건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다.

중국의 등소평이 실용주의자가 된 것은 프랑스 유학시절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듯이 상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 중에서 특히 합리주의적인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다. 상업이야말로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상반되는 가치관이 충돌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원칙있는 중도노선도 일생을 통하여 그러한 많은 일들을 성공시켜 본 경험에서 나왔다. 노무현이 노조와 재벌을 중재해 본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로서 정몽준과의 타협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구도 상해 임정에서 좌파와 우파의 합작을 성공시켜본 경험에서 단정을 반대하고 남북간의 합작을 시도한 것이다.

합리주의란 곧 종교나 법률이나 제도나 이념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종교나 이념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합리주의는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합리주의는 또 종교나 이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실용주의 노선으로 귀결되곤 한다.

우리는 종종 오해하곤 한다. 김구와 노무현을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원칙가로 오해하곤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김구나 노무현은 한번도 종교나 이념의 도그마 뒤로 숨지 않았다. 김구와 노무현의 강고한 원칙의 견지 태도는,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商道)에서 인삼장사 임상옥이 청나라 장사꾼 앞에서 배짱을 퉁기는 것과 같이 그 또한 하나의 밑바닥의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이며 타협의 기술인 것이다.

알고 보면 김구와 노무현은 강고한 원칙가가 아니라 탁월한 중재자이다. 그들의 원칙은 장사꾼이 제 값을 받기 위해 판매를 거부하듯이 나중 실리와 거래하기 위해 미리 명분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김구와 노무현을 너무 많이 오해해왔다.

[1896~1897년]

21세,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타살한다.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의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다. 얼마 후 외국인이 관련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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