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5405 vote 0 2004.09.02 (17:18:36)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쓴 글이어서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3. 선생의 자주사상

네 소원이 무어냐고 하느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어냐는 물음에도 나는 더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소원]

‘나의 소원’은 건국을 눈앞에 둔 1947년에 씌어졌다. 선생은 왜 독립을 눈앞에 두고 독립이 먼 훗날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독립이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선생의 소년시절 체험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백범의 차남 김신님의 증언을 인용한다.

“대대로 우리 가족을 괴롭혀온 양반이 있었어.아버님이 깊이 사무치셨던 모양이야.중국에서도 본국에 돌아가면 강가놈 원수 갚겠다 되뇌셨을 정도야.아버님이 어느날은 껄껄 웃으시며 이제 원수 갚긴 다 틀렸다고 하시는 거야.광복군 면접을 볼 때 강씨 자손이 응시해서 같이 독립투사가 됐다고.” [아들 김신의 증언]

소년시절 선생의 소원은 이웃마을 양반 진주 강씨, 덕수 이씨보다 더 높은 양반이 되어 대대로 괄시받은 한을 푸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숨은 속뜻이 따로 있다. 백범이라는 호가 우연히 얻어진 것은 아니다.

오왕 부차가 덤불섶에서 자고 월왕 구천이 쓸개를 씹듯 부단한 자기단련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자기암시였던 것이다. 민족지도자로 우뚝 선 다음 선생은 개인의 한을 민족독립의 열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환등기를 들고 각 면을 순회하며 웅변하던 때의 연설문 일부를 인용한다.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의 양반들이여! 평민을 소나 말로 부리던 그 기염이 지금 어디로 갔는가?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의 상놈들이여. 5백년 세월에 양반 앞에서 큰 기침 한 번을 마음놓고 못하다가 이제는 옛날 썩은 양반보다 나은 신식 양반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백범일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지만 나라가 망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놈들은 여전히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양반에 괄시 당하거나 2등국민으로 일본에 괄시 당하거나 마찬가지다.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한 상놈은 여전히 상놈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선생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셨던 거다. 선생의 소원하셨던 ‘완전한 자주독립’은 2004년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난망이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사상적으로 타국에 의존하려는 심리가 남아있는 한 완전한 독립은 아닌 것이다.

백범은 감옥에서 삼남의 불한당 괴수 김진사를 만나 떼도둑들의 조직결성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부분 인용한다.

“도적의 마음만으로는 도적이 될 수 없다. 한 두 명의 좀도둑은 몰라도 수백 명이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지휘하는 기관과 인물이 있을 것이니 그만한 인물이라면 정부 관리 이상의 인격자라야 할 것이다.” [백범일지]

지식인들은 학벌과 서열과 인맥에 의해 그 우열과 지위고하가 드러난다. 반면 못 배운 상놈들은 오로지 인격과 리더십에 의해서만 그 서열과 지위가 정해진다. 그러므로 배운 사람들보다 못 배운 사람을 통제하는데 오히려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소속된 집단 내부에서 제도와 규칙과 서열이 지위를 보장해주는 지식인들은 정신적으로 자주하고 자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못 배운 사람일수록 제 앞가림은 제가 해야 한다. 백범은 밑바닥 생활을 통하여 스스로 주인노릇 하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물겹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간에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미국에 넘겨줄 생각을 한 이승만이나 소비에트 연방에 들어가려 한 박헌영의 어수룩한 생각은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데서 오는 판단착오이다.  

그들은 지식인사회가 연공서열에 의해 지위를 보장해주듯이 국가간에도 조약과 제도가 지위를 보장해 줄 것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백범이 거듭 강조하는 자주정신은 먹물들로서는 절대로 터득할 수 없는 즉 진정 살아있는 지식이라 할 것이다.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은 영구적이다.” [백범일지]

선생의 자주사상을 단순한 민족주의로 오해해서 안된다. 선생은 평민출신으로 밑바닥 생활을 통하여 사회의 제반 문제가 지식과 제도와 법률과 체제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 존엄성의 문제임을 파악하신 것이다.

양반과 상놈의 차이는 존엄성의 차이이다. 양반에게는 자존심이 있고 상놈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것이 없는 한 진정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2003년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대주의가 판치고 있다.

왜인가?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자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선생의 자주사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무현의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에도 이와 유사한 맥락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노동자시절 노무현과 동료 노동자들이 아줌마들을 놀려주기 위해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긴 것이다.

노무현이 그 부끄러운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배우지 못한 때문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소년 노무현은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철새 마냥 이 당으로 저 당으로 왔다갔다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자기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또한 깨달아야 한다. 백범과 노무현이 깨달았던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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