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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6090 vote 0 2009.09.17 (23:17:12)

인생의 세 극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원하던 것 얻었으니까. 이루지 못한 것 많지만, 내 인생 기획범위 안에 있는 것은 대략 파악했다. 충분하다. 진정 얻으려 한 것은 세상과 나 사이의 제대로 된 관계 그 자체였으니까.

한 세상 살면서, 살아내면서 해볼만한 것이 무엇일까? 제왕노릇이 좋을까? 부자놀음이 좋을까? 카사노바라서 즐거울까? 부질없다. 내 스타일 아니다. 진짜 멋쟁이는 ‘스티브 잡스’같은 사람이다.

부자든, 제왕이든 어릿광대짓. 권력이 많아도, 돈이 많아도 두번째, 세번째가 있다. 이렇듯 비교대상 있으면 가짜다. 다른 사람이 기획한 무대에서 공주역을 맡든, 왕자역을 맡든 우스울 뿐이다.

스티브 잡스는 다르다. ‘컴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미학적 기준을 제시했고, 실제로 구현해 보였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이 그렇다. 피카소는 독보적이다. 마이클 잭슨 다음은 없다.

권력이든 부든 명성이든 여러 사람 힘으로 이룬 것을 제 이름으로 간판 달아서야 진짜는 아니다. 아인시타인은 특별하다. 여러 봉우리들 사이의 높은 봉우리가 아니라, 너른 평원에 혼자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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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꼭대기라면 한번 올라가볼만 한가? 사바나에서 사파리 여행은 어떨까? 지중해 크루즈 여행이 좋을까? 흥미없다. 시시하다. 내 대신 고생해서 거기까지 가 준 사람이 있어서 고마울 따름.

내가 가나 그가 가나 마찬가지. 인류를 대표하여 누군가 갔으므로 만족한다. 죽기 전에 한번 쯤 밟아볼만한 세상의 세 극점이 있다면, 그 극은 남극도, 북극도, 에베레스트 꼭대기도 아니다.

이건희 뻐기는 부(富)의 극도, 이명박 우쭐하는 권세의 극도, 뽕지만 깝쳐대는 쾌락의 극도 아니다. 허접때기들이다. 인간 안에 극이 있다. 아름다운 사람, 진정한 사람, 멋진 사람의 극이 있다.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아름답다. 높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진정하다.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멋지다. 세상의 세 극점이다. 노무현과 악수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상관없다.

그런 사람이 있더라. 그런 삶이 또 있더라. 내 안목으로 그 사람 알아보았기에 만족한다. 특별한 사람, 각별한 삶 안에서 빛나는 소통이 아름답더라. 그 순간에 눈빛이 통했기에 행복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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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발명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 독보적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머리가 굵어져서는 민주화를 보고 싶었다. 한국인들의 심리적 노예상태가 슬펐기 때문이다.

백이숙제를 비웃고 소로우를 비웃는 그들의 눈빛 속에서 가득한 두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렇게 죽고싶지 않다는 발버둥 같은 것. 그 눈빛이 안쓰러웠다. 인간의 비참이 그 안에 있었다.

백이숙제는 ‘선비는 이런 것이다’ 하는 기준 세웠다. 소로우는 ‘진정한 삶은 이런 것이다’ 하는 기준 세웠다. 스탕달은 200부 밖에 팔지 못했어도 그 두꺼운 적과흑을 쉬지도 않고 써내려갔다.

뒤마가 삼총사로 책 팔았지만 게임과 같다. 독자들은 ‘요런 장면 나오면 웃어줄께’, ‘요런 장면 나오면 감탄하고 박수쳐줄께’ 하고 조건을 내민다. 귀여운 아바타 뒤마가 스테이지 격파하여 만렙한다.

인생이라는 게임이 그러하다. 돈으로 만렙한 이건희도, 권세로 만렙한 이명박도 귀여운 아바타에 불과하다. 스탕달은 독자 무시하고 인생의 깊은 심연을 탐구하였다. ‘문학이란 이런거야’ 기준 세웠다.

혼자 가는 길이 진짜다. 점수 매기는 심판관 세워놓고 누군가 내걸어놓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게임의 삶은 가짜다. 그 조직된 게임의 룰 안에 갇혀서 당선되고, 집금하고, 명성 얻어봤자 가짜다.

‘웃어줄까 말까’ 조건 내미는 관객 앞에서 불쌍한 어릿광대짓. 박수받고 응원받고 칭찬 듣지만 그 박수, 그 응원, 그 칭찬이 삶을 조종하는 리모컨이다. 떨치고 일어설 때 고독한 평원에서 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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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약과 빨간약 중에 택할까. 길은 두 갈래. 의미의 길과 무의미의 길이 있다. 신을 만나는 쉬운 길과 만나지 못하는 어려운 길이 있다. 서슴없이 선택했다. 남들 아무도 안 가는 쉬운 길을.

인간은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쉬운 길과, 매일 삼천배를 삼년간 해서 서울대 가는 어려운 길 중에서 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한다. 머리로 하는 쉬운 길 버리고 몸으로 때우는 힘든 길을 선택한다.

스트레스 받지만 내 머리로 생각하여 판단하는 쉬운 길 마다하고, 스트레스는 없지만 남의 밑에서 눈감고 3년, 귀막고 3년, 입다물고 3년 합이 9년 시다바리 고생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다.

노력해서 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해야 진짜다. 나는 단지 쉬운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것은 믿음의 길이다. 몸으로 노력하기 어렵고 마음으로 믿기는 참 쉬우니까.

갈림길은 또 나타났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목을 신뢰하고 단지 믿음만 보여주면 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관객의 박수, 주변의 격려, 세상의 요구 다 버리고 신을 만나러 갔다. 담판 지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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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세상과의 관계를 알면 충분하다. 세상의 응답을 듣고 싶었고 그 응답을 들었다. 신은 무엇을 원할까? 신은 신 자기자신을 원할 터이다. 신은 신의 구성품으로 이루어졌을 테니까.

구성품들을 결집하여 신 자신을 완성시키고 싶었을 테니까.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세상은 쌓아둔 레고블럭을 손으로 집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신 자신의 몸뚱이를 자르고 붙여서 만들었을 테니까.


PS.. 과거에 쓰던 ‘심심하면 쓰는 글’에 이어쓰는 글입니다. 심심하면 또 씁니다.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24]꼬치가리

2009.09.18 (11:21:14)

"세상의 응답을 듣고 싶었고 그 응답을 들었다."

부럽소이다.
[레벨:0]산나무

2009.09.18 (21:42:15)

세상을 좀 알려고 서두르다
나를 아는 것이 좀 더 쉬운듯 하여 방향을 틀었는데
여기서 님의 글을 만났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주 심심해 하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레벨:7]꼬레아

2009.09.19 (20:31:15)


'심심하면 쓰는 글' 이 이 정도라
약 올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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