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생각을 쓰지 마라 글은 당연히 자기 생각을 써야 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도리어 글쓰기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 도무지 뭐가 자기 생각이지? 언어의 함정이다. 거대한 착각이 숨어 있다. 자기 생각은 사실 자기 생각이 아니다. 남들이 내게 원하는 생각이 나의 생각으로 위장된다. 남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남자답게, 어른답게, 선배답게? 가짜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서 탈출해야 한다. 글쟁이는 광부와 같다. 내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천하의 생각을 밝은 세상으로 끌어낸다. 광부가 캐는 금은 원래 천하의 것이다. 감추어진 금덩이를 끌어내어 세상 모두에게로 되돌린다. 조선왕조 시대로 돌아가보자. 그때는 시를 써도 정형시를 썼다. 형식이 있으니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다. 형식이 깨진 지금은? 아예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형식이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는건 맞다. 그러나 자유는 사실이지 고급기술이다. 창의는 모방에서 나온다. 시범도 안 보여주고 무작정 알아서 하라고 윽박지른다면 아예 글쓰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형식의 힘을 빌어야 한다. 창의를 강요하는 초딩교육이 잘못되어 있다. 노래를 해도 처음에는 합창을 하다가 나중에는 독창을 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은 자기 일기장에나 쓰는 것이 맞다. 남에게 보이는 글은 달라야 한다.
◎ 자기 생각은 일기장에나 써라.
자기 생각 쓰지 말고 글의 생각 따라야 한다. 글의 생각은 밑바닥 기운에 있다. 아이디어는 당연히 자기 아이디어라야 하지만 글쓰기의 중핵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운이다. 치고나가는 에너지다. 기운을 따라가면 자연히 아이디어가 나온다. 글이란 자신의 기특한 아이디어를 공중에 제안하는 생뚱뜬금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에 고인 에너지와 기세와 흐름을 자기 아이디어로 운전하는 것이다. 밑바닥 기운은 공유된다. 널리 공유되어 있으면서도 감추어진 생각을 슬쩍 들추어내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미녀의 허벅지를 훔쳐볼 때는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게 교양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남파간첩을 그렇게 교육시킨다는 것이 코미디 빅리그의 방법이다. 코미디라는 형식이 민망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한다. 이렇듯 글쓰기는 형식이 중요하다. 형식에는 사회의 기운이 반영되어 있다. 옛날사람들은 다들 쉽게 썼다. 흑인 래퍼도 쉽게 지어낸다. 그런데 옛시조를 가만이 들여다보면 죄 표절이다. 랩음악도 표절이 난무한다. 한국 가수들만 표절하는게 아니다. 랩음악이 원래 그렇다. 형식이 있기 때문에 자동으로 표절이 된다. 옛시조 끝구절은 보나마나 올동말동 하여라, 필동말동 하더라, 갈동말동 하리라 하는 식이다. 뻔하다. 래퍼들도 그렇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한다. 라임따라 가는 거다. 그들은 수백곡을 단번에 만들어낸다. 이백과 두보의 한시라도 그렇다. 상투적인 구절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렇게 형식을 따르다보면 좋은 글이 얻어진다. 그 글은 천하의 글이다. 형식은 세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는 대칭을 따라가기다. 옛시조라면 4.4조가 반복되며 부단히 대칭을 만들어간다. '산이 높다'가 앞서면 '물이 깊다'가 따른다. 높은 산과 깊은 물을 대칭시켜 보인다. 그리고 라임을 준다. ‘산야에는 뻐꾸기, 바다에는 갈매기, 논밭에는 따오기, 표절에는 여오기’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토대의 공유를 드러낸다. 인간을 전율하게 하는 것은 에너지를 낳는 토대의 공유다. 그러므로 시조든 한시든 초장에 자연을 논하다가 종장에 인간으로 방향을 튼다. 자연은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다. 공유의 효율에서 에너지가 얻어진다. 인간의 뇌가 원래 이런 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냥 쥐어짜서 자기 생각을 쓰는게 아니고 자연에 묻혀 있는 임자없는 글을 광부처럼 캐내는 것이다. 대칭과 라임 그리고 토대의 공유 이 세 가지만 연습해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
◎ 대칭으로 펼쳐가라.
이는 글 자체에 내재한 질서다. 글 자체의 기운과 호흡을 따를 때 힘있는 글이 된다. 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고 자기를 개입시키면 민망하다. 누가 물어봤냐고? 그런건 일기장에나 쓰시지?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려도 좋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건 윤동주 개인 사정이다. 그걸 왜 떠드느냐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 왜 괴로워 하느냐고? 어디 아프냐고? 웃기잖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 별을 누가 지키겠는가? 별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공유된 자산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개인 생각을 쓴 것이 아니라 천하의 생각을 쓴 것이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윤동주같은 사람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별을 지키는 별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 별은 대한민국의 존엄이라는 별이다. 그네 무리가 건들면 부정탄다. 형식이 없는 자유시로 보이지만 거기에 내밀한 형식이 있다. 사私와 공公의 대칭구조가 있다. 글쓰기 규칙이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면 곤란하고 SNS라는 형식에 맞는 추임새를 넣어주어야 한다. 주장은 SNS가 하고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변주한다. SNS의 치고 나가는 방향성에 숟가락 얹고 올라타는 거다. 그냥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쥐어짜는 식의 글은 글이 아니다. 그거 똥이다. 버려라. 남의 생각을 글로 써라 초딩일기라도 그렇다. 자기 생각을 쓰려고 하니 자기 경험으로 좁혀진다. 초딩은 실제로 발생한 어떤 사건을 써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딩은 일기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쓴다. 선생님이 검사할 거잖아. 가짜다. 자신이 겪은 사건 중에 남에게 보고할만한 내용은 접시 깨고 꽃병 깨고 거짓말하고 엄마한테 혼난 거 밖에 없다. 일기를 쓰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을 쓰지 말고 자기 집에 둥지를 튼 제비 생각을 써보는건 어떨까? 자기 집에서 키우는 화분의 봉숭아꽃 생각을 써보는건 어떨까? 이 정도만 나와주면 벌써 한달치 일기를 몰아쓸 수 있게 된다. 글은 머리를 쥐어짜서 자기 생각을 쓰는게 아니다. 천하에 가득한 남의 생각을 대변인노릇 하는 거다. 글쟁이는 광부라야 한다. 금을 캐듯 글을 캐낸다. 글은 산에 있고 들에 있고 사회에 있다. 숨겨져 있다. 작가는 인터뷰어가 된다. 그들의 생각을 들어주는 것이다. 중간의 전달자 역할만 하면 된다. 자기를 배제하는게 핵심이다. 따분한 글과 활기찬 글 글쓰기 강좌에서 알려주는 문법이나 수사법 위주의 글쓰기는 사실이지 따분한 글쓰기다. SNS에서 승부를 보려면 활기찬 글을 써야 한다. 활기찬 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비트는 것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악기를 쓰느냐가 중요하다. 피아노를 잡으면 된다. 건반이 많잖아. 형식을 비트는 방법은 첫째 문장 안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비트는 것이다. 둘째 관측자인 주체와 관측되는 대상의 관계를 비트는 것이다. 셋째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비트는 것이다. 한국어는 동사가 뒤로 가므로 한국어 문장으로 쓰면 따분한 글이 된다. 이를 비틀어서 활기찬 글을 쓸 수 있으며 그 방법은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용하는 것이다. 뒤집고 또 뒤집으면 된다. 두 번 뒤집었을 때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는게 중요하다. 동전을 뒤집는건 한 번 뒤집는 거다. 두 번째는 테이블을 뒤집어야 한다. 관점의 종류도 그렇다. 처음에는 말을 하는 1인칭 화자 중심이다. 두 번째는 그 말을 듣는 상대방, 혹은 말하는 대상이 중심이다. 이는 한 번 뒤집은 것이다. 이를 다시 한번 뒤집으면? 그 주체와 대상이 공유하는 제 3자다. 제 3자의 객관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다시 뒤집으면? 본래대로 돌아오면 안 된다. 제 3자까지 관통하는 것은 나의 성장이다. 나의 동動이다. 이를 다시 뒤집으면 천하의 성장이다. 이것이 최종결론이다. 모든 글의 종착역이다.
◎ 나는 아무개를 좋아한다.
5단계로 계속 뒤집어지며 규칙이 바뀐다. 이때 공유하는 토대를 건드린다.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그 말해지는 대상과 내 말을 공유한다. 셋재는 제 3자가 둘을 공유한다. 넷째는 나의 성장이 제 3자까지 전부 공유한다. 마지막은 천하의 성장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 이렇게 차례로 양파껍질을 벗기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토대를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다. 글을 쓸 때는 대칭 4부터 역순으로 가야 한다. ‘그냥 내 생각은 이래.’ 하고 주장하면 ‘누가 물어봤냐고? 니가 뭔데?’ 하고 되치기 들어오지만 토대를 노출시키면 승복할 수 밖에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의 진보라는 토대에는 항복해야 한다. 글 내용에도 선과 악의 대칭 혹은 고수와 하수의 대칭이 있지만 글의 형식에도 대칭이 있다. 대칭을 비트는 것이 인상주의다. 형식을 비트는 인상주의 글쓰기로 활기차고 씩씩한 글, 굳세고 당당한 글을 쓸 수 있다. |
"자기 집에 둥지를 튼 제비 생각을 써 보는건 어떨까?"
Soooo Coool!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