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와 답 어떤 문제에 어떤 답이 있는게 아니다. 그냥 문제라는 녀석이 별도로 있다. 모든 문제와 답에 공통된 모형이 있다. 무턱대고 답을 찾으려 들지 말고, 일단 문제 그 자체를 바르게 조직해야 한다. 무작정 답을 찾으려 한다면 문제를 틀에 박아 고정시킨 것이다. 틀려버렸다. 대개 문제는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문제로 규정하는게 문제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사건의 형태를 가진다. 사건은 나무가 자라듯이 자란다. 기승전결로 이어가는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어느 단계에 개입할 것인가다. 오히려 문제를 키워야 해결되는 수가 많다. 문제를 고정시켜 놓고 답을 끼워맞추는 식은 환자를 죽여놓고 수술하는 격이다. 살려가면서 수술하는데는 고급기술이 소용된다. 문제와 답 사이에는 등호가 성립하므로 문제=답이다. 문제를 찾았다면 이미 답을 찾은 것이다. 특히 철학문제와 같은 추상적 질문은 답을 모르는게 아니라 문제를 조직할줄 모르는 것이다. 문제는 모형이다. 사건에 적합한 구조의 모형을 적용하면 된다. 기승전결의 모형에 맞추면 된다. 문제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다. 대개 부분에 대해 전체를 묻거나, 전체에 대한 부분을 묻는다. 원소를 들고 집합을 찾거나, 집합을 들고 원소를 찾는다.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단순히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문제, 둘째 대칭의 짝을 찾는 문제, 셋째 기승전결로 전개하는 사건의 맥을 찾는 문제다.
◎ A는 A - 부분에서 전체 첫째 ‘A는 A’는 부분에서 전체를 찾는다. 사과를 손에 쥐고 ‘이것(원소)은 사과(집합)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초딩들이 개별적 존재를 구분하는 문제다. 이건 개고, 저건 소고, 저건 말이야 하고 이름을 맞추는 거다. 개는 개의 집합에 속하고, 소는 소의 집합에 속하고, 말은 말의 집합에 속한다. 숙맥이라는 말이 있다. 숙맥불변은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뜻이다. 반대로 숙맥분별에 성공하면 초딩수준은 졸업한 셈이다. 둘째 ‘A나 B’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다. 이건 대칭구조 안에서의 짝짓기다. 중딩이 되면 선택을 학습한다. 상하, 고저, 장단, 음양, 남녀 하는 씩으로 세상은 무수한 대칭의 쌍이다. 이때 대칭되는 둘은 집합의 원소다. 인간집합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원소가 있다. 맞선보러 온 남자는 파트너로 여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남자가 나왔다면 곤란해지는 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중딩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다. 이성을 만난다 해도 어떤 남자(여자)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는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자기 포지션을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인생이 하나의 일대사건이라는 점을 이해못한 것이다. 답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잘못 조직한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자기에게 맞는 짝을 선택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불씨를 살려가며 사건을 만들어가는 인생이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해서 문제라는 나쁜 놈을 없애버리겠다는 식은 곤란하다. 살살 달래서 운영의 묘를 살려가야 한다. 누구를 만나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를 키워가는 현재진행형의 사고를 얻어야 한다. 문제는 뜻밖에 좋은 녀석일 수 있다. 해치울 생각을 버리고 아끼는 자동차를 운전하듯이 문제를 살살 몰아야 한다. 손톱을 깎거나 방청소를 하듯이 단칼에 쳐버려야 할 문제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더 큰 틀에서는 문제를 살려가는 가운데, 부수적인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생에서 만난 어떤 문제이든 길게 보면 추억이 되는 여행코스다.
◎ 초딩의 A는 A – 이건 볼트다. 정답은 메커니즘이다. 정답은 정해져 있다. 어떤 문제의 정답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정답이다. 문제는 모형으로 존재하고 메커니즘은 그 모형을 작동시킨다. 메커니즘은 ‘A면 B’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 분별하거나 짝짓기한 것에 동動을 부여하여 시간상에서 진행시킨다. ◎ 정답의 메커니즘 - ‘A면 B’.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 기본적으로 선택하겠다는 태도를 버려야한다. 짜장이냐 짬뽕이냐는 선택해야 하지만 짜장이 나오든 짬뽕이 나오든 거기에 맞추어서 비벼먹고, 말아먹고, 데쳐먹고, 볶아먹고, 구워먹고, 회쳐먹는 나만의 대응카드를 마련해두면 된다. 어떤 문제가 출제되든 대처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
◎ 틀린 태도 – 짜장은 선택하고 짬뽕은 반대한다. 죽음과 같은 고난이 닥쳐도 인간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말기암 환자가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대부분 태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자기만의 대응카드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벼먹고, 말아먹고, 데쳐먹고, 볶아먹고, 구워먹고, 회쳐먹는 수단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와 같은 막연한 질문이라면 기승전결의 모형에 맞추어 문제를 재조직할 수 있다. 이 질문의 주어는 인간이다. 인간이면 개인과 집단이 있다. 둘 사이에서 의사결정권이 해답이다. 집단의 대표성을 얻어 집단에서 개인으로 의사결정권을 넘겨받는 문제다. 자식을 낳아 집단을 만들어도 된다. 발명을 하거나 창작을 해서 자기 권리를 생산하는 수도 있다. 결국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환경과 내가 얼마나 밀접한가이다.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긴밀한 사람은 비벼먹고, 말아먹고, 데쳐먹고, 볶아먹고, 구워먹고, 회쳐먹는 다양한 수단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어쨌거나 상관없다. 자기에게 맞는 카드로 대응해주면 된다. 결국 집단 안에서의 의사결정능력이 답이다. 볼트는 앞서고 너트는 따른다. 인생에서 무엇이 앞서느냐다. 상호작용의 긴밀함이 앞선다. 대표성이 앞서고 존엄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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