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696 vote 0 2014.08.25 (20:51:55)

   


    구조주의는 세상을 구조로 바라보자는 사상이다. 구조에 대해서라면 서구 구조주의 철학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의 사유는 구조 그 자체에 천착하지 않고 있다는 잘못이 있다. 그들은 원하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이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구조를 동원한다. 그들은 공격대상인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할 뿐 정작 구조 그 자체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그들은 이웃가게 음식이 나쁘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 가게에서 무엇을 파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비주류 입장에서 주류를 친다. 공격대상은 이전에 주류를 형성한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 이전에 주류를 형성했던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앞 서 있다. 이게 잘못된 거다. 외부의 다른 것에 각을 세운다는 사실 자체로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하는 거다. 항해하는 배는 자기 엔진으로 가야 한다. 남의 배에 예인되고 있는 형세라면 곤란하다.


    창조론의 진화론에 대한 공격을 예로 들 수 있다. 창조론은 진화론을 비판하는데 골몰할 뿐 정작 창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진화론 항목을 검색하면 창조론의 생트집 주장이 더 많이 검색된다. 그런데 창조론항목을 검색하면 검색되는 콘텐츠가 거의 없다. 대신 기독교, 회교, 힌두교 따위가 살짝 언급된다. 이건 엉뚱한 거다. 창조론에 창조가 없다. 그들은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에 탁란하고 거기서 야당노릇 한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진화론의 야당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창조론을 주장한 기독교의 야당이다. 서구의 구조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야당이다. 이렇듯 야당만 있고 정작 여당은 없다.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 자기 콘텐츠가 없다. 남의 사상이 틀렸다고 해서 자기 사상이 맞다는 증거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러한 전개가 전부 연결된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종보스는 누구인가? 진화론이다. 키는 진화론이 쥐고 있다. 왜 진화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나? 진화를 설명해야 진짜다. 거기서 진짜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진화론조차 창조론을 비난하는데 골몰할 뿐 정작 진화의 메커니즘 그 자체는 옳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화론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제시하는게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틀의 교체다. 세상을 진화로 보아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생물을 넘어 무생물까지, 기업의 진화, 국가의 진화, 문명의 진화, 인격의 진화, 자본의 진화까지 모두 설명하는 진화론은 없다. 그래서 필자의 구조론이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 비판에 그치는 소극적 구조주의 말고 세상을 통째로 설명해내는 진짜 구조주의다. 생물분야에 좁게 적용되는 진화론을 일반화시키면 구조론이 된다. 진화론이 특수구조론이라면 구조론은 일반진화론이다.


    ◎ 사상의 최종보스는 진화론이다.≫진화론의 야당은 기독교의 창조론이다.≫창조론의 야당은 마르크스주의다.≫마르크스주의 야당은 서구 구조주의 사상이다.≫이러한 전개를 전부 한 줄에 꿰어 일반화 시키면 필자의 구조론이다.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단점은 콘텐츠의 빈곤이다. 구조주의를 검색하면 인류학과 언어학에 대한 기술이 뜬다. 순수한 구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총으로 적을 쏘려고 들뿐 정작 그 총을 기관총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못한다. 한눈 팔지 말고 순수하게 구조 그 자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자기 콘텐츠가 있어야 진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이 아니라 사회론을 써야 했다. 사회주의자는 사회론을 쓰는게 맞고, 구조주의자는 구조론을 쓰는게 맞고, 창조론자는 창조 그 자체를 해명하는게 맞다. 진화론을 비판한다고 창조론이 인정되는건 아니다. 여당이 잘못했다고 야당에게 표가 가는건 아닌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진화론은 진화 그 자체에 천착해야 한다. 생물의 진화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일반화 시켜서 모든 것의 진화를 해명해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진화론≫창조론≫마르크스≫구조주의≫구조론이 큰 틀에서 한 줄에 꿰어진다. 개별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주는게 중요하다. 무엇인가? 족보다. 이렇게 전부 연결해보면 커다란 족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세상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가문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족보다. 필요한 것은 세상의 족보다.


    생물의 족보라면 진화다. 그런데 족보를 써도 기술원칙이 있는 거다. 부부는 무촌이고 부자는 1촌이며 형제는 2촌이다. 그리고 선대와 후대를 구분하여 시간순서로 나아가는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족보는 정기적으로 종중회의를 열어 다시 만든다. 진화도 이러한 구조로 설명해야 한다. 무엇인가? 그것은 의사결정원리다. 진화도 의사결정원리 중심으로 풀어가야 한다. 의사결정원리는 DNA를 규명하는 방법으로 접근된다. 갈라파고스에서 관측된 것은 참고가 되는 방증일 뿐 그다지 쓸모가 없는 거다.


    구조가 해명하는 의사결정원리가 진화를 설명한다. 생물의 진화 뿐 아니라, 조직의 발전, 문명의 진보, 물질의 탄생, 국가의 발전, 자본의 팽창, 광물의 결정에 두루 적용된다. 무엇이 진화하는가? 조직의 구조가 진화한다. 팀이 진화한다. 야구라면 야구선수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치고달리기작전이 진화하는 것이다. 생물체가 진화하는게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방법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개체 단위가 아니라 생태계 단위로 규명되어야 한다.


    독일군이나 일본군이 진화하는게 아니라 독일군이나 일본군의 작전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편제에 반영된다. 병사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군이니 군단이니 사단이니 여단이니 하는 것이 진화한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개인, 가족, 부족, 민족, 국가, 인류라는 각 의사결정단위들 사이에서 의사결정 방법이 진화하는 것이다. 보수는 개인에게 덤태기를 씌우고 진보는 되도록 높은 단위에 책임을 묻는 방향의 차이가 있다. 이 단위들 사이의 관계가 긴밀한 정도에 따라 야구라면 치고달리기 작전도 나오고 번트 작전도 나와주는 것이다.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사람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족보라면 세상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진화다. 진화는 구조의 진화다. 구조는 의사결정단위들의 집합이다. 구조 그 자체의 진화를 해명하는 것이 의사결정학이다. 족보가 조금 더 과학적인 족보로 바뀐 것이다. 야후검색에서 구글검색으로 검색방법이 바뀐 것이 진화다.


    검색으로 보면 양으로 승부했던 알타비스타, 목록을 잘 모아놓은 야후, 그리고 데이터의 중요도를 판정해주는 구글이 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진화한 검색엔진인가? 다윈의 진화론은 알타비스타와 유사하다. 진화를 뭔가 양을 불리는 것으로 여긴다. 데이터는 많은데 내가 원하는 정보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방향설정이 잘못되어 있다. 진화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세상은 다양한 의사결정단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진화론≫창조론≫마르크스≫구조주의가 한 줄에 꿰어진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점진적인 의사결정이다. 창조론은 하느님이 단번에 결정한다.≫마르크스는 과학이 단번에 결정한다.≫서구 구조주의 사상은 다시 점진적으로 결정한다.


    ◎ 단박결정론 –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뉴턴적 세계관
    ◎ 점진진화론 – 진화론, 서구 구조주의, 아인슈타인 세계관


    족보를 꺼내 위아래로 페이지를 넘겨보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뉴턴의 결정론을 만나게 된다. 뉴턴의 기계적 결정론은 세상이 단박에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창조론과 유사하다. 설계도를 탁 던져주면 바로 공장에서 제품이 짠 하고 나와주는 것이다. 뉴턴은 처음으로 근대적인 사유를 열어젖힌 사람이지만 사실은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근대과학의 성과는 뉴턴의 완벽주의를 깨뜨리는 데서 출발한다.


    상대성이니 불확정성이니 하면서 세상의 자궁은 다시 오리무중으로 되돌아갔다. 세상은 하느님이 설계도를 던지자 곧바로 공장에서 완제품이 튀어나왔는지 아니면 DNA라는 설계도와 진화라는 공장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조금씩 만들어 왔는지다. 구조론은 상호작용론이다. 상호작용론은 공장과 설계도가 상호작용한다는 개념이다.


    자연은 설계도를 토대로 존재를 빚어내지만 동시에 존재가 설계도를 빚어낸다. 이에 어울리는 개념이 양자론이다. 양자론은 세상이 완제품의 집합이라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180도로 뒤집어놓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시공간과 에너지라는 설계도와 물질과 운동이라는 완제품이 서로 상호작용한다.


    ◎ 양자론의 상호작용론 – 시공간과 에너지라는 설계도가 물질과 운동이라는 완제품을 빚어내고, 물질과 운동은 다시 시공간과 에너지를 연출한다. 설계도는 추상이고 완제품은 구상이다. 두 세계는 출렁대며 서로 넘나든다.


    필자의 구조론은 양자론의 상호작용론을 따른다. 물론 이는 현대물리학계에서 정립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다. 물리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값을 발표할 뿐 세상의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제출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물리학계가 제출하지 않는 그 시나리오다. 세상은 단박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의사결정단위들의 집합이다.


    ◎ 단박결정론 – 하느님, 과학, 혁명이 단박에 세상을 바꾼다.
    ◎ 점진진화론 – 세상은 미끄럼틀을 타듯 사선을 그리며 서서히 변한다.
    ◎ 상호작용론 – 세상은 계단을 오르듯이 급진과 조정을 반복한다.


    최신과학의 여러 보고들은 구조론의 상호작용론과 일치한다. 세상은 짠 하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45도 각도로 사선을 그리며 서서히 변하는 것도 아니고, 계단식으로 변한다. 그런데 계단에 막혀서 아주 못 가는 수도 있고, 연어처럼 계단폭포를 뛰어올라 계속 가는 수도 있다. 세상은 설계도를 보고 제품을 뽑아내는 한편으로 제품을 보고 다시 설계도를 찍어낸다. 양자 사이에는 상보성에 따른 대칭과 균형이 요구된다. 세상의 진보는 2보전진과 1보후퇴를 반복하며 나선을 그린다. 한 걸음 전진할 때 마다 모여서 족보를 다시 만들기 때문이다.


    진화론과 분기론


    진화론이 최종보스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방향이 틀렸다. 다윈의 진화론은 혼자 진화한다. 비유하면 알타비스타검색이다. 구조론의 상호작용론은 반드시 파트너가 있다. 이건 구글 검색이다. 이용자는 그냥 어떤 정보를 원하는게 아니라 어떤 정보와 다른 정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고 싶은 것이다. 알타비스타는 그냥 단어를 찾아준다. 단어는 정보가 아니다.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지배할 때 그 권력관계에 의해 비로소 정보가 되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암수라는 짝을 가지듯이, 상호작용은 당연히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이때 권력관계가 발생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1에서 2로 가지만, 상호작용론은 2에서 1로 간다. 플러스 방향이냐 마이너스 방향이냐다. 구조론의 정답은 마이너스다. 양자론도 이와 같다. 불연속 2가 입자 1이 된다. 홀수는 없고 짝수만 있으므로 양자의 세계는 불연속적인 팀들의 집합이다.


    지구에 단 한 명의 인간만 있다면 한 명도 없는 것과 같다. 남녀 두 명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의 불연속성이다. 모든 존재는 대칭≫비대칭의 절차를 밟아 존재 그 자체를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출발점은 대칭을 이룰 수 있게 반드시 2라야 한다. 2는 상보적으로 대칭된 상태이며, 대칭은 통제가능한 상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상태다. 2가 1로 붕괴되면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공간 복합체인 양자에서 물질입자로 도약한다. 이는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증된다. 우리가 자연에서 입자로 아는 것은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상태, 계가 붕괴된 상태, 에너지가 손실된 상태다. 돌아가는 팽이가 아니라 쓰러진 팽이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죽여야만 관측된다.


    ◎ 진화론 – 어린이는 불완전하나 어른이 되면 완전하다.
    ◎ 구조론 – 어린이는 완전하나 갈수록 불완전해져서 죽는다.


    근본적인 차이는 다윈의 진화론이 갈수록 좋아질거라는 기대인데 비해, 구조론의 상호작용론은 갈수록 나빠지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알타비스타는 검색이 잘될수록 뭔가 불편해진다. 분명 좋은데 실제로 써보면 좋지 않다. 사실 자동차도 처음 출고될 때가 완전하고 쓸수록 망가진다. 엔트로피의 법칙도 그러하다. 100억년 후 지구도 사라지고 태양도 무너진다. 우주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여기서 창조론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지만 인류에게 강렬한 영감을 준다. 그래서 끈질기게 생명성을 이어간다. 처음 에덴 동산에서 인류는 완전했다. 선악과를 먹고 이후 나빠졌다. 구조론의 일부 측면은 이와 유사하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사건의 시작부분인 기起가 중요하다. 진화도 마찬가지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초반에 분기가 잘못되면 지렁이나 아메바로 가서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다. 처음 식물로 자리를 잡으면 팔자가 꼬인 셈이다. 인간사회도 그렇다. 봉건사회라면 처음 노예로 태어나면 불운하다. 결혼을 해도 그렇다. 처음 파트너를 잘못 정하면 피곤해진다.


    족보는 권력관계를 나타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알타비스타 검색이라서 구글이 정리해서 보여주는 권력관계를 보여주지 못한다. 족보가 검색은 되는데 아담과 이브를 찾을 수 없다. 시조가 족보책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생물은 35억년 전 지구에 출현한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되었다. 공통조상이 있다. 권력서열 1위는 아담과 이브다. 제일 먼저 검색되어야 한다.


    최초에 등장한 하나의 세포, 최초에 등장한 하나의 가족이 권력서열 1위에 올라 모든 진보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의 보편적인 구조가 다양한 형태로 분기한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자동차의 구조와 건축의 구조와 인체의 구조가 별도로 있는건 아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브에서 유래한 하나의 족보를 가지듯이 모든 구조는 하나의 공동조상을 가진다. 그리고 분기한다. 진화가 아니라 분기다. 족보를 추적해 들어가면 계속 하나로부터 분기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같다. 계속 갈림길이 등장한다. 구글에는 있고 알타비스타에는 없다.


    ◎ 생물은 하나의 세포에서 진화에 의해 다양하게 분기되었다.
    ◎ 세상은 하나의 구조에서 의사결정에 의해 다양하게 분기되었다.


    분기를 설명하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세상은 구조가 복제되어 차례로 분기한다. 컴퓨터는 하나의 반도체가 복제되어 분기를 거듭한다. 수십억 네티즌이 모두 하나의 페이스북을 쓰듯이 모두 하나의 공동조상을 가진다. 차례로 분기한다면 처음이 중요하다. 분기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한번 분기할 때마다 하나의 가능성을 잃는다. 인생도 그렇다. 처음 어느 학교에 진학하느냐, 다음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 다음 어떤 사람과 결혼하느냐를 결정하면서 차례로 분기가 이루어져 갈수록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린시절의 꿈과 멀어져 간다. 갈수록 이상을 잃고 현실의 쓴맛을 본다. 그게 진화다.


    ◎ 다윈의 진화 – 진화하면서 무언가 이득되는 것을 얻는다.
    ◎ 구조론 진화 – 분기를 거듭하면서 많은 가능성을 잃는다.


    우리는 막연히 진화한다고 여기지만 그게 사실은 분기하는 것이다. 분기할때마다 하나를 잃고 대신 무엇을 얻는다. 가능성을 잃고 파트너를 얻는다. 우리는 얻은 것만 생각하고 잃은 것은 셈하지 못한다. 다윈의 진화는 안개 가득한 미래를 향해 꿈을 품고 막연하게 나아간다. 구조론의 현실은 분기할때마다 하나씩 꿈을 잃는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면 종착역이다. 거기서 죽는다.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라보자. 계속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조금씩 목적지에 다가선다. 더 이상의 분기점은 나타나지 않는다.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끝난다. 구조론은 사건의 기승전결로 완결된다. 그리고 끝난다. 끝이 나야 정답을 말할 수 있다. 진보의 정답, 인류의 정답은 팀플레이라고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답은 역시 팀플레이다. 2로 팀을 이루고 그 팀이 진정한 하나가 될 때 1로 완성되어 끝난다. 분기를 거듭하며 팀의 융합을 해치는 방해자를 하나씩 제거하여 완전한 합일이 이루어질 때 사건은 종결된다. ‘우리는 과연 하나인가?’ 이 질문을 계속해간다.


    다윈의 진화론은 소년의 막연한 희망에 불과하다. 인생은 거듭되는 분기의 연속이다. 그대는 부단히 갈림길 앞에 선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수준을 높여간다. 그대가 세상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 완성된다. 그리고 종결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정답이 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942 열역학과 구조론 2 김동렬 2014-09-13 6593
2941 몇 가지 이야기 5 김동렬 2014-09-12 7787
2940 구조론의 법칙 김동렬 2014-09-11 6972
2939 구조론과 디자인 1 김동렬 2014-09-10 6720
2938 구조론적 사유 1 김동렬 2014-09-08 6694
2937 중간자를 제거하라 1 김동렬 2014-09-05 6989
2936 모든 문제의 정답 2 김동렬 2014-09-05 6610
2935 의사결정학 간단요약 김동렬 2014-09-04 6483
2934 자유의지와 집단의지 김동렬 2014-09-03 6531
2933 의사결정학의 개요 김동렬 2014-09-02 6359
2932 의사결정 방법 2 김동렬 2014-09-01 7294
2931 의사결정학으로의 초대 2 김동렬 2014-08-31 6609
2930 약한고리를 보호하라 4 김동렬 2014-08-28 7530
2929 구조론은 한 방이다. 7 김동렬 2014-08-26 7468
» 진화론에서 구조론으로 김동렬 2014-08-25 6696
2927 답은 상부구조에 있다. 1 김동렬 2014-08-24 6939
2926 집단의지 1 김동렬 2014-08-22 11215
2925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3 김동렬 2014-08-20 7794
2924 모든 예비동작은 가짜다 1 김동렬 2014-08-18 7123
2923 인간이 오판하는 이유 1 김동렬 2014-08-17 7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