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과 밸런스론 -9월 7일자 동영상강의 해설입니다.- 구조론의 의미는 양자론을 발전적으로 해체 혹은 재해석, 재구축하는데 있다. 구조론의 ‘구조’개념은 원래 원자론의 ‘원자’개념을 해체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착안된 개념이다. 원자론은 학계에서 기술적으로 폐기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 숨통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 대체재로 나온 양자론이 원자론을 정면으로 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양자론의 태생적 한계다. 원자론은 근본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에서 나왔다. 고대인 상상력의 산물이다. 반면 양자론은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나왔다. 출발점이 다르다. 원자론이 연역적 이론인데 반해 양자론은 귀납적 이론이다. 먼저 가설을 세우고, 다음 모형을 만들고, 다시 이를 검증하는 순서로 가는 것이 원자론의 연역이다. 양자론은 그 반대로 이미 확보된, 과학적 검증을 거친 데이터를 토대로 모형을 만들어간다. 이는 거꾸로 된 전개이다. 그러므로 두 이론이 모순, 대립, 충돌하는 접점이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상호보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에서 눈속임에 불과하다. 둘은 결국 가운데서 만나 충돌한다. 원자개념과 양자개념의 공존은 불성립이다. 양자론이 찾으려 하는 최소입자는 없다. 원자론을 깰때 양자론은 완성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입자는 하나의 밸런스다. 본질에서 크기와 상관없다. 이론적으로 무한히 작은 입자가 무한히 만들어질 수 있다. 구조론이 양자개념의 여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부구조를 해명한다. 양자론에서 양자(量子)라는 이름 자체가 어색한 표현이다. 양(量)은 데이터다. 데이터는 아날로그 개념이다. 입자는 디지털 개념이다. 원자론이 상상한 디지털 모형에 아날로그 데이터를 억지로 꿰어맞추다 보니 만들어진 지극히 모호한 개념이다. 그때문에 양자론은 외부와의 폭넓은 접점을 가지지 못한다. 물리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문학 분야로 진출하지 못한다. 상대성개념, 불확정성개념이 철학에 미친 영향에 비해 양자론의 영향은 미미하다. 기존의 세계관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양자론은 여전히 원자론이 만들어놓은 고대인의 상상력 울타리 안에서 기능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유와 행동을 지배하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다. 인간이 그러하므로 마땅히 그 인간의 대상인 자연도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가 틀렸다. 원자론적 세계관을 정면에서 깨부수어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인간의 본질은 개체가 아니라 관계망이다. 인간이 그러하므로 자연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입자가 아니라 구조다. ### 양자개념의 핵심은 에너지의 내부에 방정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방정식은 곧 밸런스다. 하나의 양자는 하나의 밸런스를 의미한다. 하나의 밸런스가 하나의 입자다. 자연은 입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입장에서 입자로 보여지는 ‘관계의 밸런스’로 이루어져 있다. 입자가 도시의 빌딩이라면 관계는 그 빌딩과 빌딩 사이를 잇는 도로에 해당한다. 관계의 밸런스는 그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곧 네거리다. 네거리에서는 달리는 자동차가 신호등을 보고 멈춘다. 잘 달리던 길이 빌딩에서 막히듯이 길은 네거리에서 막힌다. 네거리가 인간 입장에서는 단단한 입자로 보인다. 그러나 네거리는 막히면서 동시에 뚫린다. 입자가 단단한 알갱이라면 구조론이 말하는 관계의 밸런스는 강(剛)과 유(柔)의 두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 영자역학이 말하는 불연속성 개념은 구조론의 비반복≫불연속≫비가역≫비분할≫비순환 성으로 정리된다. 이 다섯 성질은 다섯 가지 유형의 밸런스다. 양자역학은 밸런스의 역학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자연계에는 다섯 가지 힘이 있다. 이는 다섯 가지의 밸런스다. 밸런스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때로 감추어져 있다. 두 미는 힘이 마주보고 교착되어 감추어지면 겉으로는 입자로 보인다. ● 중력 - 밀도의 밸런스 ● 강력 - 입자의 밸런스 ● 약력 - 힘의 밸런스 ● 전자기력-운동의 밸런스 ● 마찰력 - 밸런스의 해체 밸런스가 힘을 가진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오뚝이가 그 예다. 오뚝이를 밀면 넘어진다. 넘어지다가 다시 복원된다. 그 복원력이 존재한다. 바다의 배가 파도를 만나 기울다가 다시 복원되듯이. 그러한 복원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성립한다. 50 대 50의 밸런스가 존재한다면 49까지는 그 복원력이 작동한다. 51을 넘으면 밸런스는 붕괴한다. 오뚝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세번째 힘이 밸런스다. 즉 오뚝이가 다시 일어나는 지점이다. 네번째 운동은 그 밸런스의 붕괴과정이다. 두번째 입자는 밸런스 위의 밸런스다. 작은 밸런스들이 모여 큰 단위의 밸런스를 이룬다. 국회가 노무현을 탄핵해서 오뚜기는 넘어졌다. 한나라당+민주당의 힘이 열린우리당 40석의 힘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이 촛불항거로 일어나서 넘어진 노무현을 도로 일으켜세웠다. 하부구조의 밸런스 붕괴를 상부구조가 개입하여 원상복구한다. 원통 위에 올라가서 발로 원통을 굴리는 서커스 아저씨와 같다. 밸런스는 무너지고 원통은 구른다. 서커스 아저씨는 가속적으로 넘어진다. 그러나 원통이 계속 구르기 때문에 다시 원위치 된다. 와인잔을 나르는 웨이터와 같다. 잔에 가득 든 와인은 넘치지 않는다. 웨이터가 조심스럽게 걸으면 넘친다. 성큼성큼 걸으므로 오히려 리듬을 탄다. 양자의 다섯가지 불연속구조는 자연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첫번째 밀도의 밸런스는 양떼를 모는 양치기개와 같다. 양들은 내부에 엔진을 가진 독립개체들이다. 각자의 밸런스가 있다. 이들은 흩어져 있다. 외부에서 양치기개가 개입하면 모여서 거대한 떼를 이룬다. 작은 밸런스들이 모여 거대한 밸런스를 이룬다. 더 큰 단위의 독립개체를 구성한다. 계에 밀도가 주어진 것이다. 중력은 계에 밀도를 주었을 때 하부구조에서 작은 단위의 밸런스들을 규합하여 상부구조에서 큰 단위의 밸런스를 탄생시키는 힘이다. 강력은 큰 단위의 밸런스가 하부 밸런스 붕괴를 흡수하는 힘이다. 이 원리로 존재는 외력에 대한 자기보존이 가능하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외력의 작용에 대응하여 내부를 보존하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일어나므로 외부에서 입자로 보여진다. 약력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밸런스는 50 대 50이다. 입자는 부분의 밸런스 붕괴를 전체의 밸런스가 개입하여 복구하지만 약력은 이 기능이 없다. 50 대 50을 기준으로 복원하거나 붕괴하거나다. 전자기력은 밸런스가 무너지는 과정에서의 힘이다. 이 힘은 외부로 전달된다. 시공간적으로 전개되는 형태로만 나타나며 특정 위치에서 유지되지 못한다. 내부에 힘을 감추어두지 못한다. 지구 자기장의 존재는 지구핵 내부의 철성분이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밸런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찰력은 계 바깥으로 이탈하여 빠져나가면서 밸런스가 소멸하는 힘이다. 일식집에서 주는 된장국에서 우주의 탄생 모습을 알 수 있다. 된장입자 하나하나가 운동성을 가져서 가운데로 모이며 핵을 만든다. 태양열에 의해 더워진 공기의 운동성이 태풍의 핵을 만들듯이. 운동성에 의해 서로 배척한다. 햄스터가 서로 배척하면 결과는 서로 잡아먹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정조건에서 미는 힘의 교착이 외부 관측자에게 당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겨서 핵이 만들어진다. 들판에 흩어져 있는 일만 마리 양떼가 각각의 자유도를 가진다. 각자의 운동성을 가져야 외부의 양치기개에 대응하여 하나의 입자(떼)를 생성한다. 필자가 강한 개인을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원자 - 딱딱한 알갱이 ● 양자 - 원자처럼 단위를 보이는 정체불명의 수학적 에너지 질서 ● 구조 - 다섯가지 단위의 밸런스 형태로 나타나는 에너지 질서. ∑ |
나이탓일까, 날씨 탓일까 했지만...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자아 때문이었을겁니다.
'강한 개인'이라는 항목에 밑줄을 급니다.
타인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강한 개인.
지난 해였지요. 일본인 물리학자는,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노벨 물리학상을 거부합니다.
http://afp.google.com/article/ALeqM5irXCw55asDj4JKbDbWBvd9B8CQrA
실은, 그의 발견은, 이미 그의 젊은 시절에 나온 이론들이고,
그걸 자기 것인양 축하하는 서구의 축하 파티에는 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저항행위입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 나타난 일본 전후세대의 비굴한 태도에 대한,
전전 엘리트 세대의 호통일수 도 있겠군요.
이미, 달러는 과도하게 발행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 로컬 커피점에 밀리던 스타벅스는, 아시아에 불어닥친,
서구바람에 힘입어, 새롭게 파이넨싱해서 돈과 새로운 인테리어로 재무장해
미국 본토를 잠식합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본이전에 자본을 조종할 지성입니다.
철학자들이 개점휴업 혹은 철학 역사 선생화된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그 지성의 거대한 교향악을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자는 말이 아니라,
개인에게 부여된 극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작업들을 얼마나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바라건대, 골리앗을 보고 주눅든 이스라엘 국민들이 되지 않고,
물맷돌을 던지는 다윗의 기개를 보고 싶습니다.
기회는 외부에서 오는법. 일본의 전전 세대처럼 퇴행할게 아니라,
외부의 파도를 가볍게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 자본을 요리할 지성을 선보여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