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과 구조론 오해하는 분이 있어서 했던 말을 반복하게 되는데, 구조론은 오직 구조론에 관심이 있을 뿐 양자론에 관심없다. 양자론을 언급해도 그것은 구조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구조론을 이해하려면 세계관을 바꾸어야 하고, 세계관을 바꾸려면 우주관부터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현대차의 디자인을 비판하더라도 현대차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디자인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다. 디자인은 직관적으로 파악이 된다. 직관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접근법이 다른 것이다. 양자론에 기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구조론이 양자론보다 앞서 핵심을 간파했다는 증거를 남기려는 것이다. 내가 진화를 언급하면, 교과서에 안 실렸을 뿐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고 핀잔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가 생물학의 발전에 기여하여 실적을 내려고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학계가 어떻게 돌아가건 상관없다. 내 관심은 다른데 있다. 생물의 진화와 자본의 진화는 같다. 진화는 상호작용에 의해 촉발되므로, 껍질있는 생물은 진화를 못한다. 껍질있는 회사는 성장하지 못한다. 껍질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사람은 망한다. 껍질감별 투자법으로 돈 벌 수 있다. 여기에 관심이 있다. 구조론의 실효성만 입증하면 그만이다. 딱 보면 ‘저 회사는 껍질이 생겼으니 성장이 멈추겠군’ 하고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어법으로는 떨어진 점들을 연결하는 거다. ‘저 회사는 세 지점을 연결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5*5*5배 성장하겠군.’ 하고 단박에 알 수 있다. 양자론도 마찬가지다. 껍질감별 투자법이 유효하듯이 양자투자법으로도 재미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내용은 같다. 입자는 껍질이 있다. 양자는 양파껍질 벗기듯이 그 껍질을 벗긴다. 양파껍질을 계속 벗기면? 구조론은 5개의 껍질을 가진다. 3개의 점을 연결했다면 두 개 남았다. 어떤 회사가 껍질을 몇 번 벗겼는지 세어보면 앞으로 몇 배 성장할지 알 수 있다. 다섯 개의 점을 연결했다면 그 이상은 없다. 그냥 딱 세어보고 아는 거다. 그 다음은 돈을 주워담는 거다. 구조론의 결론은 운동이 공간의 진행이 아니라 자리바꿈이라는 거다. 정보는 빛보다 빠르다. 자리바꿈에 의사결정속도가 걸리기 때문이다. 광속은 의사결정속도, 어떤 둘의 자리바꿈 속도다. 자리를 바꾼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 속도가 제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구조론은 미리 예견해둔다. 양자역학이 발달하면 운동을 부정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럴 때 공간도 부정된다. 공간이 부정되면 시간도 부정된다. 시간이 사라지고 대신 순서가 남는다. 공간이 사라지고 대신 방향이 남는다. 방향은 대칭의 방향이다. 대칭은 절대 사라질 수 없다. 자리를 바꾸니까. 잘 모르는건 그냥 에너지에 떠넘기면 된다. 에너지는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정답은 통제가능성이다. 계를 통제하는건 구조의 대칭성이다. 실제로 통제하는건 비대칭이다. 이것이 시공간을 연출해낸다. 예컨대 돈이라는건 실체가 없지만 통제가능성으로 보면 확연한 실체가 있다. 가난한 나라는 대상을 통제하기가 더 어렵다. 통제가능성이라는 관문에 딱 걸린다. 중국을 여행하는데 갑자기 운전사가 버스에서 내리라고 요구했다. 이유를 묻자 바깥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고 한다. 의사결정의 난맥상이다. 금본위제도가 없어지는 판에, 현찰이 사라지고 다들 카드를 쓰는 판에 돈은 실체가 없지만 통제가능성은 분명한 실체가 있다. 통제는 구조의 대칭원리를 따른다. 대칭으로 조건을 규정하고 비대칭으로 일을 집행한다. 이 원리로 모두 설명된다. 어떤 것이 통제된다면 그것은 맞는 이야기다. 입증은 예견을 적중시키거나 혹은 돈을 벌어보이면 된다. 현실에서의 유효성을 입증해보이면 된다. 운동은 없다. 대칭은 있다. 자리바꿈은 있다. 아인슈타인의 광속도 하나의 껍질에 불과하며 그 껍질은 높은 단계에서의 상호작용으로 깨진다. 이것이 최종적인 진실이다. 운동이 없다는건 결국 껍질을 깬다는 말이다. 간단하다. 무엇이든 그 상황에서의 껍질을 찾은 다음 그것을 깨면 된다. 입자를 찾고 그 입자를 깨는 것이다. 껍질은 의사결정단위다. 환경이 바뀌면 상호작용이 달라지고 껍질이 깨진다. 환경을 바꾸면 된다. 생물의 진화와, 물질의 진화와, 자본의 진화와, 정치의 진화는 완전히 같다. 껍질깨기다.
입자론은 I와 YOU로 둘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론은 아니 구조론은, 구조론 중에서도 입자에 선행하는 질은 하나의 LOVE가 있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둘이 하나가 되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존재는 불연속적이다. 의사결정은 I나 YOU가 아닌 LOVE에서 일어난다. 그게 없는게 아니고 있다. 왜? 어떤 것이 통제되면 있는 것이다. 있다없다 하는 논의는 어디서 통제되냐다. 운동이 없고,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다는 말은 거기서 통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단계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항상 한 칸 더 위에서 통제된다. 껍질을 깨고 높은 레벨에서 통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조론은 학계와 관계없이 별도로 입지가 있다. 양자론이나 진화론의 내막과는 별 관계가 없다. 어떤 것이든 같은 툴을 공유한다. 딱 걸리는 지점이 있다.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 |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의미심장합니다.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껍질깨기가 생각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