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구조의 전략2 : http://www.youtube.com/watch?v=8emjnHH4Pdo
상부구조의 전략3 : http://www.youtube.com/watch?v=nGySe3xm5Fg
현상을 타개하려면 저쪽 무뇌좌파와 수구꼴통 그리고 제 3의 힘이라 할 우리 자유주의 세력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차이가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 차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전략의 차이’다. 전략의 차이는 근본 내 안에 에너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남의 에너지, 남의 지식, 남의 것을 빌려 쓰려고 하니 인위적인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고 까다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배후지가 없고 외부에서 보급될 새로운 자원이 없으니 최적화가 필요하고 구속이 필요하다. 창의가 넘친다면, 배후자원이 넉넉하다면, 내 안에 에너지원이 갖추어져 있다면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비교하자면 인터넷과 과거 하이텔, 천리안 따위 PC통신의 차이와 같다. 인터넷은 여러 서버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PC통신은 중앙에 있는 하나의 서버를 모든 네티즌이 공유하고 있다. PC통신에서는 동호회도 주제별로 하나만 개설하게 되어있는 등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다. 천리안에 등산동호회 하나, 바둑동호회 하나, 여행동호회 하나였다. 그래서 모든 동호회에 내분이 일어났다. 인터넷은 그런거 없다. 규칙 자체가 불필요하다. 무제한으로 동호회를 개설할 수 있다. 이는 구조적이고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차이다. 분명히 말한다. 차이가 있다. 우리와 저들은 다르다. ● 최대개입을 표방할 것인가 최소개입을 표방할 것인가? ● 흑백논리, 이항대립적 사고, 대칭적 사고, 선형적 사고로 교착될 것인가 아니면 깨달음, 통합의 관점, 비대칭적 사고, 입체적 사고로 타개할 것인가? 전략의 차이가 있다. 권투라면 아웃복싱이냐 인파이터냐. 바둑이라면 실리냐 세력이냐. 야구라면 빅볼이냐 스몰볼이냐. 축구라면 개인기냐 조직력이냐.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브라질은 선수 자원이 넉넉하므로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처럼 타고난 괴물을 발굴하면 된다. 개인기 위주로 간다. 일본이라면 그런 괴물이 있을 리가 없으니 고만고만한 애들 데리고 조직력을 추구한다. 이러한 본질로 볼때 좌파와 수구는 한통속이다. 둘다 ‘법가’를 추종한다. 다른 점도 있다. 좌파들은 주로 새 법을 지어낸다. 예컨대 부유세를 새로 신설한다든가 따위다. 그들은 계속 세금의 종류를 늘린다. 수구들은 ‘법대로’를 외친다. 법대로 한다면서 미네르바 구속하고 노무현 탄압한다. 근데 그게 법대로냐? 법 가지고 장난치는 거다. 그들에게 법은 통제수단이다. 통제위주라는 점에서 둘 다 한통속이다. 좌파들의 통제수단은 계몽, 조직, 노조, 정당, 조합, 연대, 구국의 강철대오, 슬로건 등이요 수구들의 통제수단은 검찰, 경찰, 공무원, 군대, 자본, 조중동 등 눈에 보이는 힘이다. 기성권력이다. 왜 인간을 통제하려 할까? 자기 내부에 동력원이 없기 때문이다. 좌파들은 ‘서구의 지식’이라는 남의 동력원에 빨대를 꽂았고, 수구는 미국일본 위주 외국자본이라는 남의 동력원에 빨대를 꽂았다. 외부 에너지원에 종속되었으므로 융통성이 없다. 줏대가 없다. 무엇이 다른가? 좌파나 우파나 지식이나 자본이나 하부구조일 뿐이다. 우리는 상부구조다. 상부구조는 밸런스를 추구하고 하부구조는 파격을 추구한다. 그들은 지식과 자본 중 하나에만 의존한다. 그게 파격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지만 우리는 날개가 아니라 몸통이다. 왼발과 오른발은 파격을 추구하지만 몸통은 밸런스를 추구한다. 우리는 중도가 아니다. 왼발과 오른발을 묶어버리면 자빠진다. 중도는 왼발과 오른발을 묶어서 자빠진 것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밸런스는 그 둘을 동시에 통제하면서 그 보다 높은 곳에서 그 둘의 파격을 허하는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은 부지런히 몸통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몸통에서 벗어날수록 몸통은 앞으로 전진할 뿐이다. 몸통이 왼발 오른발을 중심으로 잡아당기지 않는다. 밸런스는 리듬에 의해 저절로 맞아진다. 정답은 정해져 있다. 선실리 후세력, 선밸런스 후파격, 선아웃복싱 후인파이팅, 선빅볼 후스몰볼, 선개인기 후조직력이다. 그 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최후에 승리한다. 챔피언은 정해져 있다. 살살 도망만 다니는 선수는 운 나쁘게 한 방 걸리면 뻗는다. 무턱대고 공격만 하는 쪽은 갈수록 기운이 빠져 결국 자빠진다.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져야 하며 선 실리확보 후 세력을 엮어야 한다. 자본가들은 이미 벌었으므로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가진 것을 지키려 한다. 수비만 한다. 노동자들 역시 평생 노동자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투쟁하여 얻으려 한다. 지식인 역시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평생 강단을 벗어나지 못한다. 할 줄 아는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젊은 세력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신분이 고착되지 않았다. 포지션이 끝없이 변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무한히 세력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융통성이 있다. 양쪽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높은 포지션을 차지한다. 다른 거다. 우리의 에너지원은 궁극적으로 창의성에 있다. 창의란 다르게 생각하기다. 포지션에 따라 창의할 수 있는 선택지 수가 정해져 있다. 선수는 감아차기를 할 것인가 무회전 킥을 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코치는 조금 더 다양하게 경우의 수를 고민한다. 명보가 패스하면 천수가 받고 하며 복잡한 구조를 생각해낸다. 이는 선수가 고민할 수 없는 것이다. 천수가 고참 명보에게 ‘이쪽으로 패스해’ 하고 지시할 수 없다. 코치만이 지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진다. 감독은 더욱 많은 선택지를 가진다. 히딩크는 ‘경기장에 물을 뿌려 못자리로 만들어버려. 이탈리아팀 자빠지게’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포지션이 높아야 창의할 수 있다. 우리 자유주의 세력과 저쪽 경직된 좌우꼴통의 차이는 포지션의 차이다. 구단주≫감독≫코치≫선수≫관객 순으로 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전략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항상 상대방의 실수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극단에 서려고 한다. 무조건 상대방 반대쪽으로만 돌면 상대방의 실수를 이용할 수 있다. 반사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없는 김영삼이 김대중의 반대편으로 돌며 라이벌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만으로 뜬 거다. 창의력이 있는 집단은 나의 힘과 적의 힘을 동시에 이용하므로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때로는 적의 힘을 역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적들과도 일정한 정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김대중이 김종필의 힘을 이용한 것과 같다. 대범하게 가고 융통성있게 가야 그것이 가능하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가 좌파나 우파의 반대편에 있는게 아니라 혹은 그 중간에 끼어 있는게 아니라 한 차원 위에서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데 있다. 이런 고도의 전략은 과거에 불가능했다. 왜?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환경이 변했으므로 전략이 변해야 한다. 태권도는 자기의 힘으로 때리고 유도는 적의 힘으로 업어친다.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자가 최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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