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은 세상과 나의 관계설정이다. 의사결정은 관계설정단계에서 거의 세팅이 이루어진다. 관계가 뒤틀려버린 상태에서 바로잡기는 불가능하다. 존재는 곧 사건이며 사건의 어느 단계에서 개입하느냐다. 사건의 초기단계에 개입해야 한다. 첫 단추를 꿰는 문제다. 먼저 사건의 입구와 출구를 찾아야 한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다. 에너지≫사건≫의사결정≫팀플레이≫진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계에 에너지가 투입되면 곧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의사결정을 해야 하며 팀플레이를 통해 진보를 달성하는게 목적이다.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생태계는 생태계대로 각자의 진보를 찾아간다. 개인은 개인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자본은 자본대로, 문명은 문명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각자 자기방식의 에너지와 사건과 의사결정을 찾아내고 팀플레이를 통해 자기 방식의 진보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 틀린 관점 – 생존경쟁≫적자선택.
생존경쟁과 적자선택으로 보는 관점은 잘못이다. 이는 기승전결로 전개하는 사건의 전모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사건의 입구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현재 진행중인 사건의 중간에 함부로 뛰어든 것이다. 나와 타자로 구분되었다면 이미 포지션이 나누어지고 역할이 배분된 것이며 이는 사건이 진행중임을 의미한다. 사건이 진행된 결과로 상황이 왜곡되어 있다. 이는 에너지의 입구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경우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게 되고 따라서 실패한다. 에너지가 작동하는 권리와 권력의 메카니즘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건의 입구를 찾아야 에너지를 통제하여 의도를 달성할 수 있다. 생존경쟁≫적자선택은 진행중인 사건에 뛰어든 바 거짓이며, 에너지≫사건≫의사결정≫팀플레이≫진보로 보아야 한다. 동물도, 식물도, 생태계도, 자본도, 개인도, 국가도, 문명도 오직 진보의 외길을 간다. 퇴보는 없다. 퇴보하는 자는 도태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아남는게 목적이 아니고 진보하는게 목적이다. 에너지의 인플레 때문이다. 조직은 계에 투입된 에너지를 내부에서 처리하는 구조를 가진다. 조직이 10의 에너지를 처리할 수 있는데 11의 에너지가 들어왔다면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소대원 한 명이 늘어날때마다 소대원의 임무와 역할을 바꿔야 하는 것과 같다. 에너지를 주는 태양 때문이다. 에너지의 출입이 균형을 맞추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는 같은 사건이 반복되므로 논할 것이 없다. 그것은 돌처럼 죽어 있다. 살아있는 것만 논의대상이며 논의대상은 언제나 에너지 인플레이션 상태다. 에너지의 법칙에 따라 조직의 진보는 필연이다. 다만 초과된 에너지를 처리하게 되면 조직의 관성이 작용하여 일정기간 상대적으로 계에 에너지가 부족해지므로 보수의 조정역할 역시 구조의 필연이다. 그러나 언제나 진보가 이끌고 보수는 따르게 되어 있다. 인간은 진보만 결정하면 된다. 보수는 자동으로 제어된다. 연비운전을 할 때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엑셀레이터 페달만으로 완벽하게 통제된다. 세상은 진보만으로 완벽하게 운영되나 이는 고수의 영역이다. 하수들은 속도조절을 못하므로 진보와 보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언제나 진보가 먼저고 보수는 따른다.
◎ 조직은 에너지 인플레이션 상태이므로 최종적으로 진보다. 어느 길로 가든 최종적으로는 진보로 간다. 보수는 진보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바른 관점은 진보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는 시간이 걸린다. 진보는 팀플레이다. 손발을 맞추면 장기전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초읽기에 몰려서 바로바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퇴근시간 안에 업무를 마쳐야 한다. 시험치기 전에 공부해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현장에서는 시간제한이 걸려있다. 인생이라는 큰 사건 안에 오늘 하루라는 작은 사건이 있다. 작은 사건은 바로바로 종료된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진보의 관점을 배척하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 잘못되고 만다. 진보의 관점은 자신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공급자 측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자신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갑이 아니라 을이다. 당장의 업무에 치어 잘못된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현실은 진보고 나발이고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판한다. 프로야구 감독들은 오늘 1승을 위해 내일 쓸 투수를 당겨썼다가 팀의 밸런스가 깨져서 한달 후에 연패를 당하게 된다. 오늘의 딱 한 번 무리한 투입이 한달 후에 10연패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갭이 있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오판한다. 다나카 인대가 끊어졌다. 아직도 많은 선수와 감독들이 충분한 휴식만 주면 하루에 140구를 던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심지어 다르빗슈도 그런 말을 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이 있으므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작년 일본에서의 무리한 투구가 올해 MLB에서 다나카의 인대를 끊었다는 인과관계를 모른다. 우선 내가 살고봐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게 오류임은 1년 후에 입증되므로 알 수가 없다. 오늘 져주어야 내일 살아난다. 물론 결정적인 승부처라면 다르다. 마지막 시합이라면 자원을 있는대로 투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은 시합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고도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요구된다. 관점이라면 주관과 객관이 알려져 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1인칭, 2인칭, 3인칭 시점이 있지만 역시 문제가 있다. ‘화가 났다’는 말과 ‘화를 냈다’는 말은 다르다. ‘화가 났다’는건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화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화를 낸 것이다. 그런데 조직의 보스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으므로 화가 났다면 화가 난 것이다. 무책임한 보스들은 감정적으로 행동해놓고 그것을 합리화 한다. 아기들도 언제나 옳다. 아기가 울면 배가 고파 울든, 심심해서 울든, 자신의 상태를 엄마에게 잘 알려준 것이다. 바위도 언제나 옳다. 사람이 바위를 비켜가야 하지 바위가 사람을 비켜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작거나 제한된 지점이다. 의사결정을 해야할 미지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명확하게 판명이 난 상태다. 의사결정은 필요없고 바로 집행하면 된다. 기승전결의 결 단계에 와 있다. 주관적 1인칭 관점이다.
◎ 주관적 1인칭 – 기승전결의 결단계.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사건의 종결단계에서 보고가 들어온다. 주관적 1인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된다. 말 안 듣는 넘은 혼내주면 된다. 간단히 해결된다. 거창한 의사결정은 필요없다. 역설적 2인칭은 정치판에서 야당의 정치공세와 같다. 자신의 주도적인 플랜은 없이, 오직 여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에 기댄다. 김한길, 안철수 못난이 듀오처럼 오직 박근혜와 새누리의 정책실패에 기생한다. 에너지의 공급측이 상대방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상의 사건은 대부분 그렇다. 사장의 지시거나, 선생님의 명령이거나, 고객의 요구거나 어떤 형태로든 상대방에 의해 사건이 일어난다. 나는 가만있는데 말이다. 언제나 원인측이 상대방에게 있으므로 받아치면 된다. 씨름이라면 먼저 기술을 걸지 않고 되치기만 노리는 식이다.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약자포지션에 있으므로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미없다. 이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지만 칭찬은 못 듣는다. 자신에게 특허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는 정권을 얻어도 도로 뺏긴다. 그런데 실력이 없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속임수로 이기는 방법이다. 의사결정은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을 때 능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다. 이는 조직의 보스나, 집단의 리더나, 창의하는 예술가이거나, 씨를 뿌리는 농부거나 자신에게 권리가 있고 힘이 있을 때 들어맞는 법칙이다. 길게 보면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린다면 기승전결의 기에 서야 한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내 인생의 선택권이 있다. 직업을 정하든 결혼을 하든 그렇다. 객관적 3인칭은 사건에서 발을 빼고 심판 위치에서 양비론을 늘어놓는 것이다. 여기서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갈수록 사건의 지평이 넓어짐을 알 수 있다. 더 큰 사건이 되고 더 넓은 영역을 책임지게 된다. 객관적 3인칭은 자신이 갑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런데 갑이 아닌데도 갑이 될 의도로 3인칭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누가 잘못했든 상관없이 양측이 대등해야 내가 갑이 된다. A와 B가 다투는데 누가 잘못했든 내가 갑이 되려면 약자 편을 들어야 한다. 군중심리에 이런 경향이 강하다. 약팀을 응원하는 것이다. 임병장사건의 경우 분명히 임병장이 잘못했다. 그런데 피해자를 탓한다. 피해자가 임병장을 왕따시켜서 벌을 받았다는 식이다. 이는 자신이 발언권을 갖기 위한 의도된 조작이다. 진중권류 사이비들이 양비론을 펼 때 흔히 쓰느 수법이다. 자신은 선수가 아니며 링 밖의 심판이라는 식이다. 이들은 분명히 새누리당이 잘못했는데도 권은희를 나무란다. 그래야 자신에게 마이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자신이 심판자 포지션에 올라설 수 있도록 구조에 맞추어 사건을 왜곡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이들은 승단계에 서서 판돈을 올리려고 한다. 양쪽을 더 치열하게 싸움붙이려고 한다. 이스라엘이 잘못했는데도 유대인의 편을 들어 아랍세계와 서구세계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 든다. 아랍인구는 수억이고 이스라엘 인구는 500만이므로 이스라엘이 옳다는 식이다. 사건이 커질수록 자신에게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면 일본과 미국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일본이 옳다는 식이다. 주관적 1인칭은 사건이 종결되었으므로 편한대로 해버린다. 역설적 2인칭은 자신에게 에너지가 없으므로 눈치를 본다. 객관적 3인칭은 판돈을 올릴 의도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거나 터무니없이 약자를 편든다. 이들은 모두 오류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건이 진행되어 기승전결의 승, 전, 결 단계에 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다면 입학이나 결혼이나 취업과 같은 큰 일에서는 다르다. 자신이 조직의 리더라면 길게 보고 기에 서서, 주체적 1인칭 관점을 소화해야 한다. 객관적 3인칭의 군중심리에 편승해도 안 되고, 역설적 2인칭으로 약자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를 꾀해도 안 된다. 그러다 약해진다. 관점의 선택은 사건의 선택이다. 사건의 어느 지점에 내가 개입하느냐다. 사건의 시초단계에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하수들은 어디가 시작점인지 모르므로 어차피 안 된다. 노예들에게는 역설적 2인칭이 적당하다. 실력이 없는 선수는 받아칠 수 밖에 없다. 삼성은 애플을 베끼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삼성의 도둑질을 비판하지만, 현실적으로 삼성에게는 그게 맞다. 도둑은 도둑질이 맞다. 왜냐하면 별 수 없는 도둑이니까. 그러나 그건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다. 자신이 에너지의 공급자가 되어 능동적으로 사건을 설계하는 것이다. 주체적 1인칭 관점을 훈련해야 한다. 자신이 사건을 일으키는 도발자여야 한다. 육체와 정신 1인칭 주관, 2인칭 역설, 3인칭 객관은 모두 사건 안에서 대칭을 찾는 것이다. 기승전결 구조 안에서 어느 지점에 각을 세우고 자기 입지를 찾으려 한다. 이미 틀려버린 것이다. 에너지가 없다. 사건 바깥으로 치고나가야 에너지를 획득한다. 시장 안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새로 발명하고 창의해야 한다. 자신이 새로 사건을 일으켜야 에너지를 지배한다. 인간이라는 의사결정 주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졌다. 하드웨어가 육체라면 소프트웨어는 정신이다. ‘나’라는 것은 의사결정의 주체로서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프트웨어다. 의미있는 것은 의사결정 뿐이며 의사결정은 정신에서 내려진다. 1인칭, 2인칭, 3인칭의 차이는 공간의 넓이다. 1인칭은 자신만 보고, 2인칭은 상대방까지 보고, 3인칭은 사건 밖에서 전모를 본다. 1인칭에서 2인칭, 3인칭으로 갈수록 시야가 넓어진다. 1인칭 주체적 관점은 사건의 원인측에 서는 것이며, 시간을 투입하여 장기전으로 보는 것이다.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본다는 점이 각별하다. 장기전으로 보면 나라는 의사결정주체로서의 소프트웨어가 있을 뿐이며 그 밖은 모두 하드웨어다. 진정으로 대칭을 각을 세울 지점은 너와 나 사이가 아니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다. 내 몸이 하드웨어일 뿐 아니라 내 고향과, 산과, 들과, 자연과, 세계와, 역사와 진리가 모두 나의 담당할 하드웨어다. 우연히 이 몸뚱이를 얻어걸린 것이다. 우연히 나의 고향에서 태어난 것이다. 우연히 21세기와 마주쳤다. 모두 하드웨어다. 세상 모두가 나의 의사결정영역에 속한다. 장기전으로 보면 그렇다. 나와 너 사이만 의사결정영역으로 좁혀본다면 이미 남의 사건에 말려든 거다. 에너지없이 남의 사건에 휩쓸렸을 때 그 타자의 에너지와 의도에 의해 생존경쟁,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며, 그 잘못된 남의 게임에서 얼른 빠져나와야 한다. 남의 게임은 무조건 진다. 자기가 설계한 게임에서만 승리자가 된다. 대칭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다. 내 몸이 아프거나, 강물이 흐르거나, 바람이 불거나, 내 손이 시리거나, 산이 푸르거나, 내 배가 고프거나 차이는 없다. 원래 쾌감과 고통은 차이가 없다. 뇌가 정보를 해석하기에 달려 있다. 고통을 지배하면 그게 쾌감이다. 다만 내 몸이 심하게 아플 경우 심하면 나의 호흡을 방해한다. 숨을 못 쉬면 의사결정을 못한다. 내가 방해되는 것이다. 그것이 스트레스다. 그런 때는 의사결정을 해주면 된다. 육체적 고통의 문제는 대개 고통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진통제를 처방받아야 할 고통도 있지만 대개 씩씩하게 극복된다. 문제는 스트레스다. 고통이 나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며, 이는 나의 정신적 역량으로 극복할 영역이다. 고통 자체는 감수할 수 있다. 스트레스가 문제이며 이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통해 극복된다. 대부분 남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착각하므로 스트레스가 일어난다. 군에서 이등병이 자대에 배치받을 때 스트레스를 받아 두통을 앓는 이유는 고참이 신병을 갈구는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신참을 갈구는 진짜 이유는 명령계통을 세우려는 것이다.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라고 하면 까야 한다. 그러한 명령을 접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신병은 진짜로 밤송이를 까야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밤송이는 논외다. 무시하라. 명령의 접수가 중요하다. ‘왜 말입니까?’ 하고 반문하면 안 된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포지션 확인이 목적이다. 소대장의 지시가 병장, 상병, 일병을 거쳐 막내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가 중요할 뿐, 그 명령의 실행은 중요하지 않다. 군에서 하는 일의 100퍼센트는 실전에서 의미있을 뿐 현재는 의미없다. 실전에 대비하는 것이며, 실행이 중요한게 아니라 명령계통의 보호와 유지가 중요하다. 이런 내막을 깨달으면 두통은 사라진다. 대부분의 정신적 고통은 뇌의 의사결정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필요가 없으며 합리적인 교통정리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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