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의 관점에서 세계정부는 작동하고 있다. 지식인은 다양성을 좋아하고, 상대주의를 좋아하고, 확실한 정답이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반면 일원성을 말하고, 절대주의를 주장하고, 똑 부러지는 정답을 추구하면 무개념 기독교 광신도나, 철 지난 애국주의자나, 골수 마르크스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 그것은 두고와야 할 20세기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역시 지식인 집단에 만연한 세기말의 분위기가 물을 흐려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양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대재앙의 전조로 암울했던 19세기 세기말과 같다. 조짐은 현실이 되었다. 대파괴 이후에 대건설이 일어났다. 사실이지 20세기는 혁명의 세기였다.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암울해졌다. 여전히 세계는 통합되지 않았고 세기말의 짓눌린 분위기가 돌아왔다.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처럼 서로를 물어뜯는 짐승같은 삶의 모습이 당연한가? 이 물음에 지식인은 냉소주의로 응수한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만병통치약을 찾는다. 비타민 한 알로 모든 병을 고친다는 식의 말이 정기적으로 나돌고 사람들은 솔깃해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만병통치약들이 등장했다. 전염병은 확실히 백신으로 잡아낸다. 세균은 페니실린으로 잡고, 암은 외과수술로 많이 잡는다. 만병통치약은 있다. 병이 백만가지 되므로 한 가지 치료법이 만 병씩 상대한다. 혁명이라는 20세기 만병통치약은 사라졌으나 21세기 스티브잡스 발 스마트 혁명은 격발되고 있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은 물거품이 되었으나,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여진을 이어가다가 21세기에 빅뱅을 일으켰다. 신세기의 찬란한 환상은 전기와 내연기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와 TV로 퍼져나갔다. 2차 세계대전은 특히 흑백영화와 라디오가 밀어붙인 헛소동이었다. 미디어를 통한 세계통합의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사람들은 흥분해서 혁명을 떠들어댔다. 무엇인가? 여전히 상부구조는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뉴턴은 살아있다. 구조의 작동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으로 전개된다. 21세기 스마트 혁명은 다시 세계통합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세기와 같은 물리적 국경의 통합은 아니다. 이제는 정신의 통합이다. 단일한 뇌의 건설이다. 구조론은 질로 시작하여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지만 인간에게 관측되는 부분은 거꾸로다. 양의 통합, 곧 국경통합이 먼저 시도된다. 운동의 통합, 곧 통신망의 연결이 뒤따르고, 다음에 오는 힘의 통합은 미디어의 통합이다. 알리의 권투가 세계적인 흥행을 시범보인 거다. 미국이 달에 먼저 깃발을 꽂고자 줄똥을 있는대로 싸대며 용을 쓴 것은 힘의 통합을 시범하려는 의도다. 세계는 흑백TV 앞에 모여앉아 밤새도록 기다려 달 이미지 한 컷을 얻어보고 짜증을 냈다. 입자의 통합은 이념의 통합이다. 의사결정의 중심을 정하기다. 일찍이 UN의 구상이 있었으나 코미디로 끝났다. 세계정부는 실현될 기미가 없다. 그러나 인터넷 가상공간에서는 얼마든지 현실이 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20억뷰를 달성했다. 세계의 통합은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이다. 최종적으로 인류가 하나의 단일한 뇌를 건설할 때가 질의 통합이다. 자연의 실제로는 질의 통합이 먼저다. 이미 인류는 단일한 뇌를 건설하고 있다. 단일한 의사결정구조를 갖추기다. 한 명의 천재 독재자가 세계정부를 지배하며 빅브라더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이 1984년을 썼을 때 그것은 이미 작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인이 지구촌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영향받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구조론적으로는 세팅이 끝났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았다 해도 컴퓨터는 컴퓨터다.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어야 한다. 결과측이 아니라 원인측을 보아야 한다. 질은 갖추어졌으며, 인류는 통합되었으며, 의사결정의 세계정부는 마음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하드웨어는 갖추어져 있고, 소프트웨어는 훈련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인 신뢰를 쌓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 소프트웨어는 발달한다. 사람들은 다양성을 강조하며 세계통합을 반대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심 그것을 원한다. 자신이 약자일 때는 방어모드로 가서, 다양성을 강조하지만 자신이 강자가 되면 권위를 앞세우며 획일성을 강요한다. 닥치고 날 따르라는 식이다. 지금 지식인은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는 분위기다. 지식의 세기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 때의 시류에 불과한 것이다. 스마트 시대가 본격화 되면 지식의 입지가 살아난다. 세계는 통합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다양화 된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지금은 자본에 의한 물질적 통합이 부각되나 실제로는 권력이 먼저였다. 먼저 정치가의 권력이 양차 세계대전으로 생쇼를 보여준 다음에 자본의 코카콜라가 보여주는 지구촌 싹쓸이 시범이 있었다. 지금 조명받는 자본의 위세도 정치에 비하면 후속부대에 불과하다. 정치가 앞서고 경제가 따르며 그 다음에 문화가 꽃 피운다. 문화의 시대에 지식이 힘을 쓴다. 뉴턴의 혁명은 하부구조에서 진행중이다. 다시 질문하자. 정치적 세계통합에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문화의 다양성에 주목할 것인가? 장기와 바둑의 차이다. 바둑은 한 가지 색깔의 돌 밖에 없으므로 획일적인 게임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행마가 감추어져 있다. 장기는 말의 종류가 7개나 되는 만큼 다양하지만 수는 적다. 어떻든 장군을 부르는 수 외에 없다. 일반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둑이다. 구조론은 바둑과 같다. 지식이 한 쪽만 강조하는 것은 시류에 편승한 것이다. 만병이 있으므로 만병통치약은 있다. 페니실린 한 알로 만 병을 잡는다. 비 오는 날에 미꾸라지가 모여드는 물꼬가 있다. 그곳에 통발을 설치하면 통발에 가득차게 잡힌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딱 걸리는 지점이 있다. 20세기는 어떠했던가? 단시간에 경제가 두 배, 혹은 열 배로 성장하는 일이 무수히 있었다. 스탈린은 중세 농업국가를 단번에 근대 공업국으로 바꾸어놓았다. 김일성도 한 20년은 잘 나갔다. 일본도 80년대는 제법 패권을 휘둘렀다. 지금은 중국이 떠오르고 있다. 20세기는 빠르게 달아올랐고 한편으로 빠르게 식어갔다. 세기말의 우울, 세기 초의 재난, 그 이후의 눈부신 기적, 짧은 환희와 깊은 좌절. 그것이 100년 동안 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변화는 또 일어난다. 역사의 파도는 다시 큰 너울을 일으키고 있다. 수십 억년을 이어온 지구 생태계의 대표선수인 인류호의 바둑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대마 하나 죽었다고 주눅들어 있다면 곤란하다. 의사결정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통합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군은 멍군으로 응수하면 된다. 일반성이냐 다양성이냐는 동적균형의 관점에서 해소된다. 동적균형은 연주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OX문제가 아니다. 일반성과 다양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연주한다. 빠른 호흡에서 빨라주고 느린 구간에서 느려준다. 밀었다가 당겨주고, 조였다가 풀어준다. 거기서 멋진 음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완성한다. 의사결정의 관점으로 볼 때 세계정부는 작동하고 있다. 세계단위로 사유하고 세계단위로 의사결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세계시민적 양식은 훈련되고 있다. 글 한 줄을 써도 세계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브라질을 7 대 1로 이기고도 담담한 독일선수단처럼 세계적으로 표정관리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단위로 신뢰의 소프트웨어가 축적되고 있다. 자기방어에 충실한 비판적 지식인을 넘어 세계시민문화를 주도하는 주체적 지식인이 양성되어야 하는 시대다. 힘을 위주로 하는 지구촌의 하드웨어와 지식을 위주로 하는 소프트웨어가 동적균형을 이루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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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지식인들이 빠르게 인종주의로 회귀.
그걸 따라하는게 맞는양, 비주류지식인들도 타락.
그 와중에, 농구, 야구, 배구, 축구 등을 즐겨보는데, 시장, 리그, 구단주, 선수, 관중, 이 팀플레이를 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게 됨. 그 와중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선입관이, 범죄가 된다기보단, 머쓱해지는 순간을 알게 됨.
8회말 2사 만루에서의 꽉찬 슬라이더, 상대와의 슈블록이후에 넘어가는 속공, 수비수를 제치는 적절한 템포 드리블링, 이상은 선수들이고, 비시즌에도 계속되는, 구단들과 에이전트들의 싸움. NBA파이널이나, FIFA월드컵때 열광하는 팬심. 어느것 하나 버릴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