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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079 vote 0 2014.06.18 (00:31:40)

 

    신과의 일대일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사결정권의 궁극적인 근거는 무엇인가?'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의사결정능력의 획득'이다. 철학의 모든 질문은 결국 이 질문 하나로 환원된다.


    ‘왜 사느냐’거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거나, ‘인생이란 무엇이냐’거나, ‘어떤 이념이 옳으냐’거나, ‘선은 무엇이고 악은 또 무엇이냐’거나, 개인주의가 옳은지, 애국주의가 옳은지, 자본주의가 옳은지, 사회주의가 옳은지 따져보자거나, 혹은 윤리나 도덕은 무엇인지, 또 진리는 무엇이고 도는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이고, 천국은 무엇인지, 결국 압축하면 이 물음이다.


    지류는 본류로 돌아간다. 최종적으로는 의사결정권≫의사결정능력이다.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커다란 물음표다. 거기에 어떤 단어를 집어넣든 결론은 같다. 개의 답은 정해져 있다. ‘멍.’ 끝이다. 개는 의사결정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개는 철학이 없다.


    소의 답음 ‘음메.’다. 끝이다. 소는 의사결정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소는 철학이 없다. 소는 질문할 권리조차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는 의사결정능력이 있는가? 그대는 적어도 개나 소와 다른가? 개에게 없고 소에게도 없는 의사결정능력이 그대에게는 과연 있는가?


    총이 있으면 그 총을 쏘는 것이다. 인생은 총과 같다. 그대 자신이 하나의 총이다. 그대는 인생이라는 총을, 혹은 그대 자신이라는 총을 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그대가 그 총을 쏠 수 있느냐다. 소는 쏠 수 없다. 왜냐하면 소니까. 개도 쏠 수 없다. 왜냐하면 개니까. 개나 소는 의사결정능력이 없으므로 그 총을 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은 있어도 개생은 없고 소생도 없다. 그러므로 개철학도 없고 소철학도 없다. 철학 근처에도 못 간다. 그대는 다른가?


    의사결정능력이 없으므로 의사결정권이 없다. 아기들도 그것은 없다. 아기는 엄마에게 의사결정권이 위임되어 있다. 광신적인 종교인 역시 의사결정권이 없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의사결정권을 교주에게 위임하고 스스로 개나 소가 되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번역기를 돌려보면 ‘멍.’ 혹은 ‘음메.’로 번역된다.


    총은 총알을 쏜다. 활은 화살을 쏘고 삶은 의미를 쏜다. 그리고 화살은 날아가면서 허공중에 또다른 세상을 연출해낸다. 날아가는 화살은 구름과 만나고 햇볕과 만나고 나뭇잎과 인사하고 바람과 대화한다. 그 세계는 활이 창조해낸 또다른 세계다. 원래는 없던 세계다. 그런데 활은 그 세계를 볼 수 없다. 노무현은 노무현이 만들어낸 신세계를 볼 수 없다.


    고흐는 고흐가 만들어낸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은 옳지 않다. 노무현은 현재진행중이다. 노무현이 키워놓은 인재들과, 이땅의 무수한 또다른 노무현들이 기승전결을 이어간다.


    그것은 볼 수 없다. 고흐는 지구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죽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고흐의 그림을 채소밭 울타리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그것을 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예수는 그의 사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있게 결정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기에 서서 승과 전과 결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는 철학할 수 있다. 의사결정능력을 가진다. 그 총을 쏠 수 있다. 그 화살을 쏘아보낼 수 있다.


    작가는 작품을 쏘아보낼 수 있고, 연주자는 음악을 쏘아보낼 수 있고, 싸이는 세상에 말춤을 쏘아보낼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은 당신이 만들어낸 당신의 피조물이다. 그 지점에서 당신은 창조자다. 그 세계를 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기 작품 속의 또다른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아기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 세계를 볼 수 없다. 의사결정권은 엄마에게 위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광신도가 된 자도 그 세계를 볼 수 없다. 의사결정권은 교주에게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개나 소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없다. 의사결정권이 없다. 의사결정능력이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며, 돈도 명성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대에게 의사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돈은 은행의 것이고, 명성은 장안에 떠도는 소문의 것이고, 사랑은 허공에 떠 있고 그대에게 없다. 그대가 세상에 쏘아보낸 화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능력은 간단히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고소공포증이라면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책에는 한 줄도 안 나온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필요하다. 책 보고 고소공포증을 극복한 사람은 아직 없다.


    의사결정능력은 고소공포증과 같아서 누가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게 아니다. 책으로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스스로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릴만한 문제이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그 문제이고, 모든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다.


    이거 해결못한 사람은 어디서 아는 척 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은 아직 지구촌 인류호의 운전면허를 못 딴 것이다. 의사결정능력이 없고 의사결정권이 없다.


    내가 이 문제의 바른 답을 말해준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없는 의사결정능력이 생길까? 천만에! 그럴 리 없다. 신과의 일대일 외에는 답이 없다.


    인간의 문제는 팀의 문제다. 팀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소통의 문제는 의사결정의 문제다. 그런데 절대 소통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대와 나 사이에 절대적인 장벽이 있다. 이 점을 받아들여야 호히려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운전학원의 강사가 절대 알려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직 그대가 정직하게 신과 대면하여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이거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말로 어떻게 해보자는 넘은 귀싸대기를 맞고 쫓겨나야 한다.


    책에서는 절대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다. 논쟁으로는 절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어떤 사람이 책 읽고 운전면허증 땄다고 하면 그 말은 백퍼센트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책은 단 한 줄도 안 읽었지만 운전은 잘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건 참말이다.


    ◎ 책만 읽고 운전면허 땄다. - 거짓말.
    ◎ 책은 읽지 않았으나 운전은 할 수 있다. - 참말


    육조혜능은 금강경을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도 안 통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중국남부 지방 방언은 불교가 융성한 북쪽지역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글자로도 전할 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소통의 불가능을 순수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운전면허 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조르지 않아야 한다. 직접 따야 한다.


    불교로 말하면 선승과 학승의 대결과 같다. 금강경 필요없다. 그 시간에 양자역학 배우는게 맞다. 성경 필요없다. 대지가 성경이고, 자연이 성경이고, 진리가 성경이다. 예수는 학승이 아니라 선승이다. 학승의 교학은 멍청한 신도들에게 돈 뜯어내는 목적 외에는 쓸모가 없다. 하긴 승려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학승이 존재하는 거다.


    네 안에 진짜가 없고 그 진짜가 신의 부름에 자연히 반응하지 않았다면 어떤 경우에도 가짜다. 일대일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곧 대칭이다. 김기덕의 영화 일대일을 떠올려도 좋다.


    모든 철학의 물음은 그것이 인생을 묻든, 도를 묻든, 진리를 묻든, 신을 묻든, 그대가 죽음을 극복하고, 본능을 극복하고, 호르몬을 극복하고, 유혹을 극복하고, 인류를 대표하여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며, 윤리든, 도덕이든, 이념이든, 사상이든 그 독립적 의사결정능력의 수준에 맞추어서 의사결정권이 주어지는 법이며 개에게는 그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는다. 소에게도.


   기에 서서 승과, 전과, 결을 볼 수 있는 사람, 원인에 서서 결과를 볼 수 있는 사람, 이미 확정된 결과를 보는 객관이나 혹은 현장에서 과정을 보는 주관이 아닌, 1인칭으로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사결정권은 주어진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권리,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권리, 인생의 주인이 될 권리가 주어진다. 마침내 그 활을 쏠 수 있다. 


[레벨:11]큰바위

2014.06.18 (06:37:33)

그리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넘어

팀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가야한다. 


그러나 팀임의 의사결정 능력 이전에

개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보장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인류의 인생은 인류가 결정한다. 


예수는 이미 자신이 신이었다고 선언했고, 

제자들에게는 자신보다 더 한 일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정권을 넘겨주었고, 

그 결정권을 사용하는 자마다 신을 울리고, 사람을 울리고, 세상을 울렸다.


공명이다. 

함께 신 앞에서 연주회를 하는 거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간디였고, 마틴 루터 킹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저들 못지 않은 

유관순과 손양원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은 여기 저기서 그런 울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연주자가 되라. 

그대가 총을 쏘라.

신과 일대일로 맞장을 뜨라.


모두 다 같은 말이다. 


아침부터 깨달음에 총 맞았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탈춤

2014.06.18 (07:33:15)

'그대는 다른가?'


아직  '멍'하고 ' 음메'하고 있었군요.


다만 희망합니다.

만남을 통해서 낳음으로 이어지기를

궁극에서는 일대일로 마주서게  되기를


[레벨:5]msc

2014.06.18 (08:48:42)

멍생,,,음메에생,,,,인생왈생,,,,,하하하,,,,웃음,,,,,감사,,,므흣 해지네요,

[레벨:3]낙오자

2014.06.18 (09:45:48)

나가 뒈지든 노숙을 하든 제발 독립 좀 해라 이것들아~~~!!!

프로필 이미지 [레벨:3]형비

2014.06.18 (11:14:26)

일단 신에게 내 운명을 맡긴 사람들은 구조론과 조화하기가 힘들 것 같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4.06.18 (11:29:49)

그 사람들은 신을 살해한 사람들입니다. 

신의 의미는 인간이 가진 의사결정권의 최종적인 근거를 찾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의사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은 

곧 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도자기 빚는 도공은 

자기 맘대로 도자기를 빚습니다.


그러면 도자기가 작품이 안 됩니다.

도자기는 도자기의 논리를 따라야 비로소 도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2.jpg


이 검은색 도자기는 흑자일까요?

천만에! 이 도자기는 고려청자입니다. 


도자기 색깔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청자의 온도와 기법으로 구우면 청자입니다.


이렇듯 자체의 논리를 가지지 못한 도자기는 도자기가 아닙니다. 

흰색 도자기라고 해서 백자인 것은 아닙니다.


검은색 백자도 있습니다. 

백자의 태토를 쓰고 백자의 온도에 구워야 백자입니다.


신이 인간을 맘대로 빚으면 그렇게 빚어진 작품은 인간이 아니죠.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변희재, 박그네, 윤창중, 문참극, 기타 우수마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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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22]이상우

2014.06.18 (14:15:24)

어쨌든 인류호 타려고 아둥바둥 거리는 중인데,

공동체 속에서 행동하는 나는 과연  인류대표자의 마음인가 자주 확인하는 중.

구조론 연구소 자체가 인류호의 조타실임에 분명하니 긴장 좀 타야겠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4]죽어문화개혁

2014.06.18 (19:48:03)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좋다며

생을 찬미하는 자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귀요미라는 천둥벌거숭이들


무지와 공포에 근거한 부채의식에 사로 잡힌

빚의 아들들


상식조차 없거나, 상식밖에 없는

머저리들


아무튼 삶의 주인공이 아닌 모든 노예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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