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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054 vote 0 2014.03.11 (23:52:53)

    자동차의 탐구가 자연과학이라면, 운전기술의 탐구는 인문과학이다. 이렇게 말하면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유물론을 표방하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 자동차를 실제로 운행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어선다. 그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신천지로 간다. 가야 한다. 가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다.


    필자가 비판하는 광신가, 궤변가, 회의가는 자동차를 운행하지 않는다. 존재가 상호작용이면, 그들은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인문정신의 우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운행하면 인간이 우위에 선다.


    차를 세워놓기만 한다면 차가 주인이다. 사람을 쓸고 닦으면서 그 차에 광이나 낼 뿐이다. 운전을 배우는 동안도 차가 갑이다. 자연과학도 인문과학도 인간에게 권이 없다. 철학만이 인간중심이 된다.


    광신가는 정해진 코스로만 다닌다. 지구가 태양을 돌 듯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간다면 자동차가 아니라 기차다. 굳이 따지자면 지구는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주변의 궤도에 머무르는 것이다.


    광신가의 자동차는 가지 않는 자동차다.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성경을 섬기면서 동성애 문제나 양성평등 문제와 같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부단한 의사결정의 요청을 거부하는 무리가 광신자다.


    이념을 섬기는 좌파에도 그런 무리가 있다. 시장원리를 섬기는 우파 중에도 그런 무리가 많다. 종교적 광신가와 정치적 광신가가 있다. 어느 쪽이든 부단히 변화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거부한다.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면 철학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종교든 과거의 흘러간 답변 말고 2014년 지금 이 순간의 새로운 호흡, 새로운 판단, 새로운 상호작용을 제시하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다.


    궤변가는 자동차의 놀라운 성능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운전실력을 닦을 필요는 없고, 다만 좋은 자동차로 바꾸고 자동차를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견 그럴 듯 하다.


    자전거의 달인이 되기보다 좋은 차를 사는게 낫다. 구글 무인자동차가 나오면 갈고 닦은 운전실력은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 착각이다. 그 무인시스템을 운전할 사람은 별도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경을 통제하지 않고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필요없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를 자처한다. 교묘한 말로 현실의 한계를 내세우며 인간의 굴복을 요구한다. 돈 앞에 장사있냐는 거다.


    철학은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주의다. 이상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핑퐁과 같다. 탁구공이 넘어오면 그 공을 다시 받아넘겨야 한다.


    탁구공에 절하고 있으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환경에 대한 인문정신의 우위에 기초한다. 인간이 우위이므로 열위인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 자동차의 운행은 자동차의 현재위치 부정이다.


    자동차의 현위치를 부정하지 않으면 운전이 아니고, 세태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이상주의가 아니다. 이상주의가 아니면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인류 전체가 단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일치하는 지점은 미래의 지점일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지점도 모두의 시선을 일치시킬 수 없다. 지구의 70억이 모두 한 지점을 본다면 그 지점은 지구 바깥이어야 한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던 45년 전의 그날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졸음을 참으며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처럼 모든 지구인의 시선이 일치한 이유는 그 곳이 지구가 아닌 달이었기 때문이다.


    회의가는 거대담론을 부정하고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앎의 문제는 철학이 아닌 과학의 영역이다. 회의주의 근거는 상대성이다.


    상대성은 자기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데 따른 오류다. 철학은 소승이 아니라 대승이며 대승은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그 에너지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개인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면 곤란하다.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의 의견을 발표해야 한다. 철학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없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천국에 안 가도 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의 행복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다. 상대성은 개인이고 절대성은 인류다.


    포스트모던이니 탈근대니 하는 쇄말주의, 신변잡기주의 유행은 20세기 정신의 실패를 반영한다. 20세기는 위대한 도전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그것은 거대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좌절한 거다.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인류는 인류 단위의 전쟁을 했고 처음으로 인류 단위의 올림픽을 했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인류단위의 거대한 진보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그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상온핵융합로가 발명되어 인류의 에너지난을 해결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이 아니다. 못 살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다. 빈곤의 해소는 인류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가의 관심사일 뿐이다. 의식주문제의 해결, 질병의 퇴치, 환경보호는 본질에서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상호작용만이 의미있다. 인류단위 의사결정은 70억 인류를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문제해결과 상관없이 인류가 지적 단일체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해결의 경험은 보조적으로 기능할 뿐이다.


    빈곤, 질병, 범죄, 전쟁, 차별의 문제가 인간을 해치면 인간이 그 문제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는 소극적인 생각은 환경에 대한 인문정신의 우위에 선 판단이 아니다. 인간이 저질러야 철학이다.


    인간이 능동적으로 문제를 낸다. 70억으로 이루어진 지적 단일체를 건설할 때 비로소 인간이 질문하는 자의 포지션에 선다. 공자의 군자개념에 그것이 있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는 소승적이다.


    인간들 중에서 비교우위로 질문하는 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군자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포착했을 뿐이다. 아테네 시민 중의 그 누구도 질문하는 자의 위치에 서지 못한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에서 군자를 발견하려 했다. 군자가 없다는 사실을 포착한 자가 군자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는 인간들 중의 군자일 뿐이다. 아테네인들은 노예들과 비교하여 우월성을 강조한다.


    페르시아라면 장군이라도 임금을 면회할 때는 먼저 엎드려 절을 하고 임금의 반지에 키스를 해야 한다. 아테네인이 볼 때 페르시아인은 설사 재상의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자유민이 아닌 노예다.


    영화 ‘300’에는 그러한 아랍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주의가 표현되어 있다. 페르시아인은 전 국민이 임금의 종이지만 아테네의 시민은 자유민이므로 아테네가 페르시아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이다.


    아테네인의 상대적 우월성은 비교된 가치다. 진정한 것은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대표되는 것이다. 김연아가 한국인의 대표로 최고의 연기를 펼치면 메달색깔과 상관없이 어깨가 으쓱해지는 거다.


    우월한 자가 아니라 대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대표하려면 먼저 대표팀을 만들어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인류를 대표하는 지적 단일체가 건설되어야 한다. 인류팀을 건설하고 인류팀에 들어야 한다.


    상호작용을 통한 의사결정이라는 존재의 호흡이 바로 그것을 요구한다. 그 방법으로 인류는 살아있을 수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다. 상대적인 가치는 사실 회의할만 하다.


    상대적인 가치를 회의하지 말고 절대적인 가치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상호작용 그 자체다. 부단히 인류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어떻든 성공이다.


   


[레벨:11]큰바위

2014.03.12 (08:43:58)

학문은 모두 다 통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학문에도 위계질서가 있다고 봅니다만, 그래서 철학을 가장 위에 둘 수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엮여져 있다고 봅니다.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철학

  ㅣ

인류학

  ㅣ

사회학

  ㅣ

심리학

  ㅣ

생물학

  ㅣ

화학

  ㅣ

물리학


으로 과학의 위계질서를 모델화할 수 있을 겁니다. 


위쪽에 있는 것일 수록 보다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갖고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갈 수록 미시적인 구조와 체계를 다룬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물체에는 그 자체로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쨌거나 학문은 통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지난 20세기에는 학문을 냅다 분화시켜서 대학에서도 학과를 갈갈이 찢어 놓아 전문분야를 세분화 시켰다면, 지금은 다시 통합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각 대학에도 융합과학이니 어쩌니 하면서 학문을 통합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인식되었던 학문을 함께 연구하기도 하죠. 


신학과 과학도 더 이상 딴나라 세상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수학을 통해서 본 신,

음악에 나타나 있는 과학과 신, 

등 등 


철학이 절대를 추구하는 것처럼, 모든 학문에서 절대를 추구하면 하나로 엮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동렬님의 대표성의 원리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개념이요 현실이라고 봅니다. 


나 하나가 하나님과 맞짱 뜨는 것이 

곧 인류가 신과 조우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며

인류가 신의 경지에 올라가는 게 되지요. 


예수가 신의 아들인 게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다빈치가 우주를 한 화폭에 담아낸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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