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과 일반성>
케냐 투샤 생두가 남아 있어 핸드로스팅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준비하고 드립으로 내려 마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다.
그 시간안에 여러 생각들이 스치기도 하고 떠나가기도 한다.
그 전에 미리 식빵이 남아 있어 더 놔두면 못 먹을 같아서 식빵을 구웠다. 치즈를 위에 올려 미리 썰어 놓은 형태대로 오븐에 굽는다. 또 다른 식빵에는 귤을 썰어 올리고 피자치즈를 뿌려 주고 굽는다. 얘네들 이름을 뭐라 붙일까? 하다 누군가 이미 붙여 놓았겠지 하며 지나가기로 한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와 다과가 마련되었다. 커피를 입안에서 굴려보니 신맛과 쓴맛의 조화가 버무려진다. 구운 치즈식빵과 구운 귤식빵도 고소하고 새콤달콤하다. 식빵 조각이 바삭 거리며 입안에서 부서진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러저러한 상념이 드는데.... 기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생각이 머문다.
커피 맛도 개인별 취향이 있지만, 벌써 셋 이상 모이면 그 고유의 공통된 특성이 발견된다. 그 커피의 맛의 보편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준이 생겨난다. 셋 이상을 만족할만한 기준, 그리고 이 기준을 토대로 일반화 된다. 일반적 기준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 일반적 기준이라 함은 평균을 의미한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면 일반화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일반적이란 말이 다양성이란 이름하에 자기 기준이란 의미로 쓰여진지 오래다. 보통은 보편적 기준을 획득하면 일반적 기준을 정해 확산 시킨다. 어디까지나 기준은 보편성에 있다. 이 보편성을 충족 시키는 것이 일반적 기준이다. 그리고 이 일반적 기준에서 메뉴얼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주장한다고 해서 일반적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하는 그 주장의 근거가 일반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지는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역추적이라서 시간이 소요된다.
한 사회가 어떤 메뉴얼을 만든다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한 이후의 일이다. 그냥 만든다고 보편성이 담겨지는게 아니다.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고 난 이후에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일반화의 시도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메뉴얼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메뉴얼은 서로를 충족시키는 평균치이다. 그리고 다양하게 적용시킬수가 있다. 하지만 이 다양성은 그냥 숫자만 많다고 다양해지는게 아니라, 보편적 관점을 획득한 이후에 일반화 시키는 과정을 알고 있어야 개성에 맞는 취향에 맞는 다양화가 가능해진다.
다양성이 살아 있는 사회는 살아 있어아 할 굳건한 토대들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 그 토대를 바탕으로 다양함이 뻗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정치사회를 보면, 기준이 무엇인지 의심 스럽다.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 아직 서로 만족할만한 기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일반적 메뉴얼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뜯어 고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보편성이 받쳐주지 않는 일반성은 그냥 저자거리의 도를 아십니까와 같다. 보편적 관점이 없는 메뉴얼을 만들어 창조하여 다양성을 키우자고 한다. 토대도 없고 뿌리도 없고 기준도 없는데 창조가 웬말이며 다양성이 무슨 말인가... 한 국가가 보편적 관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뼈대가 없는 것과 같다.
쌓아 올리지를 못해서 그 다음은 저절로 모래성이 된다.
그냥 다 필요없고 상대편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고 여기거나 종북으로만 몰면 된다고 여기는 정권이 어떻게 보편적관점을 발견해낼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사회가 어떻게 보편적 관점의 뼈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보편적 관점이 뼈대라면 일반화는 살이다. 다양성은 옷이다. 특수성은 부로치쯤 되시겠다.
현재 정권은 진흙을 그냥 버무려 사람 만들자고 하고 있다. 반인반신이 호흡을 불어 넣어 준다고...
커피 한 잔의 상념이 길어졌다.
케냐 투샤 생두가 남아 있어 핸드로스팅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준비하고 드립으로 내려 마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다.
그 시간안에 여러 생각들이 스치기도 하고 떠나가기도 한다.
그 전에 미리 식빵이 남아 있어 더 놔두면 못 먹을 같아서 식빵을 구웠다. 치즈를 위에 올려 미리 썰어 놓은 형태대로 오븐에 굽는다. 또 다른 식빵에는 귤을 썰어 올리고 피자치즈를 뿌려 주고 굽는다. 얘네들 이름을 뭐라 붙일까? 하다 누군가 이미 붙여 놓았겠지 하며 지나가기로 한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와 다과가 마련되었다. 커피를 입안에서 굴려보니 신맛과 쓴맛의 조화가 버무려진다. 구운 치즈식빵과 구운 귤식빵도 고소하고 새콤달콤하다. 식빵 조각이 바삭 거리며 입안에서 부서진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러저러한 상념이 드는데.... 기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생각이 머문다.
커피 맛도 개인별 취향이 있지만, 벌써 셋 이상 모이면 그 고유의 공통된 특성이 발견된다. 그 커피의 맛의 보편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준이 생겨난다. 셋 이상을 만족할만한 기준, 그리고 이 기준을 토대로 일반화 된다. 일반적 기준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 일반적 기준이라 함은 평균을 의미한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면 일반화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일반적이란 말이 다양성이란 이름하에 자기 기준이란 의미로 쓰여진지 오래다. 보통은 보편적 기준을 획득하면 일반적 기준을 정해 확산 시킨다. 어디까지나 기준은 보편성에 있다. 이 보편성을 충족 시키는 것이 일반적 기준이다. 그리고 이 일반적 기준에서 메뉴얼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주장한다고 해서 일반적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하는 그 주장의 근거가 일반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지는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역추적이라서 시간이 소요된다.
한 사회가 어떤 메뉴얼을 만든다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한 이후의 일이다. 그냥 만든다고 보편성이 담겨지는게 아니다.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고 난 이후에 두루 적용이 가능한 일반화의 시도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메뉴얼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메뉴얼은 서로를 충족시키는 평균치이다. 그리고 다양하게 적용시킬수가 있다. 하지만 이 다양성은 그냥 숫자만 많다고 다양해지는게 아니라, 보편적 관점을 획득한 이후에 일반화 시키는 과정을 알고 있어야 개성에 맞는 취향에 맞는 다양화가 가능해진다.
다양성이 살아 있는 사회는 살아 있어아 할 굳건한 토대들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 그 토대를 바탕으로 다양함이 뻗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정치사회를 보면, 기준이 무엇인지 의심 스럽다. 보편적 관점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 아직 서로 만족할만한 기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일반적 메뉴얼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뜯어 고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보편성이 받쳐주지 않는 일반성은 그냥 저자거리의 도를 아십니까와 같다. 보편적 관점이 없는 메뉴얼을 만들어 창조하여 다양성을 키우자고 한다. 토대도 없고 뿌리도 없고 기준도 없는데 창조가 웬말이며 다양성이 무슨 말인가... 한 국가가 보편적 관점을 취득하지 못하면 뼈대가 없는 것과 같다.
쌓아 올리지를 못해서 그 다음은 저절로 모래성이 된다.
그냥 다 필요없고 상대편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고 여기거나 종북으로만 몰면 된다고 여기는 정권이 어떻게 보편적관점을 발견해낼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사회가 어떻게 보편적 관점의 뼈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보편적 관점이 뼈대라면 일반화는 살이다. 다양성은 옷이다. 특수성은 부로치쯤 되시겠다.
현재 정권은 진흙을 그냥 버무려 사람 만들자고 하고 있다. 반인반신이 호흡을 불어 넣어 준다고...
커피 한 잔의 상념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