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
합리주의란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시스템은 얽히고 설켜 있지만 본질은 있다. 단순하다. 시오노 나나미가 본질을 잘 파악했다. 이탈리아인보다도 더 로마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로마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것. 로마를 구성하는 잡다한 것들을 한 줄에 꿰어 설명하게 하는 그것. 그것 빼놓으면 시체다 하는 그것. 딱 한 마디로 로마를 설명하라면 그 딱 한마디.
남들이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사유할 때 그는 세계를 사유했다. 로마인들은 저놈들(게르만족이나 슬라브인, 그리스, 시칠리아, 카르타고, 페르시아, 스페인 등)이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대응한다는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 보통사람.. 주변과의 비교에서 로마의 정체성을 파악.
● 카이사르.. 세계 속의 로마, 로마 속의 세계를 구상.
한국 역시 일본, 중국과의 비교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실패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인식해야 한다. 땅덩어리로는 중심이 아니다. 무엇으로 한국은 세계의 중심인가? 문화의 자부심이다. 깨달음의 문화다.
카이사르는 그 모두를 동시에 아우르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었다. 가상적을 만들고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는 식의 일본군 마인드, 귀납적 마인드, 상대성 마인드는 한계가 있다.
네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마스터 플랜이 있어야 한다. 가상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상에서의 눈높이가 필요하다.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건 다른 나라와의 비교가 아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응수가 아니고 반사놀이가 아니다. 이건 절대적인 지상명령, 정언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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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부스가 본질을 알았다. 그는 치즈집 아들에 지나지 않았었으나 귀족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매우 진지하게 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인도를 취하면, 이익의 ‘1/10’은 자손대대로 내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구는 둥글고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온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인도에 가서 어쩌려고? 인도군과 전쟁하려고? 거기서 뭐가 나오지? 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언제나 그렇듯이 사업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실패하면 책임은 누가 지고?
문제는 ‘1/10’이다. 이건 ‘이권’이라는 말이다. 인터넷 신대륙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도메인은 선점해놔야 한다. 포르투칼 왕은 10분의 1의 사나이, 콜롬부스를 만나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봐서 뭔가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콜롬부스는 배를 몰 줄도 몰랐다. 항해능력이라곤 없는 위인이었다. 리더십도 없었고 주위사람과 마찰하기 일수였다.
여러가지로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뭔가 조직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뛰어난 장군도 아니고, 유능한 선장도 아니고, 대단한 자본가도 아니고, 뼈대있는 귀족도 아니다.
오직 세치 혀 믿고 유세떠는 건달이었지만 그의 1/10 발언은 권리관계라는 본질을 들추었다. 무엇인가? 특허권이나 선점권이나 그런게 있다. 즉 인류의 공동작업이며 맨 먼저 가서 룰을 정한 사람이 이득을 취한다.
내가 안가면 남이 갈 것이고, 거기서 금이 나오든 은이 나오든 권리관계 그 자체는 가치있다는 말이다. 그 땅에서 금이 나오든 은이 나오든 일단 광업권은 확보해놓고 보자.
파보고 안나오면 다른 사람에게 광업권을 넘기면 된다. 쓸모없는 광산이라도 그걸 사서 안 되면 농장이라도 하겠다는 사람은 꼭 나온다. 그렇다. 일단 권리를 확보해놓고 보면 뭔가 수가 나온다.
왜냐하면 혼자하는게 아니고 인류의 공동작업으로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가서 내 손으로 인도인의 금을 뺏어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일단 내가 권리만 확보해놓고 떠들어서 인도로 금가지러 가겠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관문을 딱 지키고 서서 세금만 받아도 상당한 거다. 골드러시 때 금을 못캤어도 광부들에게 바지를 판매한 청바지업자는 돈을 벌었다지 않은가?
합리주의란 1이 2가 되고, 2가 4가 되고, 4가 8이 되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와중에 그 최초의 1이 취하는 이득이다. 스페인왕은 콜롬부스의 말뜻의 깊은 의미를 알아차렸다.
설사 금이 없다해도 서쪽으로 가는 항로만 개척되면 사람들은 떼로 몰려갈 것이고 몰려가는 사람에게 통행료만 받아도 본전은 건진다. 이런 쪽으로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합리주의자다.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이 있는 사람이다. 정상에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게 도무지 갑인지 을인지, 똥인지 오줌인지, 주인지 종인자, 대가리인지 꽁무니인지 아는 사람 말이다.
인터넷 사업을 하더라도, 하수는 그게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만 따지지만, 대박만 꿈 꾸지만, 좀 아는 사람은 1/10씩 분산하여 열개회사에 투자해놓고 한 곳에서라도 대박이 나면 본전을 회수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걸 아는 거다.
합리주의란 부분을 얽어서 전체를 만들어놓고 그 흐름의 맥을 짚어가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그는 바깥으로의 출구를 열어서 내부의 불만을 해소했다. 시선의 격을 한 차원 높였다.
물건 팔아서 돈 번다는건 거짓말이고,(그렇게 번 것은 전부 재투자 되므로.) 제조업을 해도 과거에는 주로 부동산으로 벌었고 요즘은 주로 주가상승으로 번다. 물건을 만들면 은행돈을 쓸수있다.
은행돈을 빌려서 부동산을 할수 있다. 부동산이 막혀도 주식을 상장해서 외국자본 끌어들이면 막대한 이익이 생긴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가는 사람이 합리주의자다. 대부분 좌파들은 이런거 모른다.
그 사람들 머리에는 1 대 1밖에 없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창출이 아니라 세력확대라는 본질을 모른다. 이익이 적어도 투자를 유치하고 외형을 확대하면 그게 돈이라는걸 모른다.
아일랜드의 급속한 경제성장이나 중국의 고도성장은 이윤에 의해 얻어진게 아니다. 이윤으로 돈벌어서는 절대 그 속도 안 나온다. 이윤으로 돈을 버는게 아니라 그냥 외국공장을 통째로 옮겨오는 거다.
처음 온 사람은 산을 깎아서 부동산을 개발하고, 다음 온 사람은 부동산에 건물을 지어서 분양하고, 그 다음 온 사람은 건물을 임대하여 장사를 한다. 누가 이득을 보겠는가? 앞부분에 개입해야 한다.
토지개발≫부동산건설≫건물임대≫장사로 전개되는 구조가 있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이 머리에 있어야 하다. 자기가 직접 부동산 개발하고 건물짓고 건물임대하고 장사하고 다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자신은 부동산만 개발하고 터만 닦아놓고 빠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가 건설한 토대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윤을 모아서 돈을 버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돈을 벌게 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버는 것이다.
콜롬부스는 신대륙 개척이 인류의 공동작업이라는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장사를 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사람은 하수고,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은행업을 한다.
유태인들이 은행업을 하는게 이유가 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려는 사람들을 네트워크화 해서 막강한 두뇌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돈 버는 사람은 결국 은행장에게 자신이 돈 번 이유를 실토하게 된다.
은행장은 돈놀이를 해서 돈을 버는게 아니라 이미 돈을 번 사람과 앞으로 돈을 벌고싶은 사람을 중개해서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그 세계의 왕이 된다. 그러므로 크게 보면 정치가 가장 큰 장사다.
어떤 방이 있는데 방 가운데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사람이 빠질 수 있다. 그 방에는 100명만 들어갈 수 있다. 밖에서 억지로 한 명을 더 밀어넣으면 누구 한 명은 그 구멍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한 명을 더 밀어넣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한 명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동료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진다. 전부 구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하나를 더 밀어넣었을 뿐인데 100이 구멍으로 빠졌다. 그런게 있다.
관계다. 물이 흐르는 이유는 중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수압 때문이다. 압력을 걸어주면 한 덩어리가 된다. 기세가 생겨나고 흐름이 생겨나며 방향성이 생겨난다. 전체가 1로 행세한다.
잡다한 100을 대강의 1로 만들어 주는 방법이 있다. 계에 밀도를 걸어주어 유체의 성질을 부여한다. 그 전략으로 100만대군을 한 명을 통제하듯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적의 백만대군을 흩어버릴 수도 있다.
양치기 개가 양떼를 몰이하는 방법이다. 앞에서 당기면 인민군한테 걸린 염소처럼 결코 따라오지 않는다. 반드시 저항한다. 앞으로는 자유를 주고 뒤에서 몰면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인다.
콜롬부스의 항해는 개인작업이다. 혼자 가서 가져올 수 있는 금은 많아봤자 1억원어치도 안 된다. 다만 먼저 가서 권리를 확보해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뒤에 가는 사람 모두는 먼저 가서 말뚝을 박은 사람에게 삥을 뜯긴다.
부분을 얽어서 전체를 만드는 전략, 전체를 통제하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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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토론의 본질은 가능한 목표냐? 불가능한 목표냐다. 개고기 반대하는 사람은 그게 현실성있는 목표임을 증명하려 하고 있고 개고기 먹자는 사람은 불가능한 목표임을 인식시키려 한다.
개고기가 옳으냐 그르냐는 토론대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64프로가 고래잡이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게 가능한 목표라고 믿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사람이 그 폭력적인 남자를 피하려다가 오히려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폭력적이지만 않으면 돼 하고 좁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를 점검해야 바른 판단을 하는데 폭력적이지만 않으면 내가 벌어먹여도 상관없어. 이렇게 해서 내가 벌어먹이겠다며 남편을 백수 만들면 폭력적인 남편으로 변한다.
결정적으로 폭력적인 남자처럼 위장하기 쉽다. 폭력적인 마초일수록 연애 때는 여자에게 주도권을 양보한다. 연애때는 여자가 주도하고 결혼후에는 남자가 주도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남자만 피하려다보니 다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게 실수. 폭력적인 아빠에서 독립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한 것도 실수. 폭력적인 남자만 겪다가 자상한 남자 겪어보고 뿅가버린것도 실수.
술하고 노름만 않으면, 집에 쌀만 많으면 하고 판단범위를 좁히는게 실수. 자신이 상황을 리드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최선의 상대를 구해야 폭력적이지 않는 것이 폭력만 피하려면 폭력적이 된다.
폭력은 본이 아니고 말이기 때문이다. 본질에서 좋은 사람이 폭력도 않는다.
항상 전체를 봐야지 부분만 보면 안 된다. 경험에 의존해서 안 된다. 결혼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가야 한다. 상대가 좋게 나오기를 바라면 안된다.
예술은 관계의 밀도를 높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사회관계 안에서 정확하게 파악된다. 무엇인가? 여자는 남자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언젠가 남자를 만난다는 전제 하에 기획된 존재다.
여자를 설명하려면 남자까지 설명해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이 된다는 전제 하에 기획된 바 잠정적인 존재이며, 삶은 역시 죽음의 초대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 기획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체를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을 설명하려면 그 사람이 사회관계 안에서 어떤 포지션을 가졌나를 설명해야 한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의 전제인 사회가 불명하다는데 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가 어딨지?
있다면 사회라는 놈을 이리 끌고 와 보시라. 사회는 추상적인 관계의 집합이다. 어떤 경우에는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보통은 숨어 있다. 사회는 가족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가족이란 것도 애매하다.
가족법이 가족을 규정하지만 법이 가족을 만든건 아니다. 원시 모계사회라면 가족의 경계는 모호하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친해지면 가족 이상으로 가족이 되기도 한다.
가까운 가족이라도 등 돌리면 남남이다. 이역만리 타향에 떨어져 있어서 일생동안 만나지 못했다 해도 정신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다가 정작 만나서는 오히려 본체만체다.
상속권이라든가 양육권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부각되기도 한다. 생전 얼굴 한번 못본 사람이 ‘내가 아버지야’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관계는 친구와 가족을 기초로 해서 마을, 부족, 씨족, 회사, 조합, 동아리, 국가, 민족 등의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그 사회관계의 실체가 뭔가? 그것은 소통이다. 소통에는 레벨이 있다.
강아지와 가족 이상으로 가족인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진짜 가족은 남으로 치고 강아지에게 유산을 상속한다면? 그 상속은 사실 그다지 의미가 없다. 법적인 요건일 뿐이다.
결국 상속된 유산은 어떤 인간의 차지로 된다. 어떤 경우에도 강아지에게는 개사료가 돌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에게 상속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 상속권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소통의 레벨 문제가 생긴다. 강아지와의 소통은 형식적으로 가능하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강아지에게 상속해도 결국 강아지의 보호자에게 상속한 셈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00의 레벨에 있는 사람과 10의 레벨에 있는 사람이 소통하면 실제로는 10만큼의 소통만 일어난다. 일생을 같이 산 부부간에 평생을 소통해도 그것이 10에 불과할 수 있고 딱 한번 마주쳐도 100의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찰나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 백년을 같이 살아도 남남일 수 있고, 백년간 얼굴 한번 못봤어도 온전히 하나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소통하는가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관계, 사회, 공동체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문제로 부각된 골치아픈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편법일 뿐 실제로는 의미없다.
법으로 어떻게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골치가 아프니까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갈 뿐인 거다. 그 문제에 관해서 완벽한 정답은 원래 없다.
결국 관계의 본질, 소통의 레벨은 법도 아니고 유전인자도 아니다. 친자가 양자보다 못할 때가 많다. 딱 한번 눈빛을 스쳤을 뿐인데도 일생을 같이 산 부부보다 더 큰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계약도 아니다. 부부는 식장에서 맹세하고 계약하고 증인까지 세우지만 의미없다. 결혼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관습일 뿐이다. 진정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본질은 관계이며 관계는 A면 B다는 논리구조로 기능한다. 즉 소집논리인 것이다. 그 상황에서 판정한다. 관습은 과거의 판정을 모아서 얽은 것이며 진짜는 현장에서 판정내리는 것이다.
그 판단의 논리는 미학이다. 모든 존재에 그 자신의 완전성이 있으며 계 안에서의 완전성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자동차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는 어떤 자동차가 완전한 자동차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형태로 찾아진다.
독일차는 기계의 논리, 금속의 논리를 극한으로 추구하고 일본차는 인간의 인체공학논리, 인간편리의 논리를 극한으로 추구한다. 어느 쪽이든 대표되는 자기논리가 있다. 한 줄에 꿰는 컨셉이 있다.
법이든 핏줄이든 관습이든 어떤 사람이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봐서 그것이 합리적인 관계를 만드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절대적인 논리는 미학원리로만 접근 가능하다.
예술은 그것을 보여준다. 진흙을 구우면 토기가 되고 백토를 구우면 자기가 되듯이 규칙이 정해져 있다. 앞에 도가 왔으면 뒤에 레가 와야 하는지 미가 와야 하는지 솔이 와야 하는지 정할 수 있다.
그래야 리듬이 되고, 멜로디가 되고, 화음이 되고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혼식장에는 왜 신랑이 먼저 입장해야 하는지, 좁은 길이나 징검다리를 건넌다면 왜 한국남자는 앞에서 건너고 미국 남자는 뒤에서 건너는지를 결정한다.
예술은 관계의 밀도를 높인다. 더 많이 개입해서 더 많이 결정한다. 와인 옆에는 치즈가 와야 하는지 번데기가 와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는게 아니고 인간이 정하는건데 잘 정할 수도 있고 못 정할 수도 있다.
잘 정할수록 더 깊숙히 개입하여 많은 부분을 정할 수 있으며 잘못 정하면 표면에서만 놀고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클래식음악이라면 그 음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보여주는데 대중음악이라면 멜로디만 가지고 깝죽대다가 끝낸다.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백이라면 클래식은 백에 도전하고 대중음악은 그 중에서 좀 팔린다싶은 1만 따로 발췌하고 포장해서 팔아먹는다.
미학은 계 안에서 하나의 완전성을 구성하는 모든 포지션들의 관계에서 그 밀도를 높인다. 어떤 하나가 있으면 반드시 앞과 뒤, 시작과 끝, 공격과 수비, 음과 양, 남과 여, 아침과 저녁, 중앙과 주변, 안과 밖, 겉과 속, 위와 아래, 좌와 우, 작용과 반작용 등의 포지션들이 있다.
그 포지션들 사이의 밀도를 높인다. 더 많은 포지션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두 남녀가 있는데 부부라면 부부관계다. 부부이면서 동료이고, 동업자이고, 친구이고, 파트너이고, 한 팀이고 그럴 수도 있다.
상상력과 창의력
상상력이 자연의 패턴을 수집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연결한다면, 창의력은 거기에 계 안에서의 미학적 질서를 부여한다. 이문열의 글쓰기 재능은 원래 타고난 것이다. 연필만 쥐어주면 하루종일 써낼 사람이다.
그러나 계 안에서의 질서가 낮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이문열이 창조한 인물들의 개성은 표면적일 뿐이다. 잘난놈, 못난놈, 좋은놈, 나쁜놈 하는 식. 거기서 일 센티도 더 못나간다.
잘난놈은 잘났고, 못난놈은 못났고, 좋은놈은 좋고, 나쁜놈은 나쁘다 이런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잘난놈이 상처주고, 못난놈이 의리지키고, 좋은 놈이 나쁜짓 하고, 나쁜놈이 좋은 일 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 다중성, 복잡성, 입체성, 비선형성 영역의 탐구주제는 흑백논리, 선형성, 정형성, 단세포논리에 갇힌 이문열이 감히 접근 못하는, 감히 꿈도 못 꾸는 절대고수의 경지다. 명백히 차별이 있다.
산만한 상상력을 질서있는 창의력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미학의 존재이유다. 미학은 사물의 관계를 추적한다. 단서를 찾고 포지션을 찾고 밸런스를 찾고 주도권을 찾고 생명성을 찾아서 완전성에 이른다.
이는 명백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 증거는 서구에서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이전에 인물의 개성이 탐색된 적이 없었던 거다. 돈 키호테 이전의 인물은 대부분 정형성을 가진다. 성춘향 아니면 변학도 판박이.
● 돈 키호테 이전 - 인간은 흥부 아니면 놀부다.
● 돈 키호테 이후 -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탐구해봐야 안다.
돈 키호테는 불안정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순수하고, 덜떨어지고, 지혜롭고, 멍청하고, 아름답고, 우스꽝스럽고, 진실하고 어리석다. 캐릭터 연구의 시작. 비로소 문학의 과학화다.
미학은 탐구다. 포지션들의 관계를 연구한다. 자연의 관찰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그 패턴들의 관계를 추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논리를 궁구해야 한다.
오늘 출석부에 오현명 선생의 명태를 올려놨지만 '노래 나그네 오현명'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자면.. 진정한 노래는 '노래가 있는 노래' 곧 '이야기가 있는 노래', 곧 '흐름이 있는 노래'라는 점에서 피아노의 정진우 선생과 의기투합했다는데 그것이 '탐구되어야 할 계 안에서의 질서'다.
말하자면 오현명의 모든 독창회는 연구발표회라는 거다. 무엇을 연구발표하는가 하면 그냥 허겁지겁 멜로디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컨셉을 잡아서 주제를 던지고, 그 주제가 장악하는 나와바리 안의 모든 구석구석을 탐색하여 그 영역 안에서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논리를 충족시켜 가는 것이 가곡이다.
그게 없으면 그냥 유행가다. 유행가는 나는 이렇게 탐구하였노라 하는 연구발표가 없다. 그게 있어야 창의성이다. 스탠더드가 세운 기초 위에 모던(현대성)이라는 날을 세우는 것이다. 그 모던이 어떻게 스탠더드와의 연결점을 가지며 어떻게 스탠더드로부터 맥락을 이어받는가를 보여준다.
모던만 있고 스탠더드가 없는게 상상력이고(그것은 주로 패턴의 수집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상상력이 발굴한 모던을 스탠더드와 접목시켜 맥락을 찾아내서 지금 진도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앞으로 어디까지 진도나갈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창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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