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양자다 ◎ 플랑크 .. 빛의 에너지는 양자화 되어 있다. ◎ 아인슈타인 .. 빛 자체가 양자다. ◎ 구조론 .. 공간이 양자다. 수학의 기본은 ‘=’다. 이퀄에서 시작해서 이퀄로 끝난다. ‘같다/다르다’를 판정하는 스위치 하나만으로 인류의 지식은 모두 갖춰진다. 어떤 일치가 세 번 반복되면 그것은 유의미한 정보다. 고양이의 주목을 끌어보자. 발로 땅을 한 번 구르면 고양이는 쳐다보지 않는다. 두 번 구르면 잠시 귀를 쫑긋할 뿐 역시 쳐다보지 않는다. 세 번 구르면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주목한다. 한 번 발을 구르면 그것은 하나의 단서다. 두 번 구르면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잰다. 세 번 발을 구르면 고양이는 그 간격의 2회 일치를 포착한다. 하나는 시작이고 둘은 끝이며, 셋은 반복이다. 반복되어야 유의미한 정보가 된다. 그런데 두 번까지는 반복이 아니다. 결과만 같을 뿐 그 과정의 논리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고 깨닫는다. 하나의 논리구조 안에서 3회 이상의 연속적인 일치는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힉스입자의 발견과정을 통해 양자론과 구조론 사이에 성립하는 3회 이상의 연속적 일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힉스메커니즘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은 구조론에서 말하는 질≫입자의 전개와 모형이 일치한다. 구조론은 공간단위 1, 시간단위 1이 있으며, 물질이 아니라 공간이 양자화 되어 있다고 본다. 이제는 물질이 아니라 공간을 연구할 때가 되었다. 양자현상은 공간 그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공간의 의사결정구조가 복제되어 물질에 반영된다. 물 속의 물고기는 물을 닮고, 공중의 새는 공기를 닮는다. 공간은 의사결정구조이며 물질은 의사결정단위다. 물질은 공간을 닮는다.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원리를 따르므로 물질은 양자화 되며 양자가 거시세계에서 대칭으로 나타난다. 물리학의 양자개념과 구조론의 양자개념이 다를 수 있다. 구조론의 양자개념을 정의한다면 양자는 하나의 독립적 의사결정단위로 기능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대칭≫비대칭 형태로 일어난다. 저울은 대칭되어 있다. 천칭의 두 저울접시가 대칭을 이루는 것과 같다. 혹은 시소의 두 날개가 대칭을 이루는 사실과 같다. 저울이 기울어서 어떤 판정을 내린다. 그것은 비대칭이다. 물질은 만지거나 냄새맡거나 맛보거나 간에 어떻든 반응한다는 것이며 반응한다는 것은 그 반응여부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혹은 1 단위로서의 판정하고 결정할 독립적인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결정하는 것은 결정원리를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결정원리는 대칭원리이므로 대칭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존재의 결정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궁을 거칠 수 밖에 없다. 구조론에서 자궁은 다섯 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그런데 입자는 질을 복제하고, 힘은 운동을 복제한다. 같은 패턴으로 운동과 양도 복제된다. 근원의 자궁은 한 개이며 그것은 질이다. 질은 의사결정의 자궁을 세팅하며, 입자는 세팅된 결정구조에 에너지를 태우면 반복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힘과 운동과 량은 질과 입자의 결정에 연동되어 동시에 결정되는 세부적인 결정들이다. 구조론은 모든 것을 의사결정원리 하나로 풀어낸다. 의사결정원리는 대칭≫비대칭 하나로 작동한다. 구조론이 새로운 주장을 내놓으면 ‘그것과 유사한 내용이 학계에 알려져 있다'고 반격받는 패턴이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3회 이상의 연속적인 일치‘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구조론은 시공간의 최소단위가 있고, 양자는 물질이 아니라 공간 자체의 성질이라고 본다. 이러한 내용이 양자론의 보고와 모두 맞다면 3회 이상의 연속적인 일치다. 학계의 정립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웹검색을 한 결과는 이와 유사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나 ‘모든게 양자화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구조론은 존재를 의사결정단위로 본다. 공간은 의사결정구조다. 시간은 의사결정순서다.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원리를 따르며, 대칭을 이루려면 시공간적으로 정지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시계추가 한쪽 끝으로 갔다가 방향을 바꾸는 순간 정지한다.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물체는 한 순간 정지한다. 교류전기는 1초에 72번 정지한다. 정지하기 때문에 시공간의 단위가 있다. 공간이 양자라는 생각은 제논의 궤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는 한 걸음 앞선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궤변이다. 추월하려면 무한대 분의 1의 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지점은 없다. 그러므로 아킬레스는 한 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추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킬레스는 가지 않았다. 거꾸로 공간이 아킬레스로 온 것이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는 궤변도 있다. 우리는 화살이 공간을 그냥 간다고 여긴다. ‘그냥’이라는 말은 과학어가 아니다. 그런 말은 과학사전에 없어야 한다. 화살은 어떤 방법으로 간 것이다. 방법은 자리바꿈 밖에 없다. 아킬레스는 공간과 자리를 바꾼 것이며 자리를 바꾸려면 대칭을 성립시켜야 하고, 대칭은 둘이 같은 모양의 쌍을 이룬다. 자연에 대칭은 다섯 가지가 있다. 질의 대칭, 입자의 대칭, 힘의 대칭, 운동의 대칭, 량의 대칭이다. 아킬레스가 공간을 이루려면 동형을 복제하여 대칭시키고 다음 계를 통일시켜야 한다. 날아가는 야구공이 배트에 맞아 방향을 바꾸려면 공의 힘과 방망이의 힘을 대칭시켜야 한다. 이때 공은 짧은 순간 공이 정지한다. 대칭을 만들고 다시 대칭을 깨는 형태로 공은 방향을 바꾼다. 공이 직진해도 이 과정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칭의 쌍을 만들고 다시 이를 합쳐서 하나의 장을 만들고 다시 특이점의 위치를 정하고 거기에 연동시켜 방향을 정하는 복잡한 과정을 밟는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이유는 둘 다 정지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거북이가 정지해 있을 때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했다. 이중슬릿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빛이 슬릿을 통과하여 벽에 도달할 때 반대편에서도 하나가 와야 한다. 그런데 이중슬릿이면 빛이 어느 슬릿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빛은 흐르는 공간을 통과하고 공간은 출렁인다. 파동은 공간의 성질이다. 공간은 부단히 대칭쌍을 만들어야 하므로 파동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전자의 스핀이 1/2이라면 S자로 이동해야 하나의 대칭쌍을 만들어 입자 행세를 한다는 거다. 뱀은 몸을 S자로 만들어야 움직일 수 있다. 8자 모양으로 두 개의 축을 만든다. 전자는 크기가 없으므로 ∞꼴로 두 바퀴를 돌 때 한 번의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입자가 그냥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입자와 대칭성을 이루는 것이 입자일 뿐이다. 질과 대칭되면 질이고, 힘과 대칭되면 힘이고, 운동과 대칭되면 운동이고, 양과 대칭되면 양이다.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구조론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다. 구조론의 출발점은 완전성이며 완전성은 움직여서 본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다. 훌라후프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오는 것이다. 존재는 1개가 1회로 대체된다. 사물은 사건으로 대체된다. 대칭쌍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일정한 시간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1회가 1개로 바뀌면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축구시합은 1개가 아니라 1회다. 양자는 1회가 1개로 판정되는 것이다. 전자는 S자로 움직이므로 뱀처럼 내부에 두 축이 있어서 정지할 수 있다. 빛은 스핀이 1이므로 축이 하나 뿐이라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전자는 핀셑으로 집어서 유리병에 담아둘 수 있다. 빛은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핀셑으로 집을 수 없다. 도미노처럼 움직여야만 존재의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발이 두 개이므로 움직일 수 있다. 두 발이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발이 없다면? 자신과 체중이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체중이 100킬로라면 역시 100킬로인 사람을 불러서 옆에 세운다. 다음 그 사람을 밀어서 그 반동의 힘으로 움직인다. 전자는 S자로 움직이므로 이미 100킬로 두 명이 나란히 있다. 빛은 스핀이 1이므로 반드시 누군가를 불러와야 한다. 정지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릴 때는 선이 굵어야 한다. 대칭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찍을 때는 뒤뚱거려야 한다. 역시 대칭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니큐페는 지붕과 바퀴울에 굵은 선을 주었다. 100킬로인 사람이 10킬로인 사람과 짝지으면 어떻게 될까? 100킬로인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10킬로인 사람이 튕겨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에 오지 못한다. 접근이 안 된다. 10킬로인 사람 역시 100킬로인 사람의 힘을 빌 수 없다. 천재적인 인물의 아들이 부모처럼 뛰어난 연주자나 작가가 못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10이 100을 이용하려다가 튕겨나간다. 베토벤은 조카를 키우지 못했고 이중섭은 아들을 화가로 만들지 못했다. 반드시 50 대 50이어야 힘은 작동한다. 부부 역시 50 대 50으로 대칭되어야 서로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 50 대 50의 균형을 맞추는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보통 가정에서 여성은 자녀를 생산하여 자기편을 들게 하는 방법으로 균형을 맞춘다. 노동자는 조합을 결성하는 방법으로 균형을 맞춘다. * 질 .. 자기 바깥과 대칭을 이룬다. 유체의 형태이고 유동적이다. 스스로 에너지를 생성한다. (민중의 힘을 끌어내는 정당. 스스로 움직여가는 태풍.) * 입자 .. 자기 안에 대칭구조가 있다. 고체의 입자이고 고정적이다. 외부 에너지를 내부에서 처리한다. (월급받고 일하는 행정부, 건드리면 반작용하는 바위.) 새누리가 북한을 반대하여 힘을 결집하려는 것이나, 야당이 여당을 반대하여 힘을 결집하려는 것은 질의 상태다. 다만 북과 남은 50 대 50이 아닌데 북이 남보다 세다고 사기쳐서 50 대 50을 만들려고 하는게 새누리다. 여당과 야당은 분명 50 대 50에 근접했다. 민주당은 사기를 안 쳤다. 무개념 좌파들은 50 대 50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9 대 1이라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다. 의사결정할 생각이 아예 없는 비겁자들이다. 어떻게든 50 대 50까지 가야 한다. 입자는 있는 에너지를 처리할 뿐 없는 에너지를 생성하지 않으므로 가치없다. 그들은 고정된 직업을 가지고 남을 위해 기능할 뿐이다. 질이 진짜다. 우리는 끝없이 대칭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
"구조론은 모든 것을 의사결정원리 하나로 풀어낸다. 의사결정원리는 대칭≫비대칭 하나로 작동한다.
... 구조론은 시공간의 최소단위가 있고, 양자는 물질이 아니라 공간 자체의 성질이라고 본다.
... 왜 그런지는 모르나 ‘모든게 양자화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 구조론은 존재를 의사결정단위로 본다. 공간은 의사결정구조다. 시간은 의사결정순서다.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원리를 따르며, 대칭을 이루려면 시공간적으로 정지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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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가 북한을 반대하여 힘을 결집하려는 것이나, 야당이 여당을 반대하여 힘을 결집하려는 것은 질의 상태다. 다만 북과 남은 50 대 50이 아닌데 북이 남보다 세다고 사기쳐서 50 대 50을 만들려고 하는게 새누리다.
여당과 야당은 분명 50 대 50에 근접했다. 민주당은 사기를 안 쳤다. 무개념 좌파들은 50 대 50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9 대 1이라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다. 의사결정할 생각이 아예 없는 비겁자들이다. 어떻게든 50 대 50까지 가야 한다.
입자는 있는 에너지를 처리할 뿐 없는 에너지를 생성하지 않으므로 가치없다. 그들은 고정된 직업을 가지고 남을 위해 기능할 뿐이다. 질이 진짜다. 우리는 끝없이 대칭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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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대칭에 있었구려. 사기대칭이 아닌 신의 완전성의 대칭.
그리고 "3회의 연속적 일치는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