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과 획일성
보편성과 일반성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극이 다르다.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그냥 봐서는 모르고 짝지어봐야 안다. 특수성은 제거해야 보편성이 발견되고, 다양성은 합쳐야 일반성이 발견된다. 보편성은 어떤 둘의 사이에 있고, 일반성은 여럿을 덮어쓰고 있다. 보편성은 집과 집 사이의 길이다. 일반성은 방과 방을 덮어쓰는 지붕이다. 특수성은 길이 아닌 야산이다. 다양성은 집의 많은 방들이다. 일반성은 눈에 보이는 몸뚱이에서 찾고, 보편성은 주로 추상적인 관계에서 찾는다. 창의하기 위하여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인과법칙의 오류다. 보편성을 얻어야 다양성이 살아난다. 막연히 다양성을 추구하면 일반화 되어버린다. 먼저 보편성을 얻고 그것을 다양한 환경에 놓아보는 것이 제대로 된 창의다. 선보편 후다양이다. 먼저 다양성을 추구하면 일반화 되어 획일화 된다. 흑인의 눈에는 다양한 한국인들의 얼굴이 모두 같은 얼굴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흑인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다양성이 획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다양성은 대칭성을 가지는 것이다. 투수와 포수, 내야수와 외야수처럼 확실한 짝짓기로 포지션을 가져야 다양성을 획득한다. 한국인은 같은 한국인 얼굴은 길쭉이와 땅딸보로 대칭시켜 보지만, 흑인은 그냥 흑인으로 본다. 흑인과 흑인 사이의 대칭성이 없기 때문에 다양하지 않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오바마와 같은 지적인 흑인도 있고 타이슨과 같은 근육질 흑인도 있다. 표정이 살아있다. 같은 야구로 보편성을 얻어야 투수와 포수의 다양성이 획득된다. 야구와 축구가 뒤섞여 있으면 다양성은 알 수 없다.
진리는 오직 보편성 하나를 찾는 것이며, 일반성과 다양성 등 다른 요소들은 보편성으로 가는 절차에 불과하다. 다양성의 승객들을 쫓아 일반성이라는 기차역들 사이에서 보편성이라는 기차철로를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특수성이라는 철로 주변의 건널목 따위 방해자를 제거하여 철로만 확실히 추려내는 것이다. 보편성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장소에 놓아보면 된다. 온갖 포즈가 얻어진다. 그것이 창의성이다. 반대로 다양성을 추구했더니 일반화 되어버리는 것이 획일성이다. 진정한 보편성은 대칭구조 그 자체다. 강과 약, 고와 저, 장과 단, 흑과 백, 음과 양으로 대칭을 이뤄가는 구조 그 자체가 보편성이며 바로 이것을 획득해야 창의는 가능하다.
보편성이라는 시소가 있어야 다양한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다. 시소가 없이 사람을 모으려 하면 자기네들끼리 싸워서 흩어진다. 혹은 시소의 한쪽에 사람이 쏠려도 곤란하다. 시소는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최대한 태울 수 있다.
일반성은 싸움나고 다양성은 흩어진다. 만약 다양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았다면 숨은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내부에 시소가 있다. 그 보편성의 시소를 찾아내야 그 구조를 복제할 수 있다.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시켜 묶어놓는 것은 긴장이다. 스트레스다. 사람이면 주로 남녀간의 성적 긴장이 통합을 유발한다. 동물은 주로 포식자와 피식자간의 생존스트레스가 생태계의 통합성을 유발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늑대를 풀어놓자 시소가 작동하여 생태계의 다양성이 살아났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봅시다. 생각은 그냥 하는게 아니고 짝짓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냥 짝지으면 안 되고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활과 과녁을 짝짓고 다시 거기서 화살의 진행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http://gujoron.com/xe/gujo_podcast/38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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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세개를 겹치면 넷을 다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강 그려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