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존재는 에너지에 의해 살아있고, 살아있는 것은 상호작용하며, 상호작용은 두 사물 간에 일어나고, 사물을 보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둘 중의 하나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는 것이고, 사건을 보는 시선이라야 완전하다. 사물에 서서는 사물을 볼 뿐, 사건을 볼 수 없다. 사건을 보려면 관측자인 자신도 사건에 서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사건을 보려면 능동이 되어야 한다. 관측자가 움직여서 적극적으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수박을 잘라서 그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죽은 것을 보는 것이며, 사물을 보는 것이다. 수박을 시장에서 팔아봐야 진짜를 알게 된다. 에너지에 올려태워야 사건의 맥락을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를 잘라서 그 속을 살펴보는 방법으로는 다이아몬드를 옳게 이해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를 타인에게 선물해봐야 다이아몬드를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를 분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자동차를 운전해봐야 한다. 빛을 옳게 이해하려면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의미는 안쪽에 없고 바깥에 있다. 분해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사용해봐야 한다.
병의 술을 컵에 따른다면 우리는 병과 컵이라는 두 사물을 본다. 실패다. 병과 컵과 둘을 연결하는 술을 동시에 봐야 한다. 그것이 사건을 보는 관점이다. 이때 시소와 같은 구조가 만들어진다. 축과 대칭에서 축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축이 스위치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축이 보이지 않는다. 춘향과 몽룡의 대칭에서 스위치 역할을 하는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 사이에서 둘을 관통하는 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진보라는 활과 보수라는 과녁 사이에서 둘을 관통하는 정의라는 화살은 보이지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있다. 보이지 않으므로 대개 명명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있다. 이름이 없더라도 그것은 있다.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있다. 밝음과 어둠이 있으면 둘 사이에 빛이 있다. 집과 집이 있으면 둘 사이에 길이 있다. 인간과 자연이 있으면 진리가 있다. 남편과 아내가 있으면 가족이 있다. 부모와 자식이 있으면 혈통이 있다. 스크린과 영사기가 있으면 영화가 있다. 라디오와 방송국이 있으면 전파가 있다. 지구와 달이 있으면 만유인력이 있다. 부엌칼과 무가 있으면 도마가 있다. 그것은 없어도 그것은 있다. 칼도 있고 무도 있는데 도마가 없으면 지구가 대신 도마가 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있고, 신발이 없으면 맨발이 있다. 젓가락이 없으면 손가락이 있고, 휴지가 없으면 물티슈가 있다. 여인숙이 없으면 노숙이 있고, 펜션이 없으면 텐트가 있다. 모든 죽어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것은 있다. 다만 거기에 없고 한 층위 위의 높은 곳에 있다. 표면에 없고 이면에 감추어져 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찾아 명명하는 방법으로 모두가 알아채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의 용어들은 이 원리를 반영해야 한다. 그냥 개념을 말할 것이 아니라 둘씩 대칭시켜 짝을 짓고 다시 둘을 관통시켜 보여야 한다. 에너지를 태워보여야 한다. 살아서 숨쉬게 해야 한다. 자동차를 운전해보여야 한다. 그래야 완전하다. 인문학은 완전성을 얻어야 한다. 전제와 진술에 담론이 있고, 주관과 객관에 소실점 있고, 기표와 기의에 소통이 있고, 부정과 긍정에 스위치 있고, 카오스와 코스모스에 낳음이 있고, 선과 악에 완전성이 있고, 공과 사에 시스템 있고, 수렴과 역설에 방향성 있다. 수렴과 역설을 따로 말하면 곤란하다. 이 원리에 의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우주는 중심에서 멀어지는 한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다. 인류는 문명이라는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방향을 꿰뚫었을 때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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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기록, 신비(妙)님의 ‘신은 쿨한 스타일이다.’ 시중서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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