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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에너지에 의해 작동하고 인간은 동기에 의해 행동한다. 인간의 동기를 해명하는 것이 철학이다. 근대철학은 주체의 영역을 획득하는 데서 동기를 찾는다. 주체는 개인의 의사결정영역이다. 봉건사회는 신분상승이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은 결정권을 가진다. 신분상승이 주체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의 중심으로 진입하여 더 많은 의사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종교의 시대에 주체의 영역은 신에 의해 부여된다. 신이 인간을 귀족으로 혹은 노예로 규정한다. 차별의 근거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서 차용된다. 인간은 영혼이 있고 동물은 영혼이 없다. 마찬가지로 귀족이 노예보다 더 우월한 영혼을 가졌다고 말한다. 동양에서는 유교주의에 의해 문명과 야만의 개념이 제시된다. 중화와 만이로 차별한다. 근친혼을 하는 오랑캐는 동물과 다름없다는 거다. 하층민에서 지배계급으로 올라서고 싶다는 욕구를 ‘그래도 동물보다는 우월하다’는 안도감으로 바꿔친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끼고, 여자는 오랑캐보다 우월한 데서 안도감을 느끼고, 오랑캐는 동물보다 우월한 데서 안도감을 느끼라고 위로한다. 이를 발전시킨 것이 칸트의 이성 개념이다. 인간은 신성에서 비롯된 이성에 의해 동물보다 우월하니 만족하라는 거다. 이에 사람들은 환호하였으나 그 약효는 짧다. 헤겔은 정신에 계급을 부여한다. 절대정신이라는 높은 의사결정단위로 올라섬으로써 정신적 귀족이 되란다. 마음의 위로는 될지언정 그것으로 현실의 비참을 해결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꼬리칸에서 일어나 엔진칸을 장악하고 현실에서의 의사결정권을 뺏으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엔진은 한 사람에 의해 조작된다. 집단의 지배는 허구적인 관념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관념론으로 퇴행한다. 실존주의는 지금 이 상황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사결정을 성립시키라고 한다. 중앙의 권을 뺏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을 창조하라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다양한 의사결정형태가 있다고 한다. 기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승용차도 있다는 거다. 구조론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의사결정은 짝짓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존재는 짝을 가지며 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사결정을 한다. 팀을 이루어야 한다. 가족을 이룸으로써 가장이 되고, 회사를 창업함으로써 CEO가 된다. 커플을 이루면 데이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더 많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서고 싶어한다.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나에서 몸을 일으켜 가족, 집단, 국가, 인류를 넘어 초인류라는 더 높은 단위에서의 의사결정구조에 가담해야 한다. 봉건사회는 신이 결정하니 인간은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유교주의는 오랑캐의 열등함을 보고 만족하라고 다독였다. 칸트는 그래도 동물보다는 우월하다고 진정시켰다. 헤겔은 정신승리법을 제안했다.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실존주의는 현장에서의 의사결정을 제안했다. 구조주의는 다양한 의사결정구조의 존재를 발견했다. 구조론은 이 모두를 하나의 체계로 통섭한다. 의사결정은 짝짓기로 가능하다. 상호작용하는 두 짝의 일치에 의해 팀은 결성된다. 인간은 언제라도 의사결정영역의 획득을 원하며, 팀의 결성에 의해 그것은 가능하다. 음악은 리듬의 일치로 결정하고, 그림은 구도의 일치로 결정하고, 스포츠는 패스의 일치로 결정한다. 그 순간의 일치를 끌어내는 방법을 훈련해야 한다. 서로는 눈빛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의 흐름에 올라타는 방법으로 그것은 가능하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에 올라타는 방법으로 그것은 가능하다. 방향성과 관점의 파악으로 그것은 가능하다. 사건이 진행하는 방향을 읽고, 인간이 개입하는 관점을 세울 때 서로의 일치는 가능하다. 그럴 때 범종과 당목이 마주쳐 큰 소리가 난다. 그렇게 서퍼는 파도를 타고, 기수는 말을 타고, 연주자는 건반을 타고, 배우는 무대를 타고, 총알은 강선을 타고, 기차는 궤도를 타고, 인류는 지구를 탄다. 그렇게 완성된다. 의사결정영역은 획득된다.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근대철학의 본령은 주체의 영역을 해명하는데 있다. 내가 이것을 사과라고 선언하면 이것은 곧 사과인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사과는 마음 속에 있으며,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습다. 마음에 있다면 현실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음으로의 도피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고 뾰족한 수는 없으며 인간은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왕은 왕으로 태어나고, 신분은 고정되어 있으며 전복의 가능성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란 도무지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철학의 자기부정이다. 설국열차의 설정처럼 각자 정해진 위치를 지켜야 하며, 주체의 영역은 원래 없는 것이라면 철학은 필요없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어떻게든 ‘이것은 곧 사과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철학의 무슨 주의들은 온갖 방법으로 이를 시도한 기록들이다. 사과에는 사과 자체의 어떤 본질이 있으며 그 정수를 접수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인간인 데는 그것이 이성이든 절대정신이든 영혼이든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것을 통제하는 절대권을 얻으면 만사 해결된다는 식이다. 이는 얄궂은 게임의 제안이다. 7이라는 숫자가 있다. 7의 본질은 7 자체에 고유하다고 말한다. 천만에! 7은 6과 8 사이에 있다. 답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그 특별한 무언가는 없으며 사과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그것을 사과로 불러줄 때, 너와 나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과일 수 있다. 영월의 한반도 지형은 원래 이름없는 지구의 일부였으나, 누가 그것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여주자 비로소 우뚝한 한반도지형이 되었다. 이는 현대의 사유다. 내가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거기에 주체의 설 자리가 있다. 문제는 선제대응이다. 7 스스로는 7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6과 8의 동의를 거쳐야 하고 밟을 절차를 밟아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음은 화음의 일치에 의해 비로소 음악이 되고, 그림은 구도의 일치에 의해 비로소 그림이 되고, 말씀은 맥락의 일치에 의해 비로소 말씀이 된다. 이미 연주는 끝났는데, 이미 버스는 이미 떠났는데 '그래도 나는 사과로 한 번 밀어보겠소.' 하고 고집을 피운다면 곤란하다. 좋은 팀을 이루어야 한다. 6과 8을 꼬셔놓아야 한다. 서로 사랑하게 해야 한다. 눈빛이 마주쳐야 한다. 내가 이것을 사과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사과가 되지는 않으며, 원래 사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너와 나의 눈빛이 통할 때 비로소 한 알의 사과로 완성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확률이 개입한다. 눈빛이 통했으나 삑사리가 나서 사과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선제대응하여 준비된 팀을 가동함으로써 그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 만남의 한 순간에 조응이 필요하다. 일치가 필요하다. 일의성에 의해 가능하다. 구조주의 철학에 대해서는 다들 한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구조주의는 본래 언어학과 인류학의 방법론으로 출발하였다 소쉬르의 언어구조와 레비 스트로스의 사회구조다. 그런데 이상하다. 건축구조는? 생체구조는? 자동차구조는? 정치구조는? 더 많은 구조들이 있는데 왜 하필 언어와 사회의 구조인가? 보편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구조’에다 주의를 붙인다면 이상하다. 이름을 붙이려면 머리에 붙여야 하는데, 이건 꼬리에다 이름을 붙인 느낌이다. 모자를 엉덩이에 썼다. 과학은 연역이어야 한다. 수학적 원리가 먼저 나오고, 이를 응용한 방법론이 뒤를 따라야 한다. 구조주의는 과학의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뭔가 선후가 바뀌어 있다. 필자의 구조론은 서구 구조주의 철학과 다르다. 구조주의는 ‘어떤 구조’를 논한다. 사회구조든 언어구조든 심리구조든 ‘어떤’ 들어가면 보편성을 잃는다. 필자의 구조론은 존재의 완전성을 해명한다. 완전성은 보편구조다. 구조의 구조이며 한 마디로 구조의 집이다. 필자가 완전론이라 하지 않고 구조론이라 명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무슨 주의’들을 해체할 의도 때문이다. 주의는 방향제시다. 리더가 뒷짐지고 방향이나 가리키는게 무슨 주의다. 구조론은 실전용이다. 현장에서 싸워서 이겨보여야 한다. 구조론은 ‘이쪽이 옳다. 이쪽으로 가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총을 나눠준다. 진보냐 보수냐의 끝없는 논쟁은 총 없는 사람들의 공염불에 불과하다. 총을 쥐는 순간 모든 논쟁은 종식된다. 일본의 개화기가 그랬다. 쇄국파와 개화파가 대치하는 중에 배 타고 온 서양사람이 3000자루의 소총을 팔았다. 즉시 논쟁은 끝났다. 구조론은 모든 주의를 청소한다. 구조론은 방향을 일러주는 대신 나침반을 손에 쥐어준다. 사유의 나침반이야말로 총이다. 싸울 무기를 챙겼다면 각자 알아서 제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주의도 필요없다. 한 명이 정글을 탐험하면 길이 헷갈리지만 100만명이 가면 길은 스스로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방향성이다. 구조론의 나침반은 방향이 결정되는 원리를 알려준다. 무인도에 두 명이 있다. 소득을 두 배로 올리는 방법은 한 명을 죽이는 것이다. 정글의 부족민 사회는 이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모든 부족에 죽여야 할 적대부족이 있다. 얼마전까지는 우리도 그랬다. 그런데 그 섬에 100만명이 있다면? 소득을 두 배로 올리려면 50만명을 죽여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관건은 그룹의 규모다. 작은 그룹일 때는 상대방을 죽이는 배제법으로 가고, 큰 그룹일 때는 서로 돕는 팀플레이로 간다. 이것이 철학의 모든 주의가 주목하는 방향성이다. 작은 그룹일 때는 누군가를 찍어서 왕따시키는게 가장 빠르게 집단의 합의를 끌어내는 방법이 된다. 우리때만 해도 한 교실에 60명씩 있었는데다 집집마다 5형제, 7형제씩 있어서 왕따가 없었다. 따돌려지는 아이들끼리 별도의 그룹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교실당 학생 숫자나 가족당 형제 숫자는 왕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따를 극복하려면 자신이 인류라는 큰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한다. 집단의 무게를 느껴야 경솔함을 바로잡는다.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작은 그룹의 길로 방향을 정했다.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재벌은 수가 적다. 대우가 죽으면 삼성이 산다. 대우가 죽었다. 건희 만세불렀다. 기아가 죽으면 현대가 산다. 기아 죽었다. 몽구 만세 불렀다. 시골사람들은 평생 작은 그룹에만 속해왔기 때문에 배제법에 익숙하다. 누군가를 왕따시키자는 새누리당을 찍는다. 강남의 기득권들도 평생 작은 그룹에만 속했으므로 새누리를 찍는다. 평생 일등만 해온 의사들은 1번 외에 투표할줄 모른다. 우리가 개방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단의 서생들은 평생 작은 그룹에만 속해 있었으므로 개방과 소통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입으로 진보를 말하지만 행동은 FTA 반대다. 그들은 노무현 죽이기 외에 제대로 해낸 것이 없다. 진정한 진보는 닫힌 문을 여는 것이다. 배제법이 아니라 팀플레이다. 북한과도 통하고, 중국과도 친하고, 일본과도 친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극동의 작은 그룹에서 탈피하여 인류의 큰 그룹으로 가야 팀플레이가 살아난다. 진보하는 서구와 보수하는 한국의 차이는 소통하는 그룹의 규모가 결정한다. 김영삼때의 세계화로 한국인들은 자신이 큰 그룹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10년간의 상대적 진보가 있었다. 보다 큰 그룹에 소속되는 데서 진정한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메뚜기떼가 일정한 숫자가 되면 일제히 이동을 시작하듯이, 북극의 들쥐들이 무리지어 한 방향으로 달려가듯이 그룹의 규모에 따라 집단의 나아가는 방향성이 정해진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세력전략이냐 생존전략이냐다. 큰 그룹은 팀플레이로 가는 세력전략을 꾀하고, 작은그룹은 배제법으로 가는 생존전략을 쓴다. 이성? 본질? 영혼? 윤리? 절대정신? 웃긴 소리다. 인간 내부에 고유한 무언가는 없으며, 인간이 외부와 소통하는 그룹의 단위를 가족이냐 부족이냐 국가냐 인류냐 초인류냐로 정하기에 따라 인간의 존재는 결정된다. 답은 언제라도 구조에 있다. 문제는 하나의 사건 안에 세력과 생존이라는 두 전략이 동시에 들어간다는 데 있다. 젊었을 때는 세력전략을 쓰고, 나이가 들면 생존전략을 쓴다. 젊었을 때는 진보하고 나이를 먹으면 보수한다. 젊었을 때는 학교와 같은 큰 그룹에 들고, 나이들면 가족과 같은 작은그룹에 들기 때문이다. 기업에 입사하면 큰 그룹에 속한다. 승진하면 승진할수록 점차 작은 그룹에 든다. 그러므로 누구나 나이가 들면 보수한다. 나이가 들어도 진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큰 일을 벌여놓은 사람이다. 백년대계의 큰 일을 벌였다면 여전히 그 일의 시작단계이기 때문이다. 건희와 몽구가 보수에 머무르는 이유는 세계시장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큰 일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전체를 다 바꾸겠다는 야심을 가진 사람만 진짜배기일 수 있다. 이는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법칙이다. 모든 일은 선팀플레이 후배제로 간다. 축구를 해도 초반에는 팀플레이에 의존하는 패스축구로 가고, 결정적인 찬스에는 개인기에 의존하는 뻥축구로 간다. 일본이 홍명보호를 꺾은 이유도 선패후뻥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바둑을 두어도 초반전략은 폭넓은 포석으로 큰 세력을 만드는게 정석이고, 막판에는 상대의 대마를 사냥하는 생존게임으로 간다. 초반에는 나살기고, 막판에는 너죽기다. 이건 단순한 물리학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느냐다. 여기서 관점의 문제가 제기된다. 절대성과 상대성이 있다. 무인도에 두 명이 있다. A가 B에게 ‘너는 대통령이다.’ 하고 선언하면 그 사람은 그 섬의 대통령이다. 여기서 주관의 상대성이 성립한다. 이때 제 3의 인물이 개입하면 곤란해진다. B의 형이 나타나서 ‘동생이 대통령이면 형인 나는 뭔데?’ 하고 따지면 낭패다. 여기서 객관의 절대성이 성립한다. 절대성의 무대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큰 놈부터 순서대로 줄세워야 한다. 형은 크니까 대통령을 맡고, 동생은 작으니까 총리로 간다. 절대성은 나의 입장을 배제하고 대상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따른다. 결따라 가는 거다. 형제가 있다면 형과 아우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여기서 앞사건이 뒷사건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맨 처음을 잘 찍어야 뒤가 순탄하다. 순서의 문제다. 실존과 본질 중에 무엇이 앞서느냐다. 샤르트르는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나 인간은 그 반대다.’고 주장했다. 컵이 하나 있다면 현장의 이 컵이 존재하기 전에 컵이라는 본질이 먼저 있었다는 거다. 과연 그런가? 천만에! 열역학 1, 2법칙이 먼저 있었다. 만유인력에 의해 그것은 컵이 된 것이다. 무엇인가? 내가 이것을 컵으로 규정하면 저것이 불쑥 머리를 디밀고 나타나서 ‘그럼 나는 뭔데?’ 이렇게 된다. 상호작용에 의해 서로 연동되어 결정된다는 것이 실존이다. 존재는 본질이라는 쓰임새에 의해 규정되는게 아니라, 혹은 신의 창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벌떡 일어선다. 실존은 지금 현재의 폭넓은 상호작용이다. 우주에 나와 컵 둘 밖에 없다면 어떨가? 내가 그것을 컵이라고 하면 그것은 컵이다. 이는 주관의 상대성이다. 그런데 또다른 컵이 이의를 제기한다. ‘쟤 때문에 졸지에 나도 컵됐네.’ 하고 따진다. 대상이 둘이냐 하나냐다. 하나면 상대성, 둘이면 절대성이다. 하나라고 보면 착각이고 실제로는 언제라도 둘이다. 컵이 있기 전에 주전자가 먼저 와서 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총이 있으면 총알이 있고, 펜이 있으면 잉크가 있고, 연필이 있으면 지우개가 있다. 혼자 우두커니 존재하는건 우주 안에 없다. 반드시 짝이 있다. 그러므로 컵은 컵이 아니며, 주전자가 물을 따라줘야 비로소 컵이다. 컵은 주전자라는 상부구조에 의존하는 불안한 존재다. 컵 자체의 본질 따위는 없다. 고유한 인간 자체의 본질같은건 없다. 영혼도 없고 이성도 없고 절대정신도 없다. 이것이 실존개념이다. 어떤 것이 있으려면 그것을 있게 하는 유도절차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그것은 에너지에 의해 결정된다. 에너지의 유도에 의해 반드시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 빛이 있어야지만 그림자가 있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사회는 의사결정원리라는 스위치에 의해 작동되며 반드시 둘씩 세트로 다닌다. 애가 있으면 증이 있고, 징벌이 있으면 관용이 있다. 상대성은 인간의 착시일 뿐 결코 자연의 본모습이 아니다. 구조론의 규칙은 둘이다. 첫째 규모에 따른 방향성의 법칙이다. 그 집단이 가족이냐, 부족이냐, 국가냐, 인류냐, 초인류냐에 따라 나아가는 방향이 결정된다.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존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계몽주의 다 필요없고 오직 집단의 의사결정에 따른 소통규모 하나가 결정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일의 시작단계냐 끝단계냐에 따라 방향성이 결정된다. 규모는 클수록 세력전략이고 일의 단계는 시작일수록 세력전략이다. ◎ 방향성 법칙 - 집단의 규모, 일의 진행단계에 따라 팀플레이로 가는 세력전략과 상대방을 배제하는 생존전략이 있다. 둘째 상호작용계 안에서 관측대상이 하나냐 둘이냐에 따라 관점의 상대성과 절대성이 성립한다는 법칙이다. 대상이 하나면 주관의 상대성, 둘이면 객관의 절대성이 성립한다. 일의 진행은 반드시 둘에서 하나로 간다. 초반에는 객관, 종반에는 주관, 초반에는 절대성, 종반에는 상대성이 나타난다. ◎ 관점의 법칙 - 관측대상이 둘이면 대상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따르는 객관의 절대성이 성립하고, 관측대상이 하나면 내가 임의로 판단하는 주관의 상대성이 성립한다. 일의 진행은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간다. 먼저 둘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구에서 달을 관찰한다면 그 대상은 하나다. 그러므로 달이 지구를 돈다. 천동설이 맞다. 그런데 뒤에 목성이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진다. 달이 지구를 도는게 분명히 맞는데도, 목성의 교란 때문에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관측대상이 둘이면 어쩔 수 없이 객관으로 가야 한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게 맞다. 지동설 수용이다. 합리주의, 경험주의, 모더니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의 주의들은 모두 이러한 관점을 두고 벌어지는 소모적인 입씨름이다. 당신은 이제 두 개의 나침반을 얻었다. 하나는 집단의 규모와 사건의 단계에 따른 방향성 원리고, 둘은 관측대상이 둘이냐 하나냐에 따른 관점의 원리다. 결론은 언제라도 관측대상은 둘이므로 집단의 규모는 크다는 거다. 관측대상이 하나인 경우는 인간의 착각일 뿐 자연에 없다. 목성은 없고 달 하나만 있는 경우는 없다. 관측대상이 하나인 경우는 잠정적인 것, 단면적인 것, 일의 전모를 보지 않고 파편화된 부스러기를 보는 것이다. 시야를 좁힌 것이다. 가짜다. 눈 감고 보면 틀리게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수도 있는게 아니고 명백히 잘못 본 것이다. ◎ 방향 - 세상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 당신은 구조론 1법칙과 2법칙을 얻었다. 일이 진행하는 방향성과 내가 사건에 개입하는 지점인 관점을 찾았다. 바야흐로 원근법이 세팅되었다. 소실점을 찾았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떤 순서로 그려야 할지가 알아챘다. 그러나 부족하다. 다시 둘을 하나로 담아내야 한다. 실제로는 언제나 집단의 규모는 크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일의 전모를 보지 않으므로, 엄마 품의 아기처럼 바깥세상을 보지 않으므로 작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두 방향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게 아니고 실제로는 언제나 세력전략이 옳다. ◎ 구조론 1법칙 – 규모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당신이 어느 위치에 포지셔닝하든, 게임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집단의 규모는 크다. 그러므로 세력전략이 답이다. 만약 생존전략으로 간다면 이미 진 게임이다. 이것이 구조론의 최종결론인 비대칭행동이다. 대칭행동은 설국열차이 커티스처럼 강한 적에 맞서는 것이다. 혹은 윌포드처럼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자연의 대칭성을 이용하되 종국에는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비대칭으로 가야 한다. 열차를 깨부수고 바깥세상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의사결정주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지켜보는 정신이 있고, 그 정신을 지켜보는 몸이 있고, 그 개인을 지켜보는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를 담아내는 자연이 있고, 또 그 자연을 담아내는 우주가 있다. 컵이 있기 전에 주전자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언제라도 당신보다 크다. 당신은 이미 팀이다. 대개 자신을 좁게 규정한다. ‘나만 나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그 나에 자신의 몸도 끼워준다. 몸은 왜 끼워주는데? 몸조차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것을 빌렸다면 임차료는 냈는가? 이미 당신은 팀의 일부로 기능하므로 실존이다. 방향성은 정해져 있다. 우주가 세력전략을 쓰므로 당신도 세력전략을 써야 한다. 생물이 진화하므로 당신도 진보해야 한다. 존재라는 팀 안에서 당신이라는 선수를 별도로 분리해내는 순간 당신은 사라지고 만다. 당신의 본질은 없으며 본래 무無다. 현재의 상호작용이 당신의 존재를 규정한다.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팀에서 나와 영원히 팀으로 계속 간다. 화살 한 대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맞히는 것이 절대성이다. 한 마리만 쏘면 상대성이다. 궁수는 활과 과녁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그것은 2다. 그 화살이 과녁에 맞으면 1이다. 세상 모든 것은 2에서 1이다. 2는 비대칭, 1은 대칭이다. 비대칭행동이어야 한다. 바둑 격언에 손따라 두지 말라고 했다. 상대가 A에 두었다면 A 뒤의 2를 보호하기 위해 A에 둔 것이다. A 1의 침입을 막을 것이 아니라, A가 보호하는 배후의 2를 쳐야 한다. 사건은 2고 사물은 1이다. 표면의 사물에 현혹되지 말고 이면의 사건을 쳐야 한다.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와 같다. ‘차나 한잔 하게.’ 주인과 손님 2를 차 1로 꿰었다. 그 찻잔을 받으면 1로 낚인다. 부디 그 잔을 받지 말라. 컵이 있으면 주전자가 있다. 고유한 컵의 존재 따위는 없다. 집이 두 채 있다. 한 채는 비어 있고, 한 채는 가득차 있다. 어느 집을 택할 것인가? 빈 집을 사는 사람은 주인이고, 가득찬 집을 터는 사람은 도둑이다. 끽다거喫茶去, 잔을 받지 말고 주전자를 보라. 채워진 잔을 털어먹지 말고 빈 주전자를 챙겨라.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 형식은 소통하여 마침내 완성되고 내용은 소모되어 사라진다. 형식이 실존이다. 사물 1이 아니라 사건 2가 정답이다. 사건은 에너지를 태운 작용반작용이며 원인과 결과의 2다. 이때 작용의 시간측은 추적되나 반작용의 공간측은 추적되지 않는다. 그 공간이 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에 화살을 쏜다. 화살의 궤적은 추적된다. 화살에 에너지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강물의 위치는 추적되지 않는다. 강물은 출렁대며 흐르기 때문이다. 화살과 강물이 키스하는 순간에 그대의 존재는 결정된다. 인과법칙으로는 추적되는 부분과, 추적되지 않고 따라서 확률로만 접근되는 부분이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에는 종이를 접어서 칼로 쓰는 장면이 등장한다. 칼의 본질은 없다. 종이라도 그 순간에 칼로 성립한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된다. 그것은 현존재다. 숫자 7의 본질은 없으며 7은 다만 6과 8사이에 설 뿐이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정해지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정한다. 그러나 7은 6과 8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구조론은 결정론도 아니고 자유의지론도 아니고 상호작용론이다. 설국열차처럼 꼬리칸과 앞칸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엔진을 장악해야 한다. 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컵이 아니라 이쑤시개다. 그 순간에 내가 결정한다. 컵으로 이를 쑤시므로 이쑤시개다. 그러나 조심하라. 하나의 컵이 이쑤시개로 되는 순간에 다른 모든 컵들의 운명도 바뀐다. 합리주의부터, 계몽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모더니즘 하는 모든 주의들은 ‘컵은 컵이다’는 결정론적 관점과 ‘내가 쓰면 이쑤개다’는 자유의지론의 투쟁이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꼬리칸 사람들이 도전해볼만한 엔진칸이 있다는 말이다. 이에 인간은 흥분한다.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전복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곧 낙담한다. 각자의 위치는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커티스의 도전은 실패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삭감된다. 주체의 설 자리는 없다. 자유의지론은 인간의 주체성을 긍정한다. 일체유심조라 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나 몸에서 마음으로 물러서는 순간 현장과 이탈한다. 에너지가 없다. 공허해진다. 객관적 현실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법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론은 결정된 부분과 결정할 부분을 일러준다. 공간은 자연에서 발견되고 시간은 내가 특정한다.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선제대응하여 사전에 팀을 결성해 두어야 한다. 세상과 한 편에 서야 한다. 세상이 가는 흐름을 읽고 거기에 올라타야 한다. 거기에 빨대를 꽂고 에너지를 빼먹어야 한다. 선수가 아니라 후수가 되면 거꾸로 결정당한다. 팀에서 개인으로 밀리고, 몸에서 마음으로 밀리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밀리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인류의 철학사는 설국열차의 설정처럼 ‘다 정해져 있다.’는 파와 ‘내가 결정하겠다.’는 파의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의 연속이다. 구조론이 논쟁을 종식한다. 선제대응이 정답이다. 팀플레이가 정답이다. 결정하는 스위치를 선점해야 한다. 무엇보다 엔진칸을 선점해야 한다. 그리고 바깥으로 난 문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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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뻥 뚫리는 명문이오!
인류라는 관점에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지구는 곧 무로 돌아갈 수도...
구조론이 이 허무의 장막을 찢는 돌파구가 되겠군요.
세계 지식인들은 다 죽은 듯 한데, 구조론의 사자후만 천지에 가득하오...
구조론=영생론이구려. 끝이 없는 상호작용의 세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