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고전주의
무슨 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문예사조들은 모두 큰 틀에서의 유물론과 유심론 구도 안으로 들어간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처음 신이라는 실재에서 인간의 이성이라는 관념으로 옮겨간 것이 계몽주의다. 이러한 과정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문예사조의 이름을 바꾸어 가며 되풀이 된다. 고전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이상주의를 부활시켜 신의 것을 인간에게로 가져온다는 입장이다. 당신의 지적 수준에서 신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였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신이 유물론 포지션이었다. 고전주의가 신의 실재를 추구했다면 낭만주의는 인간의 관념을 추구한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과학을 앞세워 신의 실재론 포지션에 대타로 들어간다. 신과 인간의 대칭구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대칭구도는 이름을 바꾸어 반복된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이다. 전자는 생산자 포지션이고 후자는 소비자 포지션이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생산자가 권을 장악하지만 소비자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시장의 현실을 반영하여 낭만주의와 대중음악이 대두되나, 새로운 과학적 성과에 힘입어 새로운 생산자의 권이 제시된다. 그 변곡점에 다윈과 프로이드와 마르크스가 있다. 모든 문예사조의 생산자 입장은 작가 자신이 창의한 작품 내부의 조형적 질서다. 소비자 입장은 거기에 인간의 감정을 입힌다.
낭만주의
같은 사상이라도 초기에는 생산자 입장이 강조되고 후기에는 소비자 입장이 강조된다.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이라도 뒤로 갈수록 혁명소비자의 입김이 반영된다. 전자는 when에서 where를 보고 후자는 what에서 who를 본다. 고전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은 공간에 대한 탐구다. 낭만주의, 상징주의, 아카데미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에 의한 변조다. 문예사조의 개척자들은 이전의 사상에 대한 성찰을 내세우며 공간을 탐구하는 척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소비자영합주의다. 단지 시장의 수요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where와 who가 뒤섞여 있다. 실존주의나 구조주의나 모두 무미건조한 where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who의 감상이 덧칠되어 있다. 그래야 작품이 팔리기 때문이다. 백신파와 패치파가 있다. 디지털적 보편주의와 아날로그적 완벽주의다. 백신파는 보편주의 입장에서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노선이고 패치파는 완벽주의로 부단히 노력하여 완성도를 끌어올린다는 입장이다. 백신파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선제대응하지만 어딘가 허술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패치파는 꼼꼼하게 일은 잘하지만 유행이 지난 뒷북인 경우가 많다. 백신파는 시장을 개척하지만 결과적으로 남좋은 일 시키는 경우가 많고, 패치파는 소비자의 입장을 반영하여 흥행에 성공하지만 명성은 얻지 못한다. 스티브 잡스처럼 양쪽을 동시에 커버하는 경우는 드물며 대개 둘 중의 하나에 선다. 둘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의 경우 내막을 들여다 보면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처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있다. 공존하기 어려운 둘을 묶어내는 것은 강력한 동기부여다. 공동체의 발견에 의한 대승적인 팀플레이에 의해 인간은 동기부여 되며 둘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다.
본능과 욕망
본능
본능이 무의식이면 욕망은 의식이다. 본능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단순히 환경을 읽고 무의식이 반응한 것이다. 무엇보다 환경이 인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욕망은 본능의 명령을 임의로 해석하며 그 결과는 대개 같은 행동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은 단순히 경험하여 아는게 그것 뿐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인간은 할게 없으면 했던 행동을 반복한다. 이유를 물으면 욕망이라고 대답한다. 실제로는 무의식의 명령을 따른 것이며 그것은 계에 걸린 스트레스의 반영이다. 본능은 상당부분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결정한다.
욕망
욕망은 계에 걸린 스트레스를 자의로 해석한 것이다. 본능은 성적 스트레스와 같은 호르몬의 작용에 의한 스트레스이거나 집단 안에서의 포지션 설정에 따른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다. 포지션 설정에 따른 스트레스가 자부심, 소외감, 사명감 등으로 나타난다. 밥을 먹고 싶든, 술을 먹고 싶든, 돈을 벌고 싶든, 출세하고 싶든 스트레스의 작용이며 그 해석은 경험에 의지한다. 인간은 집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존엄을 획득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유전자의 명령이다. 젊었을 때는 이성이나 동료에 대한 갈망, 혹은 이성이나 동료 앞에서 돋보이기 위한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이가 들었을 때는 가족을 보호하는 수단인 금전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생각과 말
생각
생각에서 말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틀렸다. 대화에서 말이 나온다. 그 대화상대는 타자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말이 대화에서 나오듯이 생각 역시 환경과의 소통에서 나온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의 층위는 결정된다. 환경이 가족이면 저급한 생각, 패거리면 낮은 생각, 국가이면 제법 생각이 되고, 인류와 문명의 차원이어야 진짜 생각은 가능하다. 어원으로 보면 생각think은 가시가 쏘는thorn듯이 아이디어가 속으로through 찔러 뇌를 관통하는 것이다. thought는 쏘다+잡다이다. 머릿속을 찌르는 아이디어를 잡아챈 것이 생각이다. 생각은 환경과 나의 상호작용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환경과 대화한다는 말이다. 환경과 내가 서로 화살을 쏘아댄다. 과연 환경과 소통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머리에 힘주고 있는가? 생각은 내 안에서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환경 안에서 무언가 이끌어내는 것이다.
말
말은 대화에서 나왔다. 흔히 명사에서 동사가 나온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생각에서 생각하다가 나온게 아니라 think에서 thought가 나온 것이다. 대화는 주와 객 사이에서 성립한다. 주객은 이미 존재하여 있고 말은 둘 사이를 핑퐁처럼 오간다. 그 오가는 핑퐁은 동사다. 말은 동사에서 나왔고 그 동사의 주인을 찾아 명사가 이루어졌다. ‘간다’, ‘누가?’, ‘내가’, ‘언제?’, ‘오늘’, ‘어디?’, ‘집에’가 핑퐁처럼 오가면서 결합하여 ‘나 오늘 집에 간다’는 말이 꾸려진다. 언어는 최초에 사람의 동작을 입모양으로 흉내낸 데서 시작되었다. 주와 객이 있고 그 사이에 동작이 오간다. 동작이 동사로 발전하고 동사가 과거형으로 바뀌며 명사로 변한다. 핑퐁식 주고받기 대화가 쌓여서 문장이 이루어졌다. 바람이 분다면 ‘불다’는 동사가 불음(불었음, 과거형) 곧 바람으로 변한다. 언어는 명명된 것이 아니라 진화한 것이며,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건은 둘의 대화다. 단어에 뜻이 있는게 아니라 사건 안에 포지션이 있다.
'생각' 을 '글' 로 치환해서 봐도 될까요?
말은 주와 객사이 대화에서 나오고, 글은 나와 환경사이 대화에서 나온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좀 이상한 점이
말 잘하는 사람이 글솜씨가 없고
글 잘쓰는 사람이 말재주가 없더라는 점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