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자연
자연은 사건의 원인측이다.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 자체의 내재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이 결이다. 결은 에너지가 진행하는 루트다. 인간사회 역시 자연의 일부다. 사회의 결은 집단의 의사결정으로 나타나며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인간의 몸 역시 자연의 일부다. 몸은 마음에 정보를 제공한다.
인간
인간의 마음이 자연과 분리되는 별도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부단히 외계의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마음은 자연과 상호작용하고, 집단과 상호작용하고, 몸과 상호작용한다. 자연에서 들어온 에너지를 처리하고, 집단에서 내려온 무의식을 처리하고, 몸에서 내려온 정보를 처리한다.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일거리를 들여오고 내부에서 처리함으로써 자기실현한다.
유물론과 유심론
유물론
유물론은 사건의 원인측인 에너지의 결에 주목한다. 유심론은 사건의 결과측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목한다. 이때 기준은 인간이다. 인간 기준은 넌센스다. 과학의 지위를 얻으려면 객관화 하여 사건의 맥락을 따라야 한다. 이에 실재론과 관념론이 제시된다. 실재론은 유물론적이고 관념론은 유심론적이다.
유심론
유심론은 사건의 결과측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사건의 원인측을 구성하지 못하므로, 의사결정의 원인측을 성립시키는 집단의 무의식을 끌어들여 개인의 마음을 우주의 마음으로 확장하면 관념론이 된다. 우주의 마음이 나의 마음에 투영되어 있다는 식으로 된다.
실재론과 관념론
실재론
실재론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사건의 바깥쪽에 주목한다. 인간 기준이 아니라 사건의 맥락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진일보 한 관점이다. 그러나 대칭의 한쪽만을 취하므로 짝짓기가 없어서 그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인간이 대상을 통제하는 방법은 대칭을 연결시키거나 끊는 스위치를 장악하는 것이다. 통제의 스위치는 양자를 통일하는 소실점을 발견할 때 획득된다. 실재로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결정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에너지 획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흥분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그 에너지가 손에 쥐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공허해진다.
관념론
관념론은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사건의 안쪽에 주목한다. 자유의지를 앞세워 에너지에 대한 통제가능성을 제시하는 점에서 흥분을 불러 일으키지만 정작 그 에너지가 없어서 허무해진다. 물적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깊은 산골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무엇이든 해결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 무엇이 없다.
중관파와 유식파
중관파
중관파는 자연의 공空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실재론적 포지션이다. 에너지 획득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 그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하므로 공허하다. 에너지가 있으나 자연의 것이고 내것이 아니다.
유식파
유식파는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유심론, 관념론의 포지션이다. 자유의지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으나 결정적으로 에너지가 없어서 허무하다.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이 있으나 써먹을 대상은 없다.
대승과 소승
대승
대승은 개인의 밖인 사회에서 팀플레이를 통해 동기부여 한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사회의 에너지원이다. 바깥에서 에너지를 획득하고 그것을 내 안에서 통제한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한계, 실재론과 관념론의 한계를 극복한다. 나아가 세상을 바꿈으로써 나의 포지션을 얻는 것이 대승이다.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개념은 중관과 유식이 대칭을 이루어 일의적으로 통제됨을 해명한다.
소승
소승은 개인의 신분상승에서 동기부여한다. 이는 관념론적, 유심론적 포지션이다. 고苦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사물의 관점에서 보는 본질적 한계가 있다. 소승은 병을 치료할 수 있으나 인류는 건강하다.
상호작용론과 확률론
상호작용론
유물과 유심, 실재와 관념은 사물의 관점에서 바라보므로 대칭된 둘 중의 하나를 취하고 다른 쪽을 배척한다. 대칭이 깨져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므로 불완전한 관점이다. 화살의 머리를 취하면 꼬리를 잡혀 날아가지 않고 꼬리를 취하면 머리가 없어 명중하지 않는다. 상호작용론은 둘을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한다. 화살이 머리와 꼬리를 갖추니 통제된다. 발사할 수 있고 명중할 수 있다. 에너지의 바깥에서 들어오고 안쪽에서 처리한다. 의사결정의 동기부여는 집단에서 들어오고 개인이 집행한다.
확률론
사건은 작용반작용의 대칭을 이룬다. 이때 작용측만 추적되며 수용측은 추적되지 않는다. 사건의 추적은 에너지의 결을 따른다. 에너지가 있는 쪽은 작용측의 시간이고 없는 쪽은 수용측의 공간이다. 시간측과 공간측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다고 믿는 결정론은 오류이다. 그러나 확률론은 결정론을 대체하지 못한다. 확률은 사건의 원인측이 아니라 결과측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이 정답이며 시간측만 추적되고 공간측은 모르므로 확률로만 보고되는 지점이 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결정론
결정론은 입자론의 관점에서 인간 바깥의 에너지원을 찾는다. 이는 사건의 작용측만 본 오류다. 운명론으로 기울어지며 자유의지가 설 곳은 없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에너지를 조달하는 물적 현실이면서 한편으로 집단의 의사결정에 따른 인간의 동기부여다.
자유의지론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답을 찾으나 현실과의 접점이 없으므로 개인의 내면에 몰입하여 현실도피한다. 답은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집단의 무의식에 근거하는 동기부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이 결혼하고 성취하고 가치를 이루는 모든 것은 집단과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홀로 고립되어 있어도 역시 몸과의 상호작용, 세상과의 상호작용에서 가치를 얻는다.
절대성과 상대성
절대성
절대성은 두 사물을 하나의 사건으로 통일시켜 소실점을 찾아낸다. 상대성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의 한 단면을 잘라낸 불완전한 관점이다. 절대성이 성립할 때까지 인식의 층위를 끌어올려야 한다.
상대성
상대성은 사물로 보는 관점이다. 이때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상대성을 가진다. 관측자의 형편에 따라 관측대상의 가치가 달라진다. 배고픈 사람이 보면 진수성찬이요 배부른 사람이 보면 음식쓰레기다. 상대성은 절대성을 찾아가는 단서로 기능하나 그 자체로는 과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절대어와 상대어
절대어
절대어는 작용과 수용 양측을 ‘A면 B다’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으로 나타낸다. 이때 전제 A와 진술 B는 대칭을 이루므로 둘 사이에 일의적인 엮임이 성립되어 명제가 하나의 소실점을 가리킨다.
상대어
상대어는 전제 없이 일방적으로 진술하며 진술은 작용측 아니면 수용측을 가리킨다. 이때 작용측과 수용측 중에서 빠진 부분이 숨은 전제가 된다. 화자는 전제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강요한다. 일상적으로는 대개 같은 사건이 반복되므로 사건을 유도하는 시공간의 장과 에너지가 알려져 있어서 상대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나 과학의 언어로는 부적절하다. 학생이라면 학교라는 공간, 학년이라는 시간, 공부라는 에너지가 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학하거나 창의하려면 그것을 새롭게 유도하는 절차부터 밟아야 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디지털
디지털은 각 위에 선을 긋는다. 각이 꼭지점이 소실점을 이루어 사건의 작용측과 수용측을 동시에 본다. 각의 두 선분 하나가 증가하면 맞은 편도 같이 늘어나므로 두 선분의 대칭에 의해 각으로 수렴되어 통제된다. 완전한 관점이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해체하여 단면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관점이다.
아날로그
아날로그는 선 위에 점을 찍는다. 선 위에서 두 점은 마주보고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선 위에는 무한히 많은 점을 찍을 수 있다. 무한의 바다에 빠져서 일의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이는 사건의 화자가 개입한 불완전한 관점이다.
소실점과 관점
소실점
소실점은 대칭의 엮임을 통해 사건의 안과 밖을 일의적으로 꿴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볼 때는 소실점이 없다. 원경과 근경을 동시에 바라볼 때 비로소 소실점의 문제가 제기된다. 사건은 상호작용을 이루는 작용측과 수용측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전모가 파악된다. 둘을 동시에 꿰어내는 것은 자연에서 에너지고, 사회에서 의사결정이다. 문학과 예술에서는 스타일과 주제와 캐릭터와 고저장단의 형태로 다양한 소실점이 제시된다. 고유한 자기만의 소실점을 획득할 때 작품의 스타일은 얻어지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관점
관점은 사물을 바라보는 상대적인 관점이다.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표현된다면 이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그 대상을 거울로 삼아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면 그것은 짜장면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누구도 물어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기호를 보고한 셈이다. 상대성의 관점은 우회적인 자기소개이므로 과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상대성의 관점으로는 작품 내부의 조형적 질서가 포착되지 않는다. 작품의 명암과 원근과 색채와 캐릭터로 대칭성을 드러내야 하며 그것이 작가가 창의한 조형적 질서다.
모형과 패턴
모형
자연의 패턴을 비교하여 모형을 포착할 수 있다. 패턴이 출력측의 하부구조이면 모형은 입력측의 상부구조다. 물레방아의 방아가 패턴이라면 물레는 모형이다. 패턴은 운동을 처리하고 모형은 운동을 생산한다. 모형을 사용하면 문제에 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답에 문제를 맞추는 방법으로 직관할 수 있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패턴
자연에서 포착되는 정보들에서 서로 닮은 것이 패턴이다. 사물은 서로 다르나 사건은 모두 닮았다. 사건은 에너지에 의해 유도되며 그 에너지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두 사물이 닮았다면 그곳에 동일한 사건이 복제되고 있다는 의미다. 사물로 보면 매미의 날개와 새의 날개는 서로 다르지만 사건으로 보면 둘 다 공기와의 상호작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직관과 추론
직관
직관은 문제의 답을 찾는게 아니라 거꾸로 답에다 문제를 맞춘다. 인간의 좌절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를 인지하지 못해서다. 전제와 진술의 구조에서 진술을 입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제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형식은 일정하므로 하나를 찾으면 전부 풀린다. 간화선의 화두들은 문제를 맞춰내야 할 사건의 모형을 제시한다. 질문을 받고 답을 찾으려 하면 실패한다. 숨은 모형을 포착하려 해야 한다. 자신이 질문자의 포지션에 설때 사건의 전모를 조망하는 주체의 관점을 얻는다. 직관할 수 있다.
추론
추론은 결과측의 사물에서 단서를 찾아 원인측의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때 사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추론은 귀납적 전개이나 다른 사람에게 하는 설명이 그러하며 실제로는 베테랑의 경험에 의존하여 연역이다. 연역은 추론이 아니라 직관이다. 실제로는 직관해놓고 설명하기 위해 추론으로 포장한다.
연역과 귀납
연역
연역은 사건에서 사물로 에너지의 결을 따라간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문제는 연역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건을 포착했을 때는 이미 에너지가 빠져나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화살에 맞았다면 이미 화살을 쏜 궁수는 도망간 다음이다. 우리는 사건의 결과측에 서므로 많은 경우 연역은 불가능하다. 우물 안에서는 결코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통해 보편적인 사건의 모형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귀납
귀납은 사물에서 사건을 추론한다. 이는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것이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역방향 진행이다. 귀납의 성과는 추측이며 반드시 연역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귀납은 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정법으로 연역을 보조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이 반복될 때 귀납은 확률적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이 없으므로 바른 과학의 도구는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에너지의 공급에 주목하는 유물론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물질의 지배를 강요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자본주의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심론 신앙으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자본의 물질과 신앙의 정신을 동시에 차지하는 모순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가 이익이 걸리면 유물론을 넘어 유금金론으로 진화한다. 그런데 사회로 보면 정치가 경제에 앞선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개인의 사적소유에 선행한다. 정치 측면에서는 사회주의가 유물론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에너지 수용측을 보는 유심론이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이를 뒤집어 유물론적 관점을 제시했다. 이는 정치 측면에서만 유효하다. 정치로 보면 집단의 의사결정이 유물론이고 개인의 사적소유는 유심론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청소년은 집단의 의사결정이 물적 토대를 구성하므로 사회주의가 유물론적 입장에 선다. 그러나 이 경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대척점에 서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대칭되는 것은 봉건주의나 종교집단인 경우가 많다. 자연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앞서고, 사회주의는 종교신앙에 앞선다. 정치로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앞선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뒤섞여 말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헷갈리게 된다.
윤리와 도덕
윤리
윤리는 의사결정의 공급측을 보는 실재론의 입장이다. 의사결정의 공급측은 집단과 자연이 있다. 사회의 집단윤리인 인륜과 자연법칙인 천륜이 있다. 개인의 양심도 자연에서 유래하므로 윤리이나 그 실천은 도덕이다.
도덕
도덕은 의사결정의 수용측을 보는 관념론의 입장이다. 도덕은 윤리가 개인에게 내면화 된 것이다. 윤리가 사건이면 도덕은 사물이다. 윤리가 집단이면 도덕은 개인이다. 도덕은 윤리의 하부구조다.
육체와 마음
육체
육체는 에너지의 공급측이다. 에너지는 자연을 따르므로 육체는 자연의 일부이며 나아가 우주의 자연 그 자체다. 몸뚱이만 육체라고 여기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며 상호작용으로 보면 우주 전체가 육체다. 몸은 그 중에서 마음으로 통제가능한 부분을 일컫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통제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를 버릴 때 자아는 확대된다. 육체는 질문하고 마음은 답한다. 상호작용하여 인간을 구성한다. 육체에서 분리된 마음은 우주에서 분리된 마음과 같다. 집은 공간이 모여 만들어졌다. 공간을 제거한 건축물은 불성립이다. 마음은 의식이며 의식은 의도의 집이고 의도는 판단의 집이다. 마음 역시 집이므로 만약 육체를 집으로 보고 버린다면 마음 역시 버려진다. 육체는 존재이고 마음은 기능이며 존재는 기능에 앞선다. 몸을 통제할 의도를 버리고 큰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
마음은 에너지의 수용측이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포지션이 바뀌어 마음이 실재가 되고 육체가 관념이 된다. 이를 지나치게 해석하여 마음이 보편적 실재이고 육체는 공空하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 다시 마음의 마음이 생겨난다. 마음의 마음의 마음도 생겨난다. 점차 공허해진다.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자연의 모습 역시 우주의 마음이 벌떡 일어선 것이다. 자연이라는 우주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은 하나로 연동되어야 한다. 육체를 배척할 수 없다. 상호작용 안에 내가 있다. 우주 안에 인간이 있다. 집단 안에 개인이 있다. 우주의 마음, 인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무의식과 의식
무의식
무의식은 모듈판단이다. 어떤 하나가 판단될때 이와 연동되어 있는 많은 것들이 동시에 판단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뇌 안에서 이미 판단되어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사랑의 감정은 그 순간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판단되어 있는 것이 나타난다. 처음보는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그동안 무수히 상상하던 것과의 일치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인간행동의 대부분은 즉흥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라 집단의 스트레스를 읽은데 따른 무의식적인 포지셔닝이다. 인간의 행동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각해서 그 순간에 판단한다면 끝없이 변덕을 부리게 된다. 이미 판단되어 있는 것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무의식에서 이미 판단되어 있는 것을 집행하는 시공간의 지점만 임의로 결정한다. 무의식과 의식은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과 의식 중 하나에 치우치면 곤란하며 역시 상호작용이 정답이다.
의식
생존환경이 양호할 때 인간이 집단 안에서 익명의 군중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차별화를 시도한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고 세력화를 시도하며 집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권權을 획득하려고 한다. 이는 세력전략이다. 반면 생존환경이 나쁠 때는 타자와 같아지려고 한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생존전략이다. 인간에게는 아줌마처럼 패션을 통일하려는 경향과 젊은 여성처럼 맵시를 과시하는 경향이 공존한다. 공통점은 의사결정역역 보존이다. 약할 때는 닮는 방법으로 포지션을 획득하고 강할 때는 튀는 방법으로 포지션을 획득한다. 어느 쪽이든 의사결정보다는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 권한의 획득은 권장되어야 할 비대칭행동이며 권한의 행사는 억제되어야 할 대칭행동이다. 진정한 자유의지는 어떤 판단이 아니라 그러한 권한의 획득에 있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의 에너지 공급측이다. 물적으로는 반대다. 그런데 정치시스템은 의사결정이 본질이므로 공급측으로 보는 것이 맞다. 반면 종교집단이나 봉건주의, 전체주의는 의사결정의 회피기동이다. 결정할 일이 없는 봉건사회라면 의사결정을 회피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맞다. 그 사회는 진보하지 않지만 인류역사 1만년 중에서 진보의 역사는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회는 정체되어 있었고 변화와 발전은 나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멈출 수 없다. 진보하지 않을 수 없다. 부단히 의사결정을 해야 하며 그것은 종교적, 봉건적, 전체주의적 퇴행을 극복하는 것이다.
전체주의
전체주의는 결정된 의사를 집행하는 에너지 수용측 입장이다. 교리에 의해 의사가 결정되어 있는 종교집단이나, 정체된 봉건사회나, 선진국을 모방하는 후진국은 의사결정을 회피하여 전체주의로 퇴행한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모방하면 되므로 의사결정이 해롭다는게 개발독재다. 그 경우 2등까지는 가능하나 선진국 문턱은 못 넘는다. 선진국은 발권력이 필요하고, 발권력은 창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이 전체주의로 가는 경우는 사회의 에너지가 의사결정영역 획득에 따른 동기부여임을 모른데 따른 오류다. 마르크스는 과학이 인간의 의사결정을 대체한다고 믿었다. 과학은 결정하고 인간은 집행한다는 식이다. 필요한 것은 바른 의사결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획득되는 권權이다. 의사결정영역의 확보가 바른 판단보다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경제성장보다 중요하다.
과학과 종교
과학
과학은 에너지 공급측이다. 자연과학은 혁신을 통해 물적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문과학은 의사결정을 통해 심적 에너지를 공급한다. 곧 동기부여다. 과학이 종교를 물리치지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의 수용 포지션이 별도로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문화와 예술은 일정부분 종교를 극복한다. 인간은 문제의 생산을 통한 동기부여를 필요로 하나 과학은 문제의 해결에나 힘쓸 뿐이다. 문화와 예술은 능동적으로 문제를 생산해서 사회에 스트레스를 공급한다. 패션을 통한 심리적 차별이 그러하다. 패션을 받아들인 서울사람과 패션을 모르는 시골사람 사이에 계급적 질서가 존재한다. 문화는 끝없이 사회를 긴장시켜 소통의 밀도를 높인다. 그러한 긴장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의 해결보다 의사결정영역의 확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패션에 의한 의사결정영역의 획득이 소통의 밀도를 높이는 큰 자산임을 알아야 한다. 1조원의 황금보다 뛰어난 디자이너 한 명이 더 사회의 신용을 높이고 그 사회로 하여금 발권력을 행사하게 한다.
종교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의사결정 단위 중 하나로 가족 단위를 뛰어넘는 부족공동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부족이 사라진 시대에 부족이다. 부족의 역할은 의사결정을 통한 동기부여다. 종교는 의사결정을 상부구조에 위임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결정영역을 손실하지 않으면서도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재치있는 방법이다. 의사결정은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친구나 가족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수평적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의 장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하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결정하는 척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