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절대어사전 언어의 소실점 ‘지구는 왜 둥글까?’ ‘사과는 왜 떨어질까?’ 사람들은 태연히 ‘왜’라는 표현을 쓴다. 납득할 수 없다. 위화감을 느낀다. 뭔가 이상하다. 왜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를 미리 깔고 들어가는 거지? 왜 사과가 떨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거지? 이런 식으로 그냥 먹고들어가는게 어딨어? 이건 질문자가 미리 답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는 하나 이것이 과학적인 태도는 아니다. 과학을 표방하려면 따질 것을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 흐르는 강물에 페트병이 하나 떠 있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페트병은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페트병이 바다로 떨어진 것일까? 천만에. 페트병은 가만 있었다. 강물이 흐른 것이다. 사과는 떨어지지 않았다. 공간이 흐른 것이다. 왜 공간이 흐른다고 말하지 않고, 사과가 떨어진다고 말하나? 사과가 이 모든 사태의 범인인가? 왜 사과에게 책임을 지우지? 사과는 죄 없다. 가만있는 사과를 건들지 말라. 공간이 그랬다. 지구가 둥글다는 말도 이상하다. 지구주변의 공간이 지구의 질량중심 기준에서 대칭적이다. 이는 공간의 문제일 뿐 지구는 죄없다. 사람들이 말을 비과학적으로 한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때다. 이후 교과서를 불신하게 되었다. 사실은 죄없다. 언어가 문제다. 언어만 바로잡으면 문제는 모두 풀린다. 어른이 되어 국어사전을 새로 쓰기로 했다. 40년이 지났다. 아직 40년의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첫 걸음을 떼 본다. 국어사전은 바뀌어야 한다. 일상언어는 상대어다. 절대어로 바꿔야 한다. 주관어를 버리고 객관어를 써야 한다. ‘지구는 둥글다’는 표현은 상대어다. ‘지구 주변의 공간이 지구 중심에 대해 대칭적이다’는 표현은 절대어다. 그림으로 치면 소실점과 같다. 회화는 600년 전에 소실점이 도입되어 규범이 바뀌었는데 언어는 여전히 소실점 없는 봉건언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 과학자가 말이다. 사과 하나를 그린다면 소실점은 필요없다. 사과와 화가가 대칭적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는 상대적 상황이므로 상대어로 말해도 상관없다. 사과 둘이 있다면 곤란해진다. 하나는 멀고 하나는 가깝다. 이때는 화가의 시점이 아니라 사과들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따라야 한다. 언어 역시 그러하다. 사과만 있다면 상관없다. 사과가 떨어질 이유도 없고 지구가 돌 이유도 없다. 사과와 지구 둘이 있다면 곤란해진다. 하나면 사물이고 둘이면 사건이다. 사건에는 반드시 소실점이 있다. 둘을 통일하는 제 3의 지점이 있다. 둘을 동시에 보면 선에서 각으로 올라선다. 각의 꼭지점이 언어의 소실점이다. 사물을 말할 때는 상대어로 말해도 된다. 사건을 말할 때는 에너지의 결을 따라야 한다. 나무를 그리려면 상대적 시점이라도 무방하다. 숲을 그리려면 소실점을 찾아 절대적 시점을 따라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물은 그것이 반복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렇게 숨은 전제를 둔다면 규칙위반이다. 적어도 그것이 과학은 아니다. 사건은 새롭게 일어난다. ‘사과가 떨어진다’는 표현은 상대어다. ‘공간이 흐른다’가 절대어다. 절대어는 에너지의 결을 따른다. 사건의 주체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에너지는 사과에서 나오지 않았다. 화살을 밀어보내는 에너지는 화살에서 나오지 않았다. 범인은 활이다. 화살은 죄없다. 화살이 과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활이 화살을 과녁으로 밀어보낸다. 갑과 을이 다툰다면 우리는 갑 때문이거나 아니면 을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상대어다. 실제로는 공간이 비좁아서다. 땅값이 비싸서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 층간소음으로 싸우는 것이다. 땅이 범인이다. 한국과 일본이 싸우는 것은 한국 때문도 아니고 일본 때문도 아니다. 월드컵 경기 하고도 한일전이 열렸기 때문이다. 밤과 낮이 교차되는 것은 밤 때문도 아니고 낮 때문도 아니다. 태양 때문이다. 뜨고 지는 해가 밤낮을 결정했다. 상대어를 버리고 절대어를 써야 한다. 절대어는 반드시 소실점이 있다. 소실점은 대칭을 이룬 양자 위의 다른 층위에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을 획득할 때 문제는 모두 풀린다. ◎ 대칭의 사물.. 에너지 없는 두 사물이 맞선다. ◎ 비대칭 사건.. 에너지가 사물 둘을 하나의 소실점으로 꿴다. 대칭성과 이를 타개하는 비대칭성을 기준으로 국어사전을 새로 써야 한다. 대칭이면 에너지가 없어 불완전하고 비대칭일 때 에너지를 얻어 완전하다. 상대어는 대칭적이므로 실패다. 에너지의 존재를 나타내지 못한다. 상대어는 과학의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로는 부적절하다. 대칭과 이를 타개하는 비대칭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눈을 획득해야 한다. 어떤 대칭된 둘이 있으면 반드시 제 3의 길이 있다. 그것은 대칭의 중간이 아니다. 여당과 야당 가운데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 입출력의 위상차에 따른 방향성이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눈을 얻어야 한다. 절대어로 가능하다. 자연의 에너지와 인문의 의사결정 절대어 사전의 기술원칙은 사건이냐 사물이냐다. 에너지의 공급측과 수용측 사이에 성립하는 대칭성를 중심으로 이를 타개하는 에너지의 공급점을 소실점으로 놓는다. 문제는 자연영역과 인문영역의 차이다. 자연은 물질이 지배하고 인문은 의사결정이 지배한다. 인간사회의 작동원리는 집단의 의사결정원리다.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의지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집단 안에서의 무의식적인 포지셔닝을 따른다. 집단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삼는다. 한국팀이 일본팀을 꺾기 바라는 것은 집단의 의지를 개인이 내면화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관측되지만 실제로는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다만 타자의 기준이 가족이냐 국가냐 인류냐에 따라, 혹은 즉흥적이냐 신념적이냐에 따라 소인배와 지성인의 행동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기주의자 이건희도 자기 가족들과는 공산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이타의 대상이 다를 뿐 모두가 이타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자기 몸을 이타의 타자로 삼는 수가 있다. 그 몸뚱이 역시 의사결정을 하는 마음 바깥의 타자다. 주체인 마음을 희생하고 타자인 몸을 섬기다가 마약중독자 된 사람 많다. 인문에서는 의사결정의 편의에 따른 위상차가 사회활동의 전반적인 진행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연과 인문은 포지션이 상반된다. 자연으로 보면 수용측의 관념론이 인문으로 보면 작용측의 실재론이 된다. 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 육체와 정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념들은 포지션이 뒤섞여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자연이 먼저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 자연은 사건이 사물에 앞선다.
개념들은 둘씩 짝지어지며 앞은 사건, 뒤는 사물을 가리킨다. 앞은 공급측, 뒤는 수용측이다. 앞은 실재론, 뒤는 관념론이다. 앞은 원인측 뒤는 결과측이다. 자연은 사물이냐 사건이냐로 구분하고, 인문은 의사결정의 주체냐 타자냐로 구분한다. 세상의 근본은 대칭이며 비대칭에 의해 통제된다. 비대칭이므로 서열이 있다. 사건이 사물에 앞서고, 주체가 타자에 앞선다. 사건과 사물, 주체와 타자로 짝짓는 것은 대칭이고, 사건이 앞서고, 주체가 앞서는 것은 비대칭이다. 언어는 다의성을 가지므로 실제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칭과 비대칭으로 엮을 때 분명한 의미가 드러난다. 소실점을 얻어 그림이 바르게 안내하고, 관점을 얻을때 언어가 옳게 작동한다.
존재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 말은 화자인 사람에 의해 대상화 된다. 이때 존재는 사람과 대칭을 이룬다. 사람이 입자꼴이므로 막연히 존재도 입자꼴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관측자를 개입시킨 바 주관의 관점이다. 곧 상대어다. 절대어는 객관어다. 관측자의 입장을 배제해야 한다. 자연의 존재를 연출하는 주체는 시공간이라는 무대와 에너지라는 감독이다. 시공간의 어떤 지점이 외력과 상호작용할 때의 계가 에너지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존재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호작용하는 사건 안에서 대칭원리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다. 귀신이나 영혼은 통제되지 않으므로 존재가 없다. 반半존재
어떤 것이 계 안에서 에너지가 사건을 통제하는 대칭성과 방향성을 가지면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에너지를 제공하는 상부구조에 빌붙어서 특정한 조건에서만 제한적으로 존재의 성질을 나타내면 그것은 반존재한다. 그것은 사건 진행과정의 한 단면을 분리한 것이다. 빛은 존재하나 그림자는 반존재한다. 빛은 직접 통제되나 그림자는 빛을 통해 간접 통제되기 때문이다. 사건 사건event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1회의 에너지 투입에 따른 결과를 판정한다. 사건은 에너지에 의해 통제되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물은 에너지가 없을 때 반존재한다. 에너지가 없는 사건은 없으므로 반존재하는 사물은 있어도 반존재하는 사건은 없다. 사물 사물은 시공간의 포지션에 에너지가 투입되어 계를 통제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가정된다. 가정법을 썼으므로 비과학적인 표현이다. 이는 같은 사건이 반복될 때의 경험에 의존한 판단이며 확률적으로 맞다. 그러나 반복되지 않고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사물의 관점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양자 양자는 외력과의 상호작용계가 에너지에 의해 대칭적으로 통제될 때 엮임에 의한 포지션의 쌍이 입자꼴을 이루고 1회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양자는 입자와 달리 입자의 성질을 획득하는 시공간의 에너지 과정을 제출한다. 입자 입자는 원자설에 따라 검증되지 않은 여러 가정을 깔고 들어가는 비과학적 개념이다. 입자는 시공간의 포지션을 획득하고 외력에 대해 상호작용의 단위다.시공간적 포지션 및 상호작용 에너지의 획득과정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원형이정 원형이정은 주역의 개념으로 사계절이 에너지에 의해 일의적으로 통제됨을 나타낸다. 에너지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반영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 에너지와 외력의 상호작용에 따른 원형이정이 전개한다. 기승전결 기승전결은 원형이정을 반영한 한시 작법이다. 에너지 역할을 하는 주제나 스타일에 의해 시를 구성하는 각 연들이 방향성을 얻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질 때 그것으로 문학의 작품성을 판정한다. 작가가 획득해야 할 작품의 내재적 질서다. 구조론은 기승전결로 사건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