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20350 vote 3 2002.09.12 (17:33:01)

홈페이지 상단 Biography 코너에 인상에 남는 책으로 백범일지, 전태일평전, 이상의 날개,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스탕달의 적과 흑, 톨스토이우화집. 역주 화랑세기 등을 기록해두고 있지만 그냥 인상에 남은 책을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고 저는 '책안읽는주의자'라서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권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책을 읽는다는 말은 그 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책을 안읽는다는 뜻이 될수있기 때문이지요.

책을 읽으려면 책을 손에 쥔 그 자리에서 다 읽어야 합니다. 두고두고 읽는다든가, 이번주에는 이 책을 읽는다든가, 요즘은 이런 책을 읽고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책을 안읽는 사람입니다.

처음 손에 쥔 그 자리에서 한 발을 떼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려면 발췌해서 읽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발췌독을 하려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있는 대부분의 책을 다 훑고있어야 합니다. 손에 쥐는 대부분의 책의 내용이 감이 잡혀야 하지요.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로 읽는 셈인데 저는 이렇게 읽지만 다른 사람에게 저처럼 수박겉핥기로 읽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실은 제가 많은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어렵고, 하여간 중요한 점은 모든 종류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악서를 읽지 않으면 양서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종류의 책을 읽지 않으면 대부분의 종류의 책의 내용이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읽지 말아야 할 책을 가려낼 수 없습니다.

즉 어느 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책을 두루 섭렵하므로서 안읽어도 될 책을 쉽게 가려내는 것이 기술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책은 안목을 높여줄 수 있는 책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들어있고 고정관념을 깨는 책,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책이 있습니다. 기존의 관점과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그러려면 기존의 관점을 알고 있어야 하는거죠.

어떤 분야든 내재한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치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영화든 만화든 짜고치는 게임의 규칙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 목적은 그러한 내밀한 규칙을 간파하기 위함이지요.

젊었을 때는 맨 먼저 발을 디디고 사는 세상의 지도를 작성해야 합니다. 지도를 작성하려면 바깥으로 나가보아야 합니다. 경계선을 알게하는 책이 우선입니다. 과학의 경계, 우주의 경계, 사회의 경계, 역사의 경계, 인문의 경계, 종교의 경계 ..이런 책은 청소년에게 필요하지요.

가장 멀리, 가장 크게, 가장 화끈하게 ..어떤 극단의 변방을 알게하는 책 말입니다. 드물지만 어떤 분야이든 그 분야의 끝까지 가본 사람이 있습니다. 우선 우주나 공룡이나 고고학이나 모험적인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책입니다. 전체의 윤곽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나이를 먹으면 그 바깥테두리에서 안쪽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때는 시스템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즉 어떤 한 분야의 은밀하게 돌아가는 내막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야가 결국은 같은 방법의 복제입니다.

이 분야의 돌아가는 방식이 저 분야에도 해당되는 식이지요. 이런 책은 좀 전문서적이 되겠는데 어떤 분야이든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내밀하게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원리를 알면 어느 분야이든 그게 그거이기 때문에 안보고도 알 수 있지요. 참 제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의 하나로 인류학을 들 수 있습니다. 인류학은 문명인이 미개인의 삶을 관찰한 것이지요. 게임의 규칙이 드러나기 때문에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벌거벗고 사는 원주민이 백인이 가죽장화를 신은 것을 보면 백인은 사람이 아니라 소와 같이 발굽이 있는 종류의 동물이라고 짐작합니다. 백인이 바지를 입는 것을 보고는 달팽이처럼 집을 짊어지고 사는 동물이라고 짐작합니다. 달팽이가 진화해서 백인이 되었다?? 이런건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지요. 설마 그렇게 엽기적으로 상상하리라고는.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지요.

제가 책을 많이 읽은 듯이 보여지는 것은 고정관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 때문인데 이는 책의 양이 아니라, 많이 생각해서 그 분야의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원리를 알면 원리를 깰 수도 있지요. 또 청소년이라면 도서관의 총류 코너에 있는 책을 한번쯤은 훑어야 하지요.

하여간 전체의 윤곽을 모르면 책을 읽어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도 이 정보가 어떤 의미와 비중을 가지는지,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떤건지 모르기 때문에 써먹지 못합니다. 대신 윤곽을 알면 작은 정보라도 크게 써먹지요. 그 정보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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