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실
용서하는 건 어때?- 성적 학대 극복하기
-----------

christina.jpg

용서하는 건 어때 What About Forgiveness?

글쓴이 Christina Enevoldsen
역자: 오세준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을 때부터, 나는 어린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를 학대한 게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넌 그를 용서했니?" 나는 용서가 의무인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음이 두려웠다. 학대로 인해 나는 계속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많은 것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두려웠는데, 그 중에서도 버려질 것이 가장 두려웠다. 만약 내가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나는 내 기독교인 친구들에 의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신에 의해 비난받고 거부당할 것 같았다. 내가 신의 현존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채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는 한, 나는 용서해야만 했다. 용서하지않음은, 결국, 내게 저질러진 일보다 훨씬 나쁜 일이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나를 학대한 사람보다 나를 더욱 나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또한 용서가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은 척 하기"와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용서에 대한 나의 정의에 따르면, 내 아버지는 어떠한 결과도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선 안되었다. 설령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버지를 언급할 순 없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일 것이고 안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서는 또한 내가 아버지를 향해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선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상태로 계속 유지될 것을 의미하였다. 

비단 종교적 압력이 아니더라도, 난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고 싶진 않았다. 그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 만큼이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용서라는 가면을 쓴 채, 내 느낌을 틀어막고 멋진 미소를 억지로 띠고 있었다. 용서를 했을 때, 나는 과거를 뒤에 두어야만 했고 내 느낌들을 부정했었다. 용서가 치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길래, 난 내가 치유된 것처럼 행동했다. 내 분노를 깊숙한 어딘가, 결코 찾을 수 없을 어딘가에 묻어두었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묻혀 있었다. 산 채로 묻혀 있었다. 그것은 할퀴고 쥐어뜯으며 비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걸 내 자신을 향한 학대적 행동으로 표출했다. 난 위험한 성적 행동, 자해, 학대적 관계맺기 같은 온갖 종류의 파괴적 행동을 통해 내 자신을 계속 학대했다. 

결국, 난 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었다. 난 분노가 내가 어린 시절 괴롭게 겪은 유형의 일들로부터 날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통제감과 보다 큰 힘을 지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분노를 내뿜었을 때, 나는 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사람들, 특히 몇몇 남자들이 나에게 위협당했을 때, 난 속으로는 몰래 웃고 있었다. 만약 내가 분노를 뿜어내면, 그들이 내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날 보호해주진 못했다. 난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해서 상처를 받고 말았다. 

난 행복하지 않았다. 분노는 내가 쓴 마스크였고, 진짜 내가 아니었다. 진정한 나를 느끼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정한 나의 모습,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침내 나를 밀어붙이던 분노를 제거하기 위하여, 난 그것을 밖으로 꺼내 다루어야만 했다. 난 그 근원을 직면해야만 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고통을 보아야만 했다. 난 내 분노의 진실한 타겟이 내가 아니라, 바로 나의 부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때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그를 보호하려 했던 엄마에게 더 크게 화가 났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그때까지도 내 부모들은 자신들의 학대적인 태도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난 그러한 병든 패턴을 지속하길 거부하였고, 결국 경계선을 세우고(그들은 경계선을 존중하길 거부하였다), 그들과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난 화해를 포함하지 않는 용서라는, 용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가슴 속에서, 용서는 여전히 일종의 위협이었다. 혹자는 내가 부모들을 용서했다고 주장했지만 난 마치 그 사람이 날 긴 손톱에, 날카로운 이빨에, 샛노란 눈동자에 털이 긴 짐승 한 마리와 함께 우리에 가둬두는 것처럼 반응했다. 내 마음 속에서, 용서란 날 무장해제하고 학대에 더욱 취약하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혹은 보여주기 식의 용서에 대한 부담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결국 나에게 용서라는 허울은 날아갔으며 난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난 내 느낌들을 덮어버리는 대신 그것들을 계속 밖으로 끄집어 내어 정리해 나아갔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분노,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몇 달의 몇 달을 거친 작업을 거치고 나니, 문득 정말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용서하고 싶어졌다. 난 충격을 받았다. 그 날 이전엔, 내가 용서를 할 수 있으리란 느낌을 조금도 받지 못했었다. 갑자기, 난 공격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 

일단 그러한 결정을 내리자, 나는 이전보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자유로워졌다. 난 이토록 큰 차이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용서가 나의 고통의 끝을 의미하진 않았다. 실제로, 일단 그들을 용서하려 들자, 난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강력한 고통을 느꼈었다. 용서는 나의 가슴을 그들에 대한 자비와 이해를 향해 열어놓았으며(그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그들을 보다 균형잡힌 방식으로 보게 하였다. 분노와 증오 속에서, 난 오직 그들을 갱생의 여지가 없는 사악한 인간들로만 보았었다. 그 누구도 선하지만도, 사악하지만도 않지만, 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오직 사악할 뿐이라는 거짓말을 이용했다. 일단 나의 부모가 실제로도 좋은 면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자, 난 그들이 너무나도 그립기 시작했다. 난 정말 엄마를 원했다! 이것은 진실을 찾는 여정이었기에, 그 진실이 심지어 고통을 안겨주더라도,결국엔 치유를 가져올 것이기에, 난 그 진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난 아직까지도 부모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리고 결코 그럴 의도도 없다.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두고, 관계적으로도 거리를 두었건만, 그들은 학대를 지속했다. 떼때로, 과거로부터 더욱 많은 것들이 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난 계속해서 열심히 나의 느낌들을 밖으로 꺼내 정리해 나아갔다. 나의 용서는 겹겹이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난 이제 내 부모님들에 대해 더 이상 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갈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다지 마음쓰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머나먼 기억이며 시간이 지나가고 나의 과거를 계속 직면할 수록 더욱 그렇게 멀어지고 있다. 난 그들이 한 짓을, 혹은 하려 했던 짓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룬 기억들에는 더 이상 고통이 달라붙어 있지 않다.

이제 난 그들을 향해 더 이상 세찬 감정도, 복수심도 지니고 있지 않다. 난 분노와 공격심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들의 운명을 조종하고 싶고, "당해도 싸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 놓았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용서이다. 

 난 나에게 용서를 팔려고 든 사람들이 나를 상처입히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들은 나를 도우려고 한 것이고 자신들이 지닌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그들은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로웠다. 용서는 개인적인 이슈이며 학대 문제를 다룰 땐 가장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치유 과정의 산물이었지, 그 수단이 아니었다. 


-------

용서를 수단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용서는 부산물입니다. 
선치유, 후용서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는 사람들은 의도치않게 학대자와 공범이 됩니다. 특히 용서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종교인들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용서는 피해자의 가슴을 또 한 번 헤집는 흉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절을 하라는 식의 법륜 스님 류의 조언은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위의 저자는 분명히 그들을 용서하였지만 여전히 그들과 거리를 분명하게 두고 있고 자신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치유가 됩니다. 

이제 우리 한국 사회도 '영원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깨고  자신을 신체적, 정서적, 성적, 영적으로 학대한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와 연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고 치유의 과정을 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용서는 그 치유의 과정에서 나오는 작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어선 안됩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 의한 용서는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그런 식의 압력행사 자체가 범죄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멋모르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니가 그렇게 괴로우니 이제 그만 그를 용서하면 안되겠니?'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내는게 사실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고 기겁하고 열받아서 한참 반박할 사례를 찾다가 발견한 좋은 글이 있어 번역해보았습니다. 한 번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8]차우

2013.06.22 (08:58:31)

좋네요. 상처를 치유하는 바른 방법이라고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22 (10:20:57)

법륜은 빌어먹을 소승입니다.

소승은 깨달음을 사람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기계적인 반응 정도로 여깁니다.

뇌수술을 해서 깨달음을 주입하면 된다는 식이죠.

컴퓨터파일 다운받는 정도.. 깨달음 베타버전을 다운받아 뇌에 설치하면 된다는 식이죠.

이는 깨달음을 사건이 아닌 사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승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사건이며 인류와 함께하는 행동계획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법륜의 설법을 듣는 신도들은 법륜 커뮤니티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안정을 찾는 것일 뿐

막말로 법륜을 만나 한 편이 있기 때문에 치유되는 것이지 그 설법내용은 엉터리죠.

즉 그들은 막연히 법륜의 명성에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법륜의 명성이 사라지고 커뮤니티의 세확장이 멈추면 그들은 다시 불행한 본래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오세님이 인용한 글의 피해자가 고통받는 이유는

성범죄 때문이 아니고 인류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입니다.

범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인류에 의해 거부된 사정은 용서되는게 아닙니다.

다시 인류 안으로 들어와야만 복구되는 것이며 그 방법은 가해자를 인류 밖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용서나 처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와 한편으로 사건 안에서 계속 가느냐입니다.

계속 갈 수 있으면 모두 용서가 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이상우

2013.06.22 (20:04:08)

나는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변화된 학교 모델을 만들어 인류에 기여하고자 한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다. 고통스러워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행복하다. 이상이 있고, 그것을 이뤄낼 힘이 있고, 함께 할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내 삶은 제구력이 갖춰진 묵직한 돌직구처럼 강력하다.

[레벨:8]상동

2013.06.22 (14:02:04)

맞습니다. 용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류안에 있느냐 입니다.

안에 있으면 만나고, 밖에 있으면 안으로 초대하고, 못알아먹으면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3.06.22 (14:19:08)

단상.

위처럼 친부로부터의 성학대 경우

태어난 아기가 친부가 다른경우

국정원이 선거개입 연출하여 신성한 국민주권을 모독한 때

경찰이 왜곡 편파수사 할 때

자식들이 부모를 고려장하다시피 할 때

부정 불법 불의에 순응할 때

정적(장준하)을 벼랑끝에 몰아세울때

자기가 노예커뮤니티안에 들었슴을 모를때

이런게 다 경제적, 정치적, 기타 심리적 생리적 이익, 탐욕을 위해서인가?

이런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법(공식)은 무엇인가?

역사를 아는 것?

진리를 아는 것?

자연을 아는 것?

신을 아는 것?

인류의 진보를 아는 것?

***

" 범죄는 용서할 있지만 인류에 의해 거부된 사정 용서되는게 아닙니다.

다시 인류 안으로 들어와야만 복구되는 것이며 방법은 가해자를 인류 밖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용서나 처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와 한편으로 사건 안에서 계속 가느냐입니다.

계속 있으면 모두 용서가 됩니다."

****

구조론을 '인류애에 기반한 사회진화론'으로 이해하고 싶군요...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구조론 매월 1만원 정기 후원 회원 모집 image 29 오리 2020-06-05 131698
619 중심 담 |/_ 2013-06-30 4101
618 존엄 OS 담 |/_ 2013-06-30 5083
617 당당한 눈빛을 물려주라 - 제민칼럼 12 ahmoo 2013-06-27 4543
616 남자는 진보의 적이다 image 4 김동렬 2013-06-26 5375
615 질문 - 빵이 하나 있다면? 19 김동렬 2013-06-26 5554
614 질문 - 동성애문제 17 김동렬 2013-06-25 6134
613 대칭에 의한 비대칭의 예 image 2 김동렬 2013-06-24 8320
» 용서? 용서는 개뿔. 경계를 세우는 것이 먼저다! -성적 학대와 그 극복에 대하여- image 5 오세 2013-06-22 5230
611 질문 .. 세레나의 잘못은 무엇? 11 김동렬 2013-06-20 4662
610 구조론 팟캐스트 1회 대본 11 오세 2013-06-20 5598
609 참과 거짓 image 김동렬 2013-06-19 4416
608 수동의 발견 담 |/_ 2013-06-14 3623
607 보트를 젓는다면? 6 김동렬 2013-06-06 4661
606 꿈의 발견 3 담 |/_ 2013-06-03 4145
605 평행우주? 단순한 속임수 김동렬 2013-06-02 5120
604 비과학적 사고의 예 2 김동렬 2013-05-28 5281
603 그림에서 잘못된 것은? image 14 김동렬 2013-05-27 4635
602 인류는 많지 않다. 칠십억도 그렇다 담 |/_ 2013-05-15 9067
601 인류의 기원 김동렬 2013-05-15 8333
600 1만 5천년 된 언어 image 3 김동렬 2013-05-13 5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