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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860 vote 0 2013.06.03 (22:19:58)

    양자이론과 구조론


    존재는 사건이다. 그래서? 사건은 시간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진행되어 완전성에 도달한다. 미처 완전성에 도달하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있다. 반쪽 존재가 있다.


    구조론은 그 완전성과 불완전성 사이를 해명한다. 거울의 방에 들어섰다고 치자. 사면의 거울에 비친 굉장히 많은 나의 모습들이 있다. 내가 거울의 방을 나가버리면? 그 모습들은 모두 사라진다.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들처럼 한 순간에 사라진다. 이들은 불완전한 존재다. 빛과 그림자에 해당된다. 빛은 완전하고 그림자는 불완전하다. 그 차이는 통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완전하면 통제된다.


    그림자는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하려면 빛을 건드려야 한다. 북은 통제할 수 있으나 북소리는 통제할 수 없다. 복제본은 통제할 수 없으며 통제하려면 원본을 건드려야 한다. 스위치는 상부구조에 있다.


    내가 거울의 방에서 나가버렸는데도 여전히 거울의 방 안에는 수천의 내가 존재하여 그곳에서 웅성대고 있다고 믿는 것이 평행우주 개념이다. 근데 없다. 원본이 떠나면 복제본은 사라지고 만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반드시 대칭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남자는 있는데 여자가 없다거나, 혹은 여자는 있는데 남자가 없으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희미한 반쪽짜리 존재들이 있다.


    북채 잃은 북, 당목 잃은 종, 연주자 잃은 피아노, 자루없는 칼,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 총알없는 총, 앙꼬없는 찐빵들이 있다. 이들은 불완전한 존재이나 특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존재로 격상된다.


    양자론의 시대이다. 그러나 양자론의 세계관은 보급되지 않았다. 구조론은 양자론과 같다. 21세기 양자시대에 뉴턴시대의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덤빈다면 곤란하다. 도대체 학교에서 뭐 배웠냐고?


    ◎ 기계론 – 존재를 사물로 바라본다.
    ◎ 양자론 – 존재를 사건으로 바라본다.


    양자시대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결정론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사물중심적 사고는 결정론적 사고다. 양자는 커플이다. 그러므로 양자세계에는 항상 짝수로만 존재한다.


    부부모임과 같다. 부부모임에 온 인원 숫자는 무조건 짝수다. 1.5명으로 이루어진 커플은 없기 때문이다. 핵 주위를 도는 전자는 일정한 궤도가 있다. 그런데 이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건너뛴다.


    점프를 하는 것이다. 그 중간은 없다. 이런 현상은 거시세계에도 얼마든지 관측된다. 달이 뜨면 밀물이 들어온다. 그런데 지구 반대쪽도 밀물이 들어온다. 무엇인가? 행성정렬이 일어났다고 치자.


    달의 인력이 지구의 모양을 짜부러트리듯이 행성들이 한쪽으로 정렬하면 태양의 모양이 그만큼 짜부러진다. 그런데 지구는 표면이 물로 덮여있다. 만약 지구 표면이 돌이면? 짜부러질 수 없다.


    지구에 바닷물이 전혀 없다면 달의 인력은 지구의 형태를 어떻게 변형시킬 까? 지구 입장에서는 매우 괴로운 일로 된다. 입장이 곤란해진 지구는 어쩌면 달을 우주 밖으로 내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전자가 핵 주위를 돌다가 특정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하는 이유는 짝수로 존재해야 하는데 홀수가 되면 가운데 있는 핵이 매우 괴롭기 때문이다. 연속적으로 되면 매우 입장이 난처해진다.


    양자는 대칭을 이룬다. 커플이 있다는 말이다. 전자 반대쪽에 무언가 있다. 불연속성을 가진다. 지구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이 고도를 상승시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인가? 지구는 충분히 크고 인공위성은 작기 때문이다.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 그런데 달이 지구에서 슬금슬금 멀어지거나 혹은 너무 가까이 지구로 다가온다면? 지구는 괴로워진다.


    대칭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핼리혜성이 태양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간다면 태양 입장에서는 매우 괴로워진다. 툴론 태양은 크고 혜성은 작으므로 큰 영향이 없지만 충분히 큰 혜성이라면?


    양자는 불연속적 운동을 한다. 태양은 혜성을 태양계 밖으로 날려버린다. 여기에는 일정한 수학적 비례가 있다.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파트너가 있고 파트너와 동시에 움직이므로 불연속적이다.


    그 파트너가 바깥에 있을 수도 있다. 즉 이쪽에서 움직인다는 조건 하에서만 파트너가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이 빛의 성질이다. 전자석이 있다고 치자. 전자석의 정확한 위치를 어디로 정해야 할까?


    자기장이 미치는 범위 전체를 전자석의 위치로 해야 할까? 아니다. 전자석의 위치는 전자석의 중심부이다. 아니다. 틀렸다. 전자석은 스위치가 있다.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흘러서 자기장이 생긴다.


    스위치의 위치가 전자석의 위치다. 그런데 스위치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떨까? 곤란해진다. 전자석은 서울에 있는데 스위치는 부산에 있다면? 전자석은 도무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빛의 이중슬릿 실험도 같다. 빛은 어디에 있는가? 스위치가 있는 곳에 빛이 있다. 그런데 빛을 관측하기 위하여 센서를 들이댈 때 그 센서가 바로 스위치가 된다. 관측자가 빛의 위치를 결정한다.


    빛이 이중슬릿의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빛의 위치는 자기장의 위치이고 인간이 관측은 자기장의 스위치 찾기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 집들이 드문드문 있다.


    그 집들 사이의 빈 공간은 광장일까 아니면 길일까?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일까? 길은 집과 집 사이의 틈이다. 집이 있는데 일정한 간격을 띄우고 맞은 편에 집을 지으면 갑자기 길이 생긴다.


    집 옆에 코끼리가 서 있으면 어떨까? 집과 코끼리 사이는 길이다. 코끼리가 떠나면 길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길은 원래 없다고 믿지만 누군가 바리케이트로 길을 막으면 길의 존재를 깨닫는다.


    아프리카 초원이라면 길이 너무 넓어서 도리어 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존재들이 이와 같이 A와 B의 사이의 모호성 속에 있다. 그 사이는 A와 B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반쪽짜리 존재들이다. 사물로 보면 그냥 존재하지만 사건으로 보면 많은 존재들이 변화하는 상대성의 장 안에서 불완전하게 버티고 있다.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듯한 존재로 행세한다.


    그 조건이 해제되면 문득 사라진다. 이를 뒤집어 불완전한 존재들에게 특정한 조건을 부여하면 반듯한 존재로 연출해낼 수 있다. 비오는 날 먹구름이 낀다. 누구나 구름의 존재를 인정한다.


    벼락이 치면 어떨까? 벼락은 존재하는가? 벼락의 존재는 너무 짧아서 그것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밴저민 프랭클린은 비오는 날 연을 띄워 벼락을 병에 잡아가두는데 성공했다.


    벼락은 완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천둥은? 천둥은 애매하다. 그것은 소리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공기다. 소리는 공기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소리는 정보를 전달할 뿐 명확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누가 천둥소리를 연속적으로 낸다면? 그 천둥소리에 정보를 실어 전달한다면? 천둥을 조작하여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한다면? 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존재로 격상될 수 있다.


    구조론은 완전성과 불완전성 사이를 탐구한다. A와 B 사이의 모호한 공간을 제어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양자론의 세계관을 배우지 못한 자의 사물중심적 사고다.


    양자론의 세계관은 사건중심적 사고이며 거시세계에도 얼마든지 관찰된다. 거울의 방에 나타난 수천개의 분신들은 생각하지만(기능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이 떠나면 복제본은 사라진다.


    ###


    아래는 검색 중에 발견한 내용입니다. ‘양자론적 세계관’으로 검색해서는 검색결과가 많지 않네요. 인류에게는 여전히 양자론적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거지요. 아래 인용한 글에서 ‘사건’을 ‘event’로 표현한 것도 저의 입장과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4&docId=57458707&qb=7JaR7J6Q66Gg7KCBIOyEuOqzhOq0g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jygmF5Y7uhssveNe2dssssssu4-432828&sid=UayThnJvLCYAADRcKfk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 이전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만물의 기본은 입자였다. 근대물리학의 집성판인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힘과 운동을 통해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했고, 여기에서 삼라만상의 기본단위는 입자였다. 그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포탄, 사과 등이 운동 3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천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행성들이 중력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이 입자는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며, 근대적인 존재론은 이러한 입자를 기반으로 삼는다.


    이런 뉴턴의 생각이 아인슈타인에 이르면 입자는 그 의미를 잃고 사건(event)이라는 개념이 제기된다. 사건은 사상(事相)이라고도 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입자 개념과는 달리 관계망(network)을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포항공대 소흥렬 교수(과학철학)는 “아인슈타인의 사건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기존의 존재론을 바꾸어놓았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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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론=양자론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 흡사하군요. 구조론이 어떻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걍 양자론을 공부하면 됩니다. 입자의 시대는 가고 양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구조론의 질 개념은 입자를 결과로 놓았을 때 그 결과를 연출하는 원인입니다. 들판에 100마리의 양떼가 흩어져 있는데 시력이 나쁜 외계인의 눈에는 관측이 안 됩니다. 내부에 아무런 질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외계인이 다가가도 양떼는 시큰둥합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늑대가 나타나면 100마리의 양떼가 일정한 형태를 만듭니다. 그 형태가 나타나면 입자, 형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질입니다.

 




[레벨:9]길옆

2013.06.03 (23:06:40)

이벤트라는 말은 행위예술에서도 썼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프닝, 이벤트 , 퍼포먼스

 

양자론에 아인쉬타인의 이론이 마중물의 역할을 했지만 결정론자 였던 아인쉬타인은

확률론적 결정론인 양자론을 거부했다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03 (23:13:07)

아인슈타인은 아마 할 말이 더 있었을 겁니다.

확률론이라는 표현은 덜 만들어진 투박한 표현입니다. 

어법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아직 걸맞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숨은 전제'를 상정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양자론의 확률개념은 잘못된 표현이고 상부구조에서 결정된다고 말하는게 정확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확률이 아니라 확률로밖에 나타낼 수 없는 그것입니다.

왜인가? 존재도 아니고 부재도 아닌 반존재들 때문입니다.

치고 빠지기를 하는 놈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파충류의 알은 날씨가 추우면 암컷 

더우면 수컷으로 깨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알의 상태에 의해 암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알을 깨는 환경에 의해 암수가 결정됩니다. 


결정론적 사고는 월드컵을 하는데

실력대로 우승팀이 결정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은 날씨가 맑으면 브라질이 우승하고 날씨가 흐리면 독일이 우승합니다.

당일 경기장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그 환경은 확률로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인공강우 기술로 당일 날씨를 조작하기로 결정했는데

브라질팀에서 이를 알고 스파이를 잠입시켜 기계를 파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독일은 스파이 제거조를 미리 투입했고 브라질은 스파이 제거조 우회로를 개척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승팀은 독일일까요 브라질일까요?


이건 확률로 밖에 알 수 없는 예를 든 것인데 확률과는 다릅니다. 

상호작용론이라고 봐야 합니다.

구조론은 확률론이 아니라 상호작용론이며

상호작용의 결과는 확률로만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결정론은 틀렸습니다.


[레벨:9]길옆

2013.06.04 (00:19:22)

“세계가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로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기초를 닦은 양자역학의 함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세계가 확률과 우연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한 사례는 유명하다.

 

동렬님께서 본문에 인용하신 기사를 읽어보니 아인쉬타인은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결과는 확률로만 알 수 있다.

결국 상호작용이 지배자인 셈이겠군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6.04 (01:02:37)

결정론적 사고는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는 시간적 순서 개념입니다.


그런데 구조론의 일의성은 동시성이 작동하므로 시간적 순서가 없습니다.

- 일의적 동시결정 원리 -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확률론은 확률이 결과에 앞선다는 즉


확률결정론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는 자가당착입니다.


'확률과 우연에 지배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지배한다는 말은 결정론적 사고입니다.


결정론을 부정하면서 결정론의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제가 연출한다는 표현을 쓰는게 이유가 있습니다.


빛이 입자건 파동이건 

빛이 제맘대로 날아온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갑니다.


숨은 전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빛이 날아온게 아니라 내가 빛을 이끌어오지 않았을까?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암컷은 수컷이 일방 암컷으로 다가온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게 페로몬을 퍼뜨린건 암컷입니다.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13.06.04 (01:12:01)

오...제가 자연과학하면서 가장의구스러웠던 부분이 '확율'이었죠.

얼머부린다는 느낌.


가장, 확율을 제대로 쓰고 있다고 느낀 부분은, 전자기장에서 scattering (일종의 빛의 diffusion)을 표현하는 확율. 그 이외에는 확율이 오용되고 있다는 느낌.


현대 사회과학의 많은 부분도, 확율과 통계의 의지하는데, 심지어 기상학도.

대부분 오답을 내고 있습니다. '귀납'의 오류죠.


확율이나 통계 이외에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는게 정답입니다.

새로운 governing equation이 나오면, 폐기되는게 정당하죠.

프로필 이미지 [레벨:9]로드샤인

2013.06.04 (02:27:15)

 

"구조론=양자론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 흡사하군요. 구조론이 어떻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걍 양자론을 공부하면 됩니다. 입자의 시대는 가고 양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구조론의 질 개념은 입자를 결과로 놓았을 때 그 결과를 연출하는 원인입니다."

 

오늘은 구조론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이군요. 이렇게 과감한 선언을 하십니다. 구조론의 강점은 양자론이 극한의 미시세계에서나 적용된다는 제한을 걷어버리고,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것은 거시세계에도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전제 아래 인간의 감각과 행위를 통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통짜이론이라는 것이겠지요.

 

 

"정확히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숨은 전제'를 상정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양자론의 확률개념은 잘못된 표현이고 상부구조에서 결정된다고 말하는게 정확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역시 구조론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는 명언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6.15 (23:37:34)

구조론을 양자의 세계를 직관하여 풀어 놓은 학문이라 하여도 될듯.
과학으로 규명하려 했던 양자역학에 대해서 시원하게 마무리 하지 못하고, 뭔가 얼버무리고 있었는데, 이는 직관을 밀어부치는 힘이 약했던 것. 또는 사회와 대립각을 세우는 힘이 약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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