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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4034 vote 0 2013.05.26 (13:19:11)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어제 또 출산을 임박한 고양이 한마리가 옥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회사에서 고사를 지냈다고(왜 지냈는지는...머~ 잘되라고 했겠지), 돼지머리가 회사 냉장고에 있는데 '가져올까?' 하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었다.

내가 돼지머리 삶아 봤다고 한 것 때문이었다. 설마, 다 미리 잘려진 것인줄 알았지 통머리인줄 알았겠는가...

통머리를 보자니 난감했다. 한쪽귀만 잘려 있었다. 그 모양이 참 서글프더만, 다시 삶아야 할것 같아서 칼을 들고 한쪽을 좀 잘라 보았는데, 소름이 쫙 돋더라. 돼지 통머리는 더 서글퍼진 모양이 되었다. 더는 칼질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억지로 찜통에 돼지통머리를 낑겨 넣었다.

칼질이 필요 없을때까지 삶았다. 뼈와 근육과 살이 분리되었다. 뼈만 쏙 하고 빠졌다. 뼈들을 집게로 추려내니, 오히려 모양은 덜 서글퍼졌다. 뼈 형태가 완전하게 돼지머리뼈 형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지.... 살이나 비게나 귀를 잘랐을 때는 그리 소름 돋듯이 서글프던데, 뼈 형태만을 보고 있자니, 덜 서글퍼진다는 것이.

어떤 형태가 파손된다는 거.
어떤 형태를 칼로 베어 낸다는 거. 이런 행위가 그리 소름 돋는 것인줄 몰랐네. 통머리여서 더 그랬나본데. 나는 여기서 어떤 여인이 겹쳐져서 내 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통증이 느껴졌는데.

다 삶아진 머릿고기를 편육을 만들어야 하기에 사각 락엔락 통에다 넣고 편편하게 만들어 위에 좀 무거운 것을 올려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다 굳어지자 사각형태로 썰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 편육은 새우젓과 궁합이 맞는데, 다른 양념장을 찍어 먹으면 별맛이 없는데, 새우젓을 찍어 먹으면 맛이 산다. 육지것과 바다것이 궁합은 왜 이리 잘맞는게냐.

소름이 돋아도, 칼이 갑자기 무서워져도,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다. 버릴수도 없다. 버리려면, 내 뱃속에다 버려야 한다. 이것이 돼지통머리를 손질했던 자의 예의다. 먹어주어야 하는 바로 그것.

이런 잔상을 간직하고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듯 먹어 주어야 하는 것. 기꺼이 머리를 바친 돼지에 대한, 삶에 대한 예의다.

이 편육을 몇점 들고 옥상에 올라가다. 낳은 새끼들은 어디에 있나? 없다. 어제 새끼를 낳고 그새 어디론가 옮겨갔나보다. 그런데 새끼냥이 한 마리가 재빠르게 뛰어간다. 옥상에서 물이 빠지는 곳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이 처마 사이로 들어갔다. 아마도 고양이들의 아지트인듯 싶다.

설마 어제 낳은 새끼가 뛰어 다니지는 않을듯 하고, 얼룩덜룩한 것이나 크키를 봐서는, 전에 그 새끼냥이 인듯 싶었다. 살아 있었구나. 뛰어다니는 것 보니 건강한것 같았다. 편육을 어쨌든 그 근처에 두고 내려왔다.

너도 나도 편육을 나눠먹는 공생체가 되었다. 사람은 이런 소름돋는 잔상을 가지고도 잘 살아간다. 그리고 또 익숙해진다. 죽은것들 뿐이랴...산것들도 다를바가 없이. 마음들을 열어보면 얼마나 많은 소름들이 돋아나 있을까? 태연하게 살아들 가고 있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무슨일이 있었나. 잔상만이 알고 있다. 이렇게 삶을 채워가고 있다.


* 사진 : 편육과 낙지 스파게티. 얼마전에 낙지를 사왔는데, 낙지가 좀 컸다.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낙지 네 마리가 사방에서 발을 뻗어대니,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오싹했다. 소금을 뿌리고, 뚜껑을 덮고 눌러 놓았다. 한참을 있다 열어보니, 조용했다. 끓는 물에 데쳐서 일부를 냉장 보관했다. 그 낙지이다.

아~ 삶이란, 먹고 사니즘이란, 정말......, 그래도, 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일까? 내가 여기서 경끼를 일으키면, 이것은 모든 삶에 대한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럴것이고 인류의 태반은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1]사발

2013.05.26 (14:23:15)

돼지머리를 삶으시다니....대단하십니다. -_-b

 

사람은 몸 구조상 단백질을 섭취해야 합니다. 육식은 자연의 섭리일 뿐.... 소는 풀만 먹고 살지 않냐는 사람을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소는 위가 4개라능....(여기서 왜 조지 포먼이 생각날까)ㅎㅎ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6 (14:45:03)

살다보니...어쩌다....ㅋㅋ

어찌보면, 음식을 하다보면... 재료손질에서 어떤 혐오나 구역질...이런게 느껴진다고 보이는데, 정말은 자기 마음에서 이렇게 먹어야 되나 싶어서 그렇겠지요.

그러나, 다 먹는 것이고, 이전부터 이렇게 해온 이골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 그런 거부감을 갖지 말아야 겠지요.

어쨌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또 손질하고, 가공하고, 미적인 상태까지 나타나게 하여, 먹기 좋게 한다는 것...
초반은 생략하고 중간과정부터 대체로 했으나, 초반과정을 경험해보니, 익숙치 않으니...마음이 산란해지긴 하더라구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1]사발

2013.05.26 (14:48:58)

그런 궂은 일을 해주시는 도축업 종사자 여러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ㅛ^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26 (15:07:06)

소도 육식입니다.

장에 사는 바이러스의 시체에서 단백질을 공급받습니다.

풀 먹고 살찔 리가 없잖아요.

풀이 살 될 리가 없잖아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6 (16:11:12)

다른게 아니라...
돼지머리 그대로 있는데...썰고 베고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는 것....
물론 뼈가 단단하니 칼로 베어내야 하는데...순간 그런 행위에 강한 거부반응이 들었던거지요.
낙지도 산채로 데치려고 하니 거부 반응이....
그래서 걍~~~소금 뿌려 뚜껑 덮어 죽여서...

ㅠㅠ...이러나 저러나....결국 먹는 음식이 된다는것은 달라지지 않지만요.

이 과정이 싫으니, 채식주의가 생각났으나... 그렇다고 먹는 것에 대하여...뭔가 가른다는 것에 대해서도...거부반응이 들어서....ㅋㅋ
프로필 이미지 [레벨:21]사발

2013.05.26 (16:13:41)

흐음... 그런 뜻이었군요.

 

역시 납득...^ㅛ^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26 (16:29:12)

백정의 도를 깨우치지 못했구료.

 

백정이 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았더라.
백정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고 발로 밟거나 무릎으로 누른 곳은
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칼움직임대로 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나는데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고, 그 절도는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왕이 말하였다.
"훌륭하다. 어떻게 기술이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는가?"
백정은 칼을 놓고 말하더라.
"뭐시라? 기술이라고라고라?

제가 바라는 바는 도로써 기술을 앞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소였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마음의 자연스러움만 있어서
자연의 이치를 따라 큰 틈새와 빈 곳을 찾아 칼을 놀리고 움직이되

소의 본래의 구조를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힘줄이나 근육을 건드린 일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다귀야 말할게 없습니다.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 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으되,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으므로 칼을 놀려도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19년이 지났어도 제 칼의 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뼈와 살이 엉킨 곳에 이르면, 저도 여려움을 느껴

조심조심 경계하며 눈길을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미묘하게 합니다.
그러면 살이 뼈에서 발려져 흙이 땅 위에 쏟아져 쌓이듯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자기 자신의 감상을 논거로 삼으면 실패.

대상에 내재한 자체의 질서를 중심으로 논하면 성공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6 (16:43:21)

ㅋㅋㅋ....칼로 도에 이르지 못했지요.
형상이란 틀이 있어서 죽은 것이나 산것이나 내살베는 섬뜩함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먹어도 내가 나를 먹는 구역질을 느끼긴 했으나, 꿀떡 삼키고 나니, 소화는 되더이다. 그러고나자 내가 긴장해 있었고 얼어 있었다라는 것을 알겠더이다. 심호흡 한번 하고나서 썰어놓은 편육보며, 편육장사해도 되겠다. 했더이다. 단, 돼지머리는 통머리가 아닌 걸로, 이건 타인의 손을 빌려야 겠구나 했더이다. 백정의 도는 백정이 깨우치는 것으로써 나는 백정이 깨우친 도를 탐하기 보다는 백정보다 나만이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가기로 했더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5.26 (17:05:06)

도는 어디에나 있소.

요리를 하든 담배를 피든 응가를 하든 

그것은 대화요. 

문제는 불통.

요리를 하면서 재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담배를 피면서 니코틴의 아리아를 듣지 못하고

응가를 하면서 미자바리 하모니를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마침내 도를 얻어 그것을 포착하는 눈을 뜨면 

무슨 일을 하든

기분이 나빴다거나 좋았다거나 하는 것이 없소.

백정은 소를 잡지 않소.

백정은 그저 칼을 빌려줄 뿐이며

소는 스스로 살집에서 벗어나 후다닥 도망칠 뿐이오.

어떤 대상 그 자체의 내재한 질서를 찾아낼 때

차를 달이든 차를 운전하든 한 가지로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6 (17:22:13)

오케이요.^^
어쨌든 글을 읽고 나니, 속은 시원하네요.
대상 자체의 내재한 질서...그것을 볼 일이군요.
공포와 만난듯...
아마도 이 공포와 만난 사람들 많을듯...
의학도가 메스를 잡고 해부할때, 요리 초년생이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잡을때, 닭 모가지를 비틀때, 소의 정수리를 칠때.... 등등.

공포를 이겨내는 길은 내재된 질서를 찾는 것.

죽어 이미 한번 삶아진 돼지머리를 보고, 칼로 껍질과 비게를 베어낼때, 그 느낌에서...
문득 페북에서 보았던 유관순이 떠올라서(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떤 공포가 스며든것 같은데...
내재된 질서를 찾는다.라고 보자면, 당사자는 이미 공포를 극복했을까? 글만 보고도, 어떤 대상과 마주치자 전혀 이상한 연상작용이 일어난 나에 비해서.......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5.26 (17:51:53)

비게 -> 비계
별로 쓸일이 없는 말이다 보니....비계가 맞네요.^^
[레벨:11]큰바위

2013.05.27 (04:20:48)

아란도님과 동렬님,

두 분이 나누는 대화에 백정의 칼날이 숨어있네요.

 

모든 것이 다 생물이요.

다만 사람이 느끼고 느끼지 못할 뿐, 혹은 자기 감성에 몰입되어 다음 단계를 보지 못할 뿐......

 

생물에도 위계가 있고,

자연에도 위계가 있고,

우주 만물에 나름 질서(카오스든 코스모스든)가 있지요.

 

돼지머리에서 단편적이지만 득도의 맛을 보고 갑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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