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150부작 무인시대를 한 5번 정도 보았는데... 요즘에 재방송을 하길래 다시 보았다.

 

경대승에 대한 드라마상 미화가 좀 있긴 하지만,

무신정권하에서 자기 재산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청렴결백하게 살 수 있는 권력자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경대승의 행동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한 면이 있다. 

그러나 외부의 에너지가 없으면, 개혁은 이미 실패를 예고하고 있기에 그의 개혁은 한계가 있었다.

그의 사후 백성들 중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다 하니, 백성들의 그에 대한 추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조정에 출사도 하지 않고, 무신정권하에 도방을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명종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기인적인 면모'도 보였는데...

 

여러분들은 경대승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네이버 지식 펌글-----

15세때 음서로 발탁되어 교위(정9품)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절등한 용력을 지녔다. 일찍이 역사,병법,천문,지리를 깨치고 옥골선풍의 외모와는 달리 무예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던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
경진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청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자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탈점한 군인전을 반환한다. 경대승의 파격적인 토지반환은 당시 권력측근들의 군인전탈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청주군인들을 자극하였다. 경대승은 더 나아가 청주군인들을 교묘하게 선동하여 다른 군인전수탈자들을 공격하게 부추켰다. 100여명이 살해당한 이른바 청주변란의 배후에는 경대승이 있었던 것이다.

개경으로 돌아온 경대승은 정중부정권에 적대감을 품고있던 하급장교들을 규합한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수안궁주를 취하려던 일로 명종의 심기가 불편했고, 송유인이 문극겸을 탄핵한 일로 왕실과 조정이 정중부일족에게 등을 돌릴 조짐이 보이게 되자 경대승은 거사를 앞당긴다. 수안궁주의 눈물이 아직 혈기왕성한 청년 경대승의 가슴에 불길을 당긴 것이다.그날밤 경대승은 김자격을 비롯한 결사대 30명을 이끌고 황궁담장을 넘어들어가 친위대를 참살하고 황궁을 장악한다. 경대승은 명종을 안심시키는 한편 정중부와 송유인을 주살할 것을 청한다. 황궁의 변란소식에 피신했던 정중부와 송유인이 주살되고 그들의 참수된 머리가 거리에 내걸렸다.조정신료들은 경대승을 청해 축하연을 베풀었다. 경대승은 “선왕을 시해한 대적(이의민)이 버젓이 살아있거늘 경들은 축하연 따위나 벌이겠단 말인가?!” 질타를 하며 상을 뒤엎고 나가버린다. 왕실과 조정은 이 서슬푸른 26세의 청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불안했다. 축하연자리에서 경대승이 한 말은 곧 무신정변으로 보위에 오른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다. 명종은 정중부를 제거했던 허승과 김광립을 은밀히 불러들여 자신의 안위를 당부하고 충성을 다짐받는다.
허승과 김광립은 정중부를 제거한 공을 내세워 방약무인하였다.거기다가 명종의 총애를 믿고 더욱 설쳐댔다.게다가 그들은 이의민과 은밀히 내통을 하고 있었다. 경대승은 허승과 김광립을 집으로 불러 살해한다. 어차피 경대승에게 그들은 토사구팽할 자들이었다.허승등이 제거되자 명종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고 경대승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정변의 주역들중 유일하게 남은 이의민을 개경으로 불러들인다.

명종은 이의민을 총애한게 아니고 그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의민이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대승과 이의민 둘중 한사람은 죽을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경대승은 이의민을 제거할 치밀한 계획을 짠다.경대승은 검을 차고 이의민을 치러 나간다. 이의민의 거처를 들이쳤을 때 이미 두경승을 통해 경대승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이의민은 개경을 빠져나가 임진강을 건너고 있었다.경대승이 이의민제거에 실패하였지만 그는 개경정권의 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죽을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국가의 중대사안이 있으면 입궁하여 명종에게 자신의 견해를 고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그는 용력과 무예가 출중한 일당백의 장사 100명을 뽑아 자신의 사저에 두고 심복 김자격에게 통솔을 맡겼다. 소위 경대승의 도방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도방은 경대승의 호위사병이자 탐학으로 사리사욕을 채운자들을 약탈하여 구휼하고 권력을 믿고 전횡을 부리던 자들을 감찰하고 심지어 그들의 살생부를 만들어 응징하는 소위 활빈당의 성격을 띈 집단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대승은 약탈과 응징과정에서 붙잡힌 도방장사들을 사면하도록 조치했던 최고권력자였다. 민중들은 경대승을 칭송하였고 문무신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도방의 장사들은 자신들과 함께 거친밥을 먹고 한이불에서 자는 경대승을 추앙했고 그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 경대승에게 꿈에 정중부가 나타나서 그에게 호령하며 달려들었다.꿈에서 깨어난뒤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사경을 헤매던 경대승은 도방장사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도방을 해산하라는 유언를 남긴다. 도방이 권력찬탈의 도구가 되는 것을 우려했던것이다. 얼마뒤 그는 정중부와 이의방의 환영을 보며 눈을 감는다.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고려사에 “경대승의 장례식때 길가에 모인 사람들중 통곡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되어 있듯이 민중들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였지만 명종과 조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대승의 장사가 끝난후 도방장사들은 경대승의 유지를 받들어 해산을 결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김자격은 이를 반란음모라고 고변 하였다. 명종은 도방명단에 오른 장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모두 유배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불과 4,5명뿐 이었다.

 

이것은 당시 명종이 경대승과 도방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였습니다.

 경대승 정권 시절 이의민경대승에게 위협을 받고 경주로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지나치게 이의민을 두려워하여 이의민을 경주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무신정권은 지나치게 장기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곤하게 된것 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4.22 (14:28:10)

드라마_무인시대_경대승03.jpg


신기하네요. 저도 엊그제 무인시대 경대승을 보다가 생각을 좀 했었더랬거든요.

제가 본 장면이 또 마침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명하는데

심복들이 귀족들의 반발을 염려하며 만류하는 장면이기도 했었죠.


내심 든 생각은 그 시대는 봉건사회고 어쩔 수 없이 썩은 서까래라도 그 사회를

떠받히고 있는 세력인데 그 기둥을 대체할 아무 세력없이 이를 쳐내려하는 모습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이 되면서 상호작용이 활발하니까 자신의 개혁을 지지해줄

백성들의 세력이 규합하여 힘이 되어줄 수도 있었을텐데(하긴 인터넷이 되는 지금도

개혁은 쉽지 않군요ㅡㅜ) 그 시대라면 당연히 경대승의 세가 없으므로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니 실패하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과감히 내딛었다는 점. 비록 실패했지만

후에 그 길을 또 걸을 누군가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데이터를 남겼다는 점에서

이미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첨부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4.22 (16:56:13)

경대승때만 해도 본격 무신개판시대는 아니었소.

당시 문신들의 전횡은 송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소.


고려가 금을 견제하자 송이 고려에 엄청난 조공폭탄을 퍼부어서

고려는 졸지에 부자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사치와 낭비가 심해졌던 것이오.


(조공은 원래 바치는게 아니라 받는 것임. 1을 주고 10을 받음.)

(소동파가 고려에 퍼주느라 중국이 거덜난다고 탄식했을 정도.)


아랍상인들이 개경까지 들어와서 사치와 낭비가 전면화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실무를 맡은 하층민이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생기는 법.


그 때문에 무신들이 득세하고 전국각지에 천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정중부, 경대승은 그 과도기 인물이오. 


(문신이 무신을 차별했다는건 개소리임. 본질은 부의 증가로 인한 사치풍조.)

나라가 사치해지면 문신의 업무인 도덕이 설자리 없어짐. 고려는 섹스공화국으로 변질됨.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는데

이상우쌤은 고려시대>무신시대 전체과정을 두고


무신시대 초기의 잠깐 실력자 경대승에게 갖다 대는 착오를 저지르지 않았나 싶소.

본격 무신시대를 논하려면 이의민, 최충헌을 논해야 하오. 


역사의 어떤 본질을 빼놓고 피상적인 인상비평으로 가면 깝깝해지오.

당시의 본질은 송나라가 고려에 퍼부은 막대한 부가 어떻게 균분되느냐이며

이에 영향받은 하층민의 신분상승 욕구를 어떻게 시스템화 할 것이냐이오.


물론 송이 몰락하고 몽골이 일어나면서 이상하게 판도가 돌아갔지만.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4.22 (17:34:13)

저 같은 경우 상우님이 경대승을 말했을 때 문득 떠오른 인물이

조선시대 조광조와 송나라의 왕안석을 떠올렸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서도 제가 앞서 떠올린 두 인물이 

국가의 근본을 개혁하려다 좌절한 인물이기에 그들의 개혁은

항상 성공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을 짙게 남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렬님의 말처럼 국외관계가 급변하고 이로 인해

막대한 부가 고려에 몰리며 외부세계와 더불어 하층민의 신분상승

욕구로 인해 내부세계까지 연동되어 에너지가 꿈틀되던 그 시대,

결과적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전횡, 급변하는 외부세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몽고에게 초토화된 고려 말기를 떠올린다면,


정권을 잡았던 무신 중 유일하게 백성들의 입장에서 개혁을 하려했던

경대승이 단명하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고 그와 더불어 하층민의 신분상승

욕구를 제대로 돌려 귀족에 대응할 수 있는 이를테면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

같은 자신을 지지하는 개혁세력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면 고려가 또다른

역사를 쓰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상우님이 묻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봤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4.22 (17:38:20)

경대승이 특별히 개혁을 추진한 것은 아니고

단지 고려가 망하고 정권이 바뀌어야 했는데 당시 민중의 에너지가 그 정도가 못 된 거죠.

애매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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