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
그것은 일의성과 체계에 의해 가능하다. 일의성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며, 체계는 거기서부터 점차 가지를 쳐 다양한 모습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일의성은 완전성에 의해 가능하며 완전성은 모형적 사고에 의해 도달된다. 처음 완전한 하나의 모형을 얻어 거기에 에너지를 태우면 자연의 체계에 의해 무한복제하며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완전성 이야기는 완전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완전한 것은 낳는다. 낳음에 의해 세상은 널리 이룩되었으므로 낳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낳는 것은 어떤 것인가? 짝이 있는 것이다. 모든 낳음은 어떤 짝지워진 둘 사이에서 일어난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있고, 존재는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선다. 세상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깃든다. 길은 집과 집 사이에 있다. 산은 강과 강 사이에 있다. 들은 산과 산 사이에 있다. 일은 시작과 끝 사이에 있고, 화음은 고음과 저음 사이에 있고, 명암은 밝음과 어둠 사이에 있고, 칼라는 빛과 어둠 사이에 있다. 완전한 것은 서로 다른 둘이 그렇게 만나서 짝짓는 것이다. 남녀가 짝지어 생명을 탄생시키듯 완전성은 다름과 만남과 짝짓기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부족하다. 그 안쪽에 에너지가 태워져야 한다. 에너지가 없을 때 둘은 교착된다. 그럴 때 끙끙대기만 하고 낳지 못한다. 서로 씨름하고 갈등한다. 여당과 야당처럼 서로 마찰하고, 시어미와 며느리처럼 서로 침범하고, 거간하는 장사꾼처럼 서로 의심한다. 에너지가 없어서 각자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 완전성의 체계 – 낳음, 에너지, 짝짓기, 만남, 다름 완전한 것은 짝지워야 하며, 짝지워지려면 서로 다름을 유지함으로써 공간을 벌려야 하며 그렇게 각자 자기 포지션에 자리잡아야 하고, 그 벌려진 사이의 공간으로 에너지를 소통시켜야 한다. 그럴 때 속시원하게 낳는다. 닭이 알을 낳듯이, 구름이 비를 쏟아내듯이, 악사가 신들린 듯 연주하듯이, 작가가 미친 듯이 써갈기듯이, 고흐가 1천 점의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듯이 속시원하게 낳아낸다. 그것은 체계다. 체계에 의해 짝지워진 둘은 일의성을 획득한다. 각각의 것이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일정한 원리에 따라 계통적으로 결합된 것이 체계다. 체계가 에너지를 얻으면 생장한다. 생물은 체계에 의해 번식하고, 행성은 체계에 의해 탄생하고, 구름은 체계에 의해 모여들고, 문명은 체계에 의해 진보한다. 점점 커지고 좋아진다. 체계를 얻지 못할 때 서로의 발목을 잡고 쪼그라들어 죽는다. 체계적인 것은 일의적인 것이다. 일의성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하나가 둘을 결정한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고 하면 두 사건이다. 산은 산대로 솟고 물은 물대로 깊다. 에너지는 산이 솟는데 한 번 작동하고, 물이 깊는데 한 번 작동한다. 에너지는 두 번에 걸쳐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일의성은 ‘산이 높으면 물이 깊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한 번 작동한다. 산과 물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 동시에 결정된다. 사과를 둘로 쪼갠다면 한번의 칼질에 의해 두 단면이 동시에 결정된다. 이렇듯 서로 다른 둘이 일의성을 얻을 때 체계화 된다. 일의성에 의해 남녀는 다름을 유지하며 하나의 부부를 이루고, 명암은 다름을 유지하며 하나의 빛을 이루고, 강산은 다름을 유지하며 하나의 대지를 이루고, 인과는 다름을 유지하며 하나의 사건을 이룬다. 서로를 다치지 않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점차 커진다. 남녀는 낳아서 70억 인류로 커지고, 빛은 낳아서 수천가지 색깔로 커지고, 강산은 낳아서 수많은 산곡으로 커진다. 체계는 일의성에 의해 각자가 다름을 유지한 채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도 많은 숫자를 수용한다. 큰 나무가 많은 가지를 가지듯이, 큰 강이 많은 지류를 가지듯이, 큰 산맥이 많은 봉우리를 가지듯이, 큰 도시가 원활하게 소통하듯이 전체가 하나의 뿌리에 기대어 하나의 방향으로 생장한다. 체계를 얻으면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도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는 다르다. 다르므로 만나야 한다. 만나서 짝을 이루어야 한다. 거기에 에너지를 태워야 한다. 그렇게 소통하면 낳는다. 각자 별도의 영역을 가지고, 서로 다치지 않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필요한건 완전성이다. 먼저 일 단위의 완전성을 획득한 다음 거기에 에너지를 태우면 낳음의 무한복제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반면 다름이 없고, 만나지 못하고, 짝짓지 못하고, 에너지를 태우지 못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교착된다. 서로 침범하여 작게 쪼그라들고 만다. 완전성을 얻지 못하면, 낳지 못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학문 학문은 지식의 체계다. 중요한건 체계다. 체계는 인간의 학문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존재했다. 원래부터 존재하는 자연의 체계에 인간의 지식을 올려태운 것이 학문이다. 노자는 무위자연이라고 했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에서 유래하는 본래의 존재에 주목하라는 말이다. 인간의 자동차를 버리고 자연에서 휴식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자연의 자동차에 올라타라는 말이다. 자연에 무위자연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있다. 그것은 체계다. 체계는 생물의 진화에서 관측된다. 진화는 생물 뿐 아니라 무생물에도 일어난다. 행성의 진화나 광물의 결정이 그렇다. 다만 무생물은 생물과 달리 다름이 크지 않으므로 진화의 정도가 약하다. 다른 만큼 짝짓고 짝짓는 만큼 진화한다. 인간의 학문도 마찬가지다. 다른 만큼 짝짓고 짝지어서 진보한다. 동물은 식물보다 다름이 크다. 따라서 진화의 폭도 크다. 더 많은 짝짓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주사위 눈 숫자만큼 경우의 수가 나오듯이 다름의 크기만큼 진화는 일어난다. 진화의 총량은 비례식으로 결정되어 있다. 결정된 한도 안에서 확률에 의해 구현될 뿐이다. 인간의 학문도 마찬가지다. 학문의 진보방향과 진보총량도 결정되어 있다. 다만 정해진 한도 안에서 확률적으로 구현될 뿐이다. 생물의 진화는 다름 + 에너지 때문이다. 학문 역시 그러하다. 서로 다른 세포들이 모여 생명을 이루듯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지혜가 모여 학문을 이룬다. 학문은 생물처럼 살아있다. 그 학문의 생명성에 주목해야 한다. 학문은 인류의 집단 작업이다. 지식내용이 아니라 집단의 공공성에 주목해야 한다. 다름을 유지한 70억의 인류가 70억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뇌를 이루고 있다. 컴퓨터가 집적하여 인터넷을 이루듯이 인류는 학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은 생장한다. 의미는 거기에 있다. 학문이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서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학문이 점차 생장하여 스스로 완성되는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채소는 인간에게 이로움을 준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 채소의 친절한 배려는 아니다. 꽃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완성될 뿐이다. 채소는 인간에 의해 요리되지만 꽃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된다. 거기서 진보의 원천인 다름은 얻어진다. 인간에게 봉사하지 않는 꽃에서 이로움을 알아채는 것은 인간의 지혜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학문이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문은 스스로 완성되는 것이며 거기서 이로움을 얻는 것은 지혜다. 인간을 위하여 학문할 것이 아니라 학문 자체의 결을 따라 완성시켜야 한다. 학문의 완전성에 주목해야 한다. 무위자연의 체계가 본래 존재한다. 본래를 따라가야 한다. 채소는 누구나 요리할 수 있지만 꽃은 아는 사람만이 이로움을 얻는다.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 학문은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며 아는 사람만이 이를 즐거워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학문의 분류 학문은 인문학과 자연학으로 대별된다. 자연학을 생장시키는 에너지는 자연의 다름에서 공급된다. 자연의 다름에서 학문의 큰 나무를 생장하게 할 포지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서 다름을 창의하여 에너지를 조달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에서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에너지의 메커니즘을 따라가야 한다는 거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은 원래 존재한다. 눈이 있기에 그림이 있고, 귀가 있기에 음악이 있고, 입이 있기에 요리가 있는 것이다. 다름에 의해 에너지의 낙차가 결정되어 있다. 짝짓기 만으로 학문은 달성된다. 눈과 귀를 짝지으면 영화가 되고, 눈과 몸을 짝지으면 패션이 된다. 예컨대 윤리나 도덕 따위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진화가 일정한 법칙을 따르듯이 사회의 윤리나 도덕 역시 일정한 생장 메커니즘을 따른다. 경제에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작동하듯이 법칙대로 가는 것이다. 윤리는 사회의 공적 프로세스를 담보하는 신용자산이며, 도덕은 개인의 신용자산이다. 윤리는 도로망과 같고 도덕은 운전자의 운전능력과 같다. 원할한 소통을 위해서는 도로망이 좋아야 하며 운전사의 기량도 뛰어나야 한다. 경제 역시 시장이 가지는 신용이 있고 개인이 소유한 신용이 있다. 법칙대로 가므로 금리를 조절하여 제어가 가능하다. 법칙은 에너지의 낙차를 따라 에너지가 가는 방향으로 간다. 인간은 다름을 생성하여 그 에너지의 진행경로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무위자연의 가르침을 따라 시장원리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막연히 자연에 맡겨두고 방임해도 곤란하다. 무위자연이라는 자동차에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태워야 한다. 기름없는 자동차는 무위든 인위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포지셔닝에 의한 다름의 생성이 그 자동차를 운행할 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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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와 벼룩과 개미핥기는 그저 만들어진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삶의 의미는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승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명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쾌락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인간을 만들어 가는데 있습니다. 우리편에 들어야 가능합니다. 우리편은 손잡고 함께 만들어 가는 자의 포지션에 서는 것입니다. 반면 싸우려 하거나 방어하려 하는 자는 만들어질 재료입니다. 조각가의 손길이 될지 돌이 되어 조각가의 정을 맞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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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했음다. ^^
완전성은 인간의 한계에 나태해져있던 나를 깨웠습니다.
완전성에 대한 동렬님의 정립으로
모든 것을 완전한 것과의 만남이냐, 아니냐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만나면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첫만남으로 거의 판가름났습니다.
만남이 결과를 낳는 것이지, 만남 이후 신뢰쌓기니 밀당이니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수준이 완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 아직 헤메고 있는지 이론속에서 현실속에서
확인하면 그뿐.
현재 학교변화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조짐이 좋습니다.
올해는 뭔가가 될 듯 합니다. 점차 팀의 구성이 짜임새가 생기고
성공사례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원래 있으나 아직 찾지 못한 그 모델을 발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EBS 방송 폭력다큐 자문도 하고, 아무님과 연결되어 강원방송에서 촬영도 하고,
여기 저기서 연락이 와서 다른 학교에가서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연수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멍석이 깔리니까 부족한 것이 보이더군요.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기술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로 함께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벗어나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 서니
관점자체가 달라집니다. 큰 틀을 짜는데 관심이 보이지, 세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도와줘서 해결이 잘되긴 하지만, 일일이 신경쓰자니 손이 많이 가서 피곤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제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아직은 세상에 나가 내 원본을 복제해서
자동적으로 보급하기는 1-2년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이너스 하는 일만 남았고.
그나저나 , '이기는 법' 책은 어디 구할 수 없을까요?
이러다 중고가가 더 높아질지도....
책은 주문하면 되오.
돈오 주문창에다 이기는 법이라고 써놓으시오.
아무님이 문래동 사무실에 몇 권 갖다놓으면 되겠네.
오호, 남아있다니 다행이네요.
아무님께 책갔다 달라고 말할게요.
돌아오는 목요일 구조론 모임에 참석해서 직접 수령하겠습니다.
만남이 결과를 낳는 것이지, 만남 이후 신뢰쌓기니 밀당이니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수준이 완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 아직 헤메고 있는지 이론속에서 현실속에서
확인하면 그뿐.
- 멋져요
큰 나무을-> 를
"학문이 인간 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문은 스스로 완성 되는 것이며 거기서 이로움을 얻는 것은 지혜다.
학문은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며 아는 사람만이 이를 즐거워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가슴에 이 문구들이 꽉 차오름.